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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비록 퍼온 글이지만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 위해서
이곳에 실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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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의 비법
adreana lee 2008-09-22 (09:30:14)
아래의 내용은 인터넷에서 퍼왔어요. 저런 환경에서도 저만큼 하는데, 우리는 훨씬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서 하고 있으니까, 좋은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시성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장리용, 그의 집안은 작은 마을 안에서도 손꼽힐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가정환경은 어려웠으나, 장리용은 학교에서 줄곧 모범생이었다. 그가 고교 중퇴를 결심할 때까지.
학업을 포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가난이었다. 집안의 가난은 아버지가 매일같이 쌀과 돈을 꾸러 다녀야 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결국 1992년에 이르러, 장리용은 고교 2학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외지로 나가 돈을 벌게 된다. 그는 공부에 대한 미련을 간직한 채,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품고 광저우로 갔다.
광저우에서 잡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장리용은 직장 생활을 경험하며 영어의 중요성을 차츰 깨닫게 된다. 영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광저우를 떠나 중국의 명문인 칭화대학교 학생식당에 취직해 야채를 써는 잡부가 된다. 그에게 있어 명문 칭화대학교만큼 공부와 일을 병행하기 좋은 환경은 없었기 때문. 대우는 광저우에서만 못했으나, 그는 자신의 공부를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에 만족했다. 그렇게 칭화대에서의 영어 독학이 시작되었다.
칭화대 내의 네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장리용의 숙소. 장리용은 그곳에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7-8시간씩 공부하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하다가 새벽 두 시를 넘기는 일도 있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의 영어 공부는 그쳐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극기’라는 두 글자와 함께 칭화대의 교훈 ‘행승우언(行勝于言)’이 붙어있다.
칭화대 식당은 규정상 학생들에게 배식하기 전에 직원들이 먼저 식사를 하게끔 되어 있다. 이 식사시간은 겨우 15분. 이 시간마저도 아까웠던 장리용은 7분 안에 식사를 마치고 남은 8분 동안 식당 구석에서 영단어를 외웠다. 그의 동료들은 이상한 녀석이라고 수군댔다.
“저는 칭화대 학생들처럼 시간이 많지도, 정식으로 공부하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해선 부단히 자투리 시간을 모아야 했죠. 1분 1초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영어 공부가 뭐 그리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그저 필요한 것은 용기, 그리고 의지라 생각합니다. 소리 내어 영어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용기와 그 노력을 계속하게 만드는 의지,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겁니다.
또한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른 공부 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에는 결혼식이나 생일 파티 등에 저를 초대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돈도 없는 데다가 공부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모두 거절했었죠. 돈 쓰기 싫어서 저러는 거라고 수전노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래도 제가 성공한 후에는 다들 절 이해해 주더라고요.”
칭화대 식당은 매년 인사고과가 이루어진다. 장리용은 칭화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식당에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만을 도맡았다. 동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실한 업무 태도만이 칭화대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영어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일이 더 우선이었다. 영어 공부를 한다고 일에 소홀했던 적은 없단다.
장리용이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땐, 부족한 시간이 최대의 애로사항이었다. 퇴근 후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에 열 한 시간을 일하고 돌아와 다시 영어책을 붙잡았다.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일종의 신념이었다고 장리용은 고백했다.
중졸 학력의 학교식당 잡부가 오직 독학으로 CET-4를 통과하고 PBT 토플 630점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퍼지자, 칭화대 인터넷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장리용은 순식간에 칭화대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명문 칭화대생들이 일개 식당 잡부에게 편지를 써 영어공부 비법을 묻기 시작했고, 대학교 강연 초청이 이어졌다. 그의 일화가 전국에 알려진 후에는, 매일 수십 통씩 날아드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해 인민일보는 장리용을 <중국 10대 올해의 인물>에 선정했다.
현재 그는 영어교육사업에 종사하며 대학에 출강하는 등 사회 각계에 영어공부법을 전수하고 있다.
