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하 목사(와싱톤 교회)
예수님짜리 교회 (2)
이 글을 시작할 때, 제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영적 지식과 경험이 쌓여가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고 잘 나가는 것 같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뭔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고 허전함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의 밑바탕에는 “구원 받은 내가 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제 안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교과서적인 대답은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복음주의자인 우리는 이 말을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물질과 시간을 바쳐 전도하고 선교에 힘써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시켜 제자를 삼는 것이 지상명령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이유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 교회가 성장해야 하고, 제자훈련을 철저히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곤 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이긴 하지만, 과연 이것이 정말 마음 속에서부터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제겐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 영혼을 더 많이 구원해서 제자로 삼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늘 마음 속에 가책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늦잠을 자거나 휴일에 한 시간이라도 더 잔다면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시간을 아껴 전도해야 하는데, 내가 잠을 더 자는 사이에 몇 명이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는 군것질하고 나서, 그것 살 돈으로 선교 헌금을 냈다면 몇 사람은 더 구원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책을 받아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놔두고 한가하게 휴가를 가다니... 전도하러 가지 않고 TV를 보다니... 돈 아껴서 선교사에게 보내지 않고 식당에 가서 배불리 먹고 팁까지 주고 오다니... 버스 타고 일 다녀도 되는데 차를 사다니... 멀쩡히 잘 가는 차를 놔두고 새 차를 뽑다니... 영혼 구원시킬 시간이 부족한데 학교를 다니다니... 하루종일 가책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1,100 명의 유대인을 구출했던 쉰들러가 ‘더 구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좀 심하게 비약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실제로 마음 속 깊이 이것 때문에 고민했고 부담이 가득했습니다. 가책이 너무 심할 때는 이런 저런 논리를 펴서 합리화시키곤 했습니다. 내가 잘 먹고 잠을 충분히 자야 건강해져서 주님의 제자로 살며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 적당히 여가활동도 해야, 또는 차가 튼튼한 게 있어야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 영혼을 구원하려면 그들이 사는 세계를 잘 알아야 하므로 공부도 많이 하고 폭넓은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도 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지 않은가? 제자훈련도 열심히 하고, 선교에도 앞장서고... 더 나아가 영혼 구원 말고도 주님을 예배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그렇지만, 이건 천국 가서 영원토록 할 것이므로 이유는 안됨. 이것을 하려면 빨리 세상을 떠나는 게 나음. 이것이 이유라면 예수님 영접하고 세례 받자마자 그 길로 죽는 게 제일 좋을 것임 등등.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이런 논리들로 정당화시킨다면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를 놓고 또 고민이 시작됩니다. TV를 하루 두 시간 정도 보는 것은 괜찮고 그 이상은 안 되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식사하는 것은 괜찮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정식 디너 먹는 것은 안 되나? 토요타 캠리 정도는 괜찮고, 렉서스는 사치인가? 휴가를 일주일 정도 가는 것은 되고 그 이상은 과한 것인가? 2십만 불짜리 타운하우스는 괜찮고 40만 불 넘는 단독주택은 사치인가? 대학까지는 괜찮고 대학원 이상 가는 것은 시간 낭비, 돈 낭비인가? 등등 늘 강박관념 속에 살게 됩니다.
문제는 한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속시원하게 한계가 설정되어 있다면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 안에서 맘 편하게 헌신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이 없으니 늘 뭔가 쫓기듯이 주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당화시키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꽤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 수준에 맞춰야 한다고 수백만 불짜리 집에 사는 목사가 있는데, 너무나도 그것을 당연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그를 속물이라며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이 더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과 핑계를 대며 합리화하곤 했습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가책과 합리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저는 정말 고통스러웠고 나중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 구원은 고사하고 헷갈릴 대로 헷갈려 있는 자신을 한탄해야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극단적으로 고민을 한 케이스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구원 받고 나서 이 세상에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었습니까?
한 가지 질문 더
“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더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왜 다닙니까? 왜 주일마다 교회의 예배에 참석합니까? 왜 구역예배를 하며, 기도회를 가지며, 봉사를 하며, 성경공부를 하며, 헌금을 하며, 각종 행사에 참여합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다니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까?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뭔가 천벌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까? 주일성수를 하면 복을 받기 때문입니까?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게 채워 주시기 때문에 드립니까? 헌신하고 봉사하면 천국에서 상급을 받기 때문에 열심히 합니까? ‘왜’ 교회를 다니는지도 모르고 교회에 열심인 것은, 좀 심하게 말하면 맹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번째 질문을 한 이유는 두번째 ‘왜’와 첫번째 ‘왜’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밀접한 정도가 아니라 둘은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교회로 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이전의 나처럼 복음을 알되 아직 반밖에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것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나가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복음
우선 사도 바울의 편지에 등장하는 아래의 구절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6:25-27).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린도전서 2:6-7).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에베소서 3:9-11).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5-27).
위의 네 성경구절들에 다 등장하는 표현이 있지요? 모두 다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뭔가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는 드러났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감추어졌던 것을 각각 “복음”, “하나님의 지혜”, “비밀의 경륜”, “비밀” 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감추어졌던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앞으로 자세히 풀어갈 것인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영혼 구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감추어졌던 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영세 전,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 구원은 창세 후에 인간이 타락했으므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되는 궁극적인 이유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세우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창세 이후에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영혼의 구원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필수과정이지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깨달았다고 확신하며 복음주의자로 살아왔던 저는 이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복음이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온전한 복음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던 강박관념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해졌습니다. 바로 만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복음(하나님의 지혜, 비밀의 경륜, 비밀)을 위해서인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