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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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부터 온 편지
우리 가족 滅亡史
어머니와 누이동생, 아내, 아들, 두 딸이 굶어죽고 홀로 남은 40代 북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써보낸 한 家族의 滅亡史
<조갑제 注>1999년 7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이 글은 북한 평안남도에 사는 40대 북한 남자가 1999년 4월 말에 쓴 글로 밝힐 수 없는 경로를 통해 月刊朝鮮에 전달됐다. 月刊朝鮮은 그의 手記(수기)에서 신변보호를 위해 이름과 고향을 밝히지 않았고 地名도 지웠다. 여기 실린 글은 그가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기되 일부 표현은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한글 맞춤법에 따라 수정했고 漢字를 倂記했다. 이 글을 소개하는 것은 한 북한 가족이 굶주림으로 사라져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한 필자의 자세가 오히려 더 큰 충격과 사실성을 주기 때문이다. 2000년 봄 현재 이 북한주민은 기독교인이 되어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 많은 人生
<아침은 참자! 점심은 건너뛰자. 저녁은 그냥 자자! 그럼 내일은? 두고 보아야 안다의 교차 속에서 흘러간 세월─그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죄 많은 生(생)을 살아온 내 민족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쓰는 이 글을 눈물로 쓰게 하옵소서. 피로 쓰게 하옵소서. 눈물로 읽게 하옵소서. 피로 읽게 하옵소서. 내 형제 자매들 더는 죽지 않게 붙들어 주옵소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평안남도 시동>
나는 1952년 평양시 ○○구역 ○○동에서 아버지 ○○○과 어머니 ○○○의 둘째아들로 조국이 시련을 겪던 준엄한 시기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총포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성장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의 북새통에 시달리며 총포 소리에 놀란 불행아의 운명 탓인지 모르게 길지 않은 인생을 남보다 몇 갑절 더 힘겨운 가시밭길을 헤쳐왔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사십 소리를 하던 때 벌써 어머니와 동생, 아내와 아들 딸 세 남매를 굶겨 죽이며 한 많은 세상을 살아왔다.
구사일생으로 오늘까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앞날에 대한 운명의 담보가 없고 이 땅에서 굶어 죽는 문제는 시간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나는 遺言(유언)이라도 남겨두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내가 걸어온 위험천만한 길을 우리 형제 자매들이 지금 이 시각도 부지런히 걷고 있으며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의 노예가 돼야 기아사태가 끝나려는지 막막하기만 하기에 나는 유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솟구치는 분노를 누를 길 없다. 그러나 내가 이제 와서 소리친다고 하여 골수에 사무친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요, 재난의 원흉들에게 주먹질을 한다고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내와 아들 딸들이 살아서 나의 품에 돌아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자그마한 한 가정도 먹여 살리기 어려웠던 나의 지난날을 감안할 때 2천3백만이라는 대가정을 그런대로 먹여 살려온 우리 수령님과 친애하는 장군님의 노고가 다소 이해되기도 한다.
다만 나라의 대문에 빗장을 지르지 않고 軍費(군비)경쟁과 우상화 놀음에 그 귀중한 외화를 탕진하지만 않았더라면 나의 혈육들 중에서 다만 한 명이라도 혹시 살아남아 나와 함께 나름대로 사는 날까지 살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저의 소원은 우리 북조선 인민들이 굶주림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럼 너의 두 번째 소원은 무엇이냐?』 하시면 『두 번째 소원은 우리 북조선 인민들이 굶주림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 『그럼 너의 세 번째 소원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의 세 번째 소원도 역시 우리 북조선 인민들이 굶주림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먹는 문제로 이야기꽃 피워 위안받기도
「굶주림!」, 이 세 글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끌어갔을까? 얼마나 많은 이 나라 아이들의 웃음을 빼앗아 갔을까? 「굶주림!」 얼마나 많은 이 나라 어머니들의 피눈물을 뽑아냈을까? 얼마나 많은 이 나라 백성들을 범죄자로 만들었을까?
인간들에게 있어서 먹는 문제는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大事(대사) 중에서 가장 큰 대사를 천하지대본이라 일컬었으니 먹는 문제를 소외시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우리나라에서 가정과 일터에서 때없이 일어나 논하는 괴이한 논쟁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살기 위하여 먹느냐? 먹기 위하여 사느냐?』하는 것이다. 이런 논쟁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벌어지는데 나는 이 논쟁의 마당에서 언제나 「살기 위하여 먹는다」고 대답을 하였다.
동물과 달리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순수 먹는 멋으로 산다는 것은 어쩐지 유치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쟁론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주요 원인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제한된 식생활을 해오기 때문에 체력의 저하로 항상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그리워하고 그런 것을 한 번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도 육류와 기름을 자주 먹을 수 없고 소금과 간장으로 남새(채소)만 삶아 먹으니 『아마 내 밸을 꺼내서 햇빛에 비쳐보면 저 앞집이 내다보일 거요!』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셨기 때문이다.
넉넉지 못한 식량사정과 주요 부식문제에서 비롯된 사람들의 먹는 소리는 일터와 가정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육류, 기름, 달걀, 두부, 콩나물 같은 것은 1년에 다섯 번 정도 맛보는 형편에서 살아온 체력이고 보면 먹는 소리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위안을 스스로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 하나의 훌륭한 방책이다.