이곳에 실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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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의 비법
adreana lee 2008-09-22 (09:30:14)
아래의 내용은 인터넷에서 퍼왔어요. 저런 환경에서도 저만큼 하는데, 우리는 훨씬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서 하고 있으니까, 좋은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시성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장리용, 그의 집안은 작은 마을 안에서도 손꼽힐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가정환경은 어려웠으나, 장리용은 학교에서 줄곧 모범생이었다. 그가 고교 중퇴를 결심할 때까지.
학업을 포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가난이었다. 집안의 가난은 아버지가 매일같이 쌀과 돈을 꾸러 다녀야 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결국 1992년에 이르러, 장리용은 고교 2학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외지로 나가 돈을 벌게 된다. 그는 공부에 대한 미련을 간직한 채,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품고 광저우로 갔다.
광저우에서 잡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장리용은 직장 생활을 경험하며 영어의 중요성을 차츰 깨닫게 된다. 영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광저우를 떠나 중국의 명문인 칭화대학교 학생식당에 취직해 야채를 써는 잡부가 된다. 그에게 있어 명문 칭화대학교만큼 공부와 일을 병행하기 좋은 환경은 없었기 때문. 대우는 광저우에서만 못했으나, 그는 자신의 공부를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에 만족했다. 그렇게 칭화대에서의 영어 독학이 시작되었다.
칭화대 내의 네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장리용의 숙소. 장리용은 그곳에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7-8시간씩 공부하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하다가 새벽 두 시를 넘기는 일도 있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의 영어 공부는 그쳐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극기’라는 두 글자와 함께 칭화대의 교훈 ‘행승우언(行勝于言)’이 붙어있다.
칭화대 식당은 규정상 학생들에게 배식하기 전에 직원들이 먼저 식사를 하게끔 되어 있다. 이 식사시간은 겨우 15분. 이 시간마저도 아까웠던 장리용은 7분 안에 식사를 마치고 남은 8분 동안 식당 구석에서 영단어를 외웠다. 그의 동료들은 이상한 녀석이라고 수군댔다.
“저는 칭화대 학생들처럼 시간이 많지도, 정식으로 공부하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해선 부단히 자투리 시간을 모아야 했죠. 1분 1초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영어 공부가 뭐 그리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그저 필요한 것은 용기, 그리고 의지라 생각합니다. 소리 내어 영어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용기와 그 노력을 계속하게 만드는 의지,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겁니다.
또한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른 공부 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에는 결혼식이나 생일 파티 등에 저를 초대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돈도 없는 데다가 공부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모두 거절했었죠. 돈 쓰기 싫어서 저러는 거라고 수전노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래도 제가 성공한 후에는 다들 절 이해해 주더라고요.”
칭화대 식당은 매년 인사고과가 이루어진다. 장리용은 칭화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식당에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만을 도맡았다. 동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실한 업무 태도만이 칭화대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영어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일이 더 우선이었다. 영어 공부를 한다고 일에 소홀했던 적은 없단다.
장리용이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땐, 부족한 시간이 최대의 애로사항이었다. 퇴근 후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에 열 한 시간을 일하고 돌아와 다시 영어책을 붙잡았다.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일종의 신념이었다고 장리용은 고백했다.
중졸 학력의 학교식당 잡부가 오직 독학으로 CET-4를 통과하고 PBT 토플 630점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퍼지자, 칭화대 인터넷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장리용은 순식간에 칭화대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명문 칭화대생들이 일개 식당 잡부에게 편지를 써 영어공부 비법을 묻기 시작했고, 대학교 강연 초청이 이어졌다. 그의 일화가 전국에 알려진 후에는, 매일 수십 통씩 날아드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해 인민일보는 장리용을 <중국 10대 올해의 인물>에 선정했다.
현재 그는 영어교육사업에 종사하며 대학에 출강하는 등 사회 각계에 영어공부법을 전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