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들고 온 공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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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들고 온 공로패
최희주
해병대에 입대 한 둘째 아들(Raymond)이 모든 힘든 훈련을 마치고 휴가 오던 날이
공교롭게도 나는 내적치유 참석을 하러가는 날이었다.
동생이 공항에서 픽업해주겠다는 제의도, 남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핑계를 대고 거절한Raymond는 택시로 집에 도착했다.
내가 집에 돌아오던 날,
Raymond는 함께 휴가 나온 친구들과 함께 라스베가스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 나온지 5일이 되도록 아직도 나는Raymond를 만나보지 못했다.
Raymond를 기다리며 갖다 놓은 짐을 정리하는데 짐 속에서 빨간색의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펼쳐보니 Raymond가 받아온 공로패 였다.
사전을 펼쳐 놓고 한 마디라도 잘못 해석할 까봐 조심스레 찾아보았다.
공로 패에 적혀 있는 글을 다 읽는 순간 나는 그만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일년 전,
입대할 때의 힘들었던 과정과 쓸쓸히 떠나 갔던 아들의 모습이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갔다. Raymond는 아들 셋 중에 가장 총명하고 순발력이 뛰어나서 우리에게 가장 기대되었던 아들이었다.
그랬던 아들이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우리를 실망시키기 시작했다.
늦잠형 체질이라 매일 아침,
그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나에겐 큰 전쟁이었다.
늦잠형 체질의 습성을 가진 캘리포니안이 추운 보스톤 지역에 가서 생활한다는 것은
아주 큰 모험 중의 하나였다.
그 결과 아주 어렵게 힘든 고비를 넘기면서 졸업할 수 있었다.
5년간의 비싼 사립 대 등록금(20 여만 불이 소비되었음)을 내고
졸업 시킨 아들의 대답은 해병대를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것도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간다고 하여 아빠의 반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달래고 설득해서 겨우 장교 지원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체중이 꽤 나가는 그에게는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 다이어트를 근 이 년 지속하면서 직업도 잡지 않고
장교 지원 결과만 기다리는 아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마치 돌덩이가 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체력이 워낙 운동 체질이 아니었던
아들에게 장교 시험 통과는 아주 힘든 관문이어서 그만 일년 반의 세월을 허송 하고 말았다.
기다림과 황제 다이어트로 2 년 여 유지해온 아들이 한계에 도달했는지
어느날부터 체중이 마구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아들의 심정도 무척 고통스러웠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의 고통과 불안감은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Raymond는 사병으로 입대를 선언했다.
아빠의 반대는 극도에 달했고 분노와 좌절감을 아빠에게 안겨주어 서로 등을 돌리게 했다.
특수 병과 사병 지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주일 만에 입영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아들은 1월에 입대할 예정이었는데 추수감사절 주간에 받고 보니
체중이 6 파운드 초과되어 살을 빼기 전에는 입대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을 남겨놓고 송별회랑 파티 등으로 살이 쪄도 한참 찔 수 있는 상황에서 6파운드를 빼는 살과의 전쟁을 먼저 치뤄야 했다.
마지막 날까지도 3파운드 가량 초과되어 생전 처음으로 사우나를 갔다.
집을 떠나던 날은 마지막 맛있는 만찬은 커녕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는 금식을 했다.
새벽 미명에 가족의 전송도 받지 못한 채 빈집에서 혼자 쓸쓸히 집을 떠났다.
그 때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시작 된 강도 높은 훈련을 가장 추었던 캘리포니아의 샌디에고 산에서 마쳤다.
두 번 째 훈련은 가장 더웠던 플로리다에서
불쾌지수가 90를 웃도는 끈끈한 여름에 새벽 4시 반부터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매일 잊지 않고 기도해주는 것뿐이었다.
무더위 속에 그냥 앉아 있어도 졸립고 힘든데
가장 민감한 부분의 하이텍 기술을 배우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너무 피곤하다고 했다.
그런 훈련을 무사히 마친 것만도 감사한데 평점 94.48%의 최고 점수를 받아
우등상과 공로패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Raymond이 너무나 대견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야 물고기가 물을 만나 힘을 얻고 활기차게 헤엄쳐 나가는 모습이 눈 앞에 어른 거렸다.
그 동안 학교에서 받아왔던 그 어느 상장보다도 더 값지고 자랑스러웠다.
그 상장에는 훌륭한 리더쉽으로 동료들의 모범이 되어
동료들을 격려하고 좋은 분위기를 형성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해병대의 위상과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 정말 미국이 필요로 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미국의 해병대원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Raymond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힘든 훈련을 통해서
다듬어 주시고 채워주시고 세워주셨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할 뿐이었다.
더구나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가까이 샌디에고로 배치되게 인도해 주셔서 기쁨이 넘쳐 흘렀다.
할렐루야 !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터득하게 된 사실은 과보호가 자녀에게 열등감을 형성해 준다고 한다.
