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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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아직 여기 계신가? [ 로마서 8:31 - 8:39 ]
나를 대적하는 자는 그 누구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
나를 고발하는 자도 그 어떤 누구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실망과 의심이 내 마음을 누른다.
과연 내 삶 속에 사역 속에 우리 교회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그리고 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는 과연 바울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논할 자격조차 있는가?
바울은 주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섬기며 항상 그런 죽음의 위기를 당하는 자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백할 수 있지만 과연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주님 앞에 할 수있을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했던 바울과 같은 사역은 근처조차 못간다 할지라도, 나 개인의 영적 삶의 관리는 어떠한가? 죄와 싸와 이기려는 단호한 각오가 있는가? 언제든지 유혹에 빠져 넘어지기 쉽고 실지로 넘어진다. 결심과 회개가 곧 무력해지곤 하는 것을 늘상 체험한다. 말씀을 연구하고 나누는 자가 이토록 무기력 하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 그래도 나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리고 나의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리고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이유나 조건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쾌락과 유혹에 빠져 시험에 넘어진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솔직히 주님을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지 않는가? 지금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고민 하며 괴로워 하며 갈등하며, 또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견딜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한계 내에서 다 행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바울처럼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런 나의 모습을 항상 괴로워하는 것이 나의 모습은 아닌가? 지금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제 정신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늘상 주님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떠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다. 잘못된 것은 언제든지 회개하기를 원하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든지 나를 받으실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시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에, 내가 경건치 않을 때에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아낌없이 내게 주신 그 분께서 나를 사랑치 못할 그 어떤 상황도 존재할 수 없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낙망 가운데 있다면, 의심 가운데 있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은 하나다.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 싸워 이길 길을 생각하고 결단에 옮기는 것이다. 성령님이 도우신다. 그러나 그 분으로도 부족하다면, 죄와 싸워 이기려는 단호한 각오를 가진 동료와 함께 accountable한 관계성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 늘 놀라운 사랑을 받는 자로서 엄살 부리지 말자, 마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처럼 낙망이나 좌절에 빠지지도 말자. 내 모습을 보기보다는 그런 내 모습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주님을 사랑한다.
나를 대적하는 자는 그 누구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
나를 고발하는 자도 그 어떤 누구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실망과 의심이 내 마음을 누른다.
과연 내 삶 속에 사역 속에 우리 교회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그리고 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는 과연 바울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논할 자격조차 있는가?
바울은 주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섬기며 항상 그런 죽음의 위기를 당하는 자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백할 수 있지만 과연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주님 앞에 할 수있을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했던 바울과 같은 사역은 근처조차 못간다 할지라도, 나 개인의 영적 삶의 관리는 어떠한가? 죄와 싸와 이기려는 단호한 각오가 있는가? 언제든지 유혹에 빠져 넘어지기 쉽고 실지로 넘어진다. 결심과 회개가 곧 무력해지곤 하는 것을 늘상 체험한다. 말씀을 연구하고 나누는 자가 이토록 무기력 하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 그래도 나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리고 나의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리고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이유나 조건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쾌락과 유혹에 빠져 시험에 넘어진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솔직히 주님을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지 않는가? 지금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고민 하며 괴로워 하며 갈등하며, 또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견딜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한계 내에서 다 행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바울처럼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런 나의 모습을 항상 괴로워하는 것이 나의 모습은 아닌가? 지금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제 정신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늘상 주님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떠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다. 잘못된 것은 언제든지 회개하기를 원하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든지 나를 받으실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시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에, 내가 경건치 않을 때에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아낌없이 내게 주신 그 분께서 나를 사랑치 못할 그 어떤 상황도 존재할 수 없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낙망 가운데 있다면, 의심 가운데 있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은 하나다.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 싸워 이길 길을 생각하고 결단에 옮기는 것이다. 성령님이 도우신다. 그러나 그 분으로도 부족하다면, 죄와 싸워 이기려는 단호한 각오를 가진 동료와 함께 accountable한 관계성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 늘 놀라운 사랑을 받는 자로서 엄살 부리지 말자, 마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처럼 낙망이나 좌절에 빠지지도 말자. 내 모습을 보기보다는 그런 내 모습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주님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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