아들의 경우는 나의 과보호로 인해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었다. )
최희주
해병대에 입대 한 둘째 아들(Raymond)이 모든 힘든 훈련을 마치고 휴가 오던 날이
공교롭게도 나는 내적치유 참석을 하러가는 날이었다.
동생이 공항에서 픽업해주겠다는 제의도, 남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핑계를 대고 거절한Raymond는 택시로 집에 도착했다.
내가 집에 돌아오던 날,
Raymond는 함께 휴가 나온 친구들과 함께 라스베가스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 나온지 5일이 되도록 아직도 나는Raymond를 만나보지 못했다.
Raymond를 기다리며 갖다 놓은 짐을 정리하는데 짐 속에서 빨간색의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펼쳐보니 Raymond가 받아온 공로패 였다.
사전을 펼쳐 놓고 한 마디라도 잘못 해석할 까봐 조심스레 찾아보았다.
공로 패에 적혀 있는 글을 다 읽는 순간 나는 그만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일년 전,
입대할 때의 힘들었던 과정과 쓸쓸히 떠나 갔던 아들의 모습이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갔다. Raymond는 아들 셋 중에 가장 총명하고 순발력이 뛰어나서 우리에게 가장 기대되었던 아들이었다.
그랬던 아들이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우리를 실망시키기 시작했다.
늦잠형 체질이라 매일 아침,
그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나에겐 큰 전쟁이었다.
늦잠형 체질의 습성을 가진 캘리포니안이 추운 보스톤 지역에 가서 생활한다는 것은
아주 큰 모험 중의 하나였다.
그 결과 아주 어렵게 힘든 고비를 넘기면서 졸업할 수 있었다.
5년간의 비싼 사립 대 등록금(20 여만 불이 소비되었음)을 내고
졸업 시킨 아들의 대답은 해병대를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것도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간다고 하여 아빠의 반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달래고 설득해서 겨우 장교 지원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체중이 꽤 나가는 그에게는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 다이어트를 근 이 년 지속하면서 직업도 잡지 않고
장교 지원 결과만 기다리는 아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마치 돌덩이가 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체력이 워낙 운동 체질이 아니었던
아들에게 장교 시험 통과는 아주 힘든 관문이어서 그만 일년 반의 세월을 허송 하고 말았다.
기다림과 황제 다이어트로 2 년 여 유지해온 아들이 한계에 도달했는지
어느날부터 체중이 마구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아들의 심정도 무척 고통스러웠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의 고통과 불안감은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Raymond는 사병으로 입대를 선언했다.
아빠의 반대는 극도에 달했고 분노와 좌절감을 아빠에게 안겨주어 서로 등을 돌리게 했다.
특수 병과 사병 지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주일 만에 입영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아들은 1월에 입대할 예정이었는데 추수감사절 주간에 받고 보니
체중이 6 파운드 초과되어 살을 빼기 전에는 입대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을 남겨놓고 송별회랑 파티 등으로 살이 쪄도 한참 찔 수 있는 상황에서 6파운드를 빼는 살과의 전쟁을 먼저 치뤄야 했다.
마지막 날까지도 3파운드 가량 초과되어 생전 처음으로 사우나를 갔다.
집을 떠나던 날은 마지막 맛있는 만찬은 커녕 물 한 모금도 못 마시는 금식을 했다.
새벽 미명에 가족의 전송도 받지 못한 채 빈집에서 혼자 쓸쓸히 집을 떠났다.
그 때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시작 된 강도 높은 훈련을 가장 추었던 캘리포니아의 샌디에고 산에서 마쳤다.
두 번 째 훈련은 가장 더웠던 플로리다에서
불쾌지수가 90를 웃도는 끈끈한 여름에 새벽 4시 반부터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매일 잊지 않고 기도해주는 것뿐이었다.
무더위 속에 그냥 앉아 있어도 졸립고 힘든데
가장 민감한 부분의 하이텍 기술을 배우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너무 피곤하다고 했다.
그런 훈련을 무사히 마친 것만도 감사한데 평점 94.48%의 최고 점수를 받아
우등상과 공로패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Raymond이 너무나 대견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야 물고기가 물을 만나 힘을 얻고 활기차게 헤엄쳐 나가는 모습이 눈 앞에 어른 거렸다.
그 동안 학교에서 받아왔던 그 어느 상장보다도 더 값지고 자랑스러웠다.
그 상장에는 훌륭한 리더쉽으로 동료들의 모범이 되어
동료들을 격려하고 좋은 분위기를 형성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해병대의 위상과 전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 정말 미국이 필요로 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미국의 해병대원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Raymond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힘든 훈련을 통해서
다듬어 주시고 채워주시고 세워주셨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할 뿐이었다.
더구나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가까이 샌디에고로 배치되게 인도해 주셔서 기쁨이 넘쳐 흘렀다.
할렐루야 !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터득하게 된 사실은 과보호가 자녀에게 열등감을 형성해 준다고 한다.
아들의 경우는 나의 과보호로 인해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