일터에서는 휴식참이면 누구든지 먹는 문제를 기본으로 이야기 꼭지를 떼는데 어디 갔다가 누구네 집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얻어먹고 왔다는 자랑을 하는 것이 하나의 추세이다.
아이들도 키워보면 소꿉놀이를 놀아도 먹는 놀이를 놀고 이야기를 주고 받아도 오직 먹는 소리로 생활을 이어간다. 아이들의 끝없는 童心(동심)의 세계를 따라가노라면 마음이 서글퍼지고 어떻게 하면 저 애들을 소원대로 실컷 먹여보나 하고 생각을 해 보지만 나는 일생에 크게 내 소원을 성취해 보지 못하였다.
나는 이 글을 정말 괴롭기 그지없는 상태에서 쓰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사연들과 이제는 잊고 있어서 가슴속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 갈 때 속속들이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지난 날을 거슬러 돌아가야 하니 은근히 두려워진다.
먹는 환상을 펴다 지치면 잠들고…
간장, 된장, 소금마저도 넉넉지 못해 아우성치고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과 못 먹는 음식이 없는 세상을 나의 무딘 붓끝으로 옮겨 놓는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열심히 써야 한다는 숭고한 의무감만은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나의 이 글이 미혹한 점이 있다 해도 읽는 이들은 널리 이해하여 주시길 믿는다.
나의 유년시절은 배고픔 속에서 흘러갔다. 배고픔으로 시작되고 배고픔으로 끝난 내 일생은 우리 가정의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공화국의 역사와 따로 볼 수 없는 역사다.
내가 열 살 나던 1960년대는 배급을 수수쌀로 받았다. 가공업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수수죽을 먹자면 깔깔한 껍질이 목에 걸려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것마저 양이 모자라 어머니는 물을 더 붓는 방법으로 식구들의 식사를 조절하였다. 해 저물도록 동네 아이들과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희멀건 수수죽 한 그릇에 무김치 접시를 얹어주었다.
해는 짧고 밤이 무척이나 길던 겨울밤에 수수죽 한 사발을 게눈 감추듯 먹어버리고 밤을 보내기는 왜 그렇게도 힘들었던지, 나는 지금도 그때 생각이 어제 일인 듯 선하다.
소나무 광솔불을 켠 손바닥만한 방안에 다섯 식구가 가로 세로 누워서 잤다. 나는 형님과 함께 먹는 환상을 펴나가다 지치면 잠들곤 하였다. 그것도 인차 잠들어 버리면 행복한 날이었고 뒤척이다 잠을 못 이루면 배가 고파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서러운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우리 세 남매 중에서 그래도 가장 행복한 아이는 젖먹이 나의 막내동생이었다. 그에게는 나처럼 배고픔을 억지로 참아야 하는 고통이 없었고 먹는 환상이 없었다. 그저 울음소리만 나면 어머니의 젖꼭지가 대기하고 있었으니 그때는 젖 먹는 동생이 왜 그렇게 부럽던지….
자신에게 차려지는 멀건 수수죽 한 그릇마저 밥상에서 선뜻 물러서지 못하고 어른들의 죽그릇을 흘끔흘끔 건너다보는 우리들에게 한 숟갈씩 덜어주신 어머니가 무슨 기력이 변변했겠냐만 그러거나 말거나 칭얼거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다는 조건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나의 막내였다. 가물가물 타들어 가는 광솔불 연기와 아버지가 태우시는 담배연기로 좁은 집안은 숨이 막히게 침침하였는데 식구마다 나름대로 토해내는 한숨소리로 더더욱 음침하였다.
우리 두 형제는 자꾸만 뒤척거리면 혹시 어머니가 밤참이라도 해줄지 모른다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그런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해줄 것 같은 밤참이면 12시 전에 해주셨지 새벽이 가까워오는 이 시간에 해줄 리 만무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도 깃들어와 그저 서럽기만 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
작은 술잔으로 식량을 재서 나누어 먹는 식량사정으로 우리 어머니는 하나의 에누리가 없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우리들이 불쌍하여 『여보, 아이들에게 뭘 좀 해먹이구려!』 했다가 큰 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망스레 쳐다보며 『매일 그렇게 먹이지 못할 바에야 무슨 필요가 있나요?』 했다. 역정 어린 어머니의 대답소리에 아버지는 입맛만 다셨다.
이러한 사정으로 나는 아버지가 제일 좋았고 어머니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깍쟁이라고 은근히 미워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혹시 의붓어머니가 아닌가 생주정을 하다가 어머니에게 매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 어머니의 눈물이 숨겨져 있었으니 배가 고픈 것만 알던 내가 어머니의 그 눈물의 眞價(진가)를 다 알기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엄격한 家長(가장)이었으나 식량조절과 관련하여서는 어머니에게 꼼짝을 못하셨다. 대신 아버지는 밖에 나가 혹시 먹을 것이 생기면 나에게 몰래 쥐어주곤 하는 것으로 공백을 메워주시었다. 시름없이 담배를 태우시던 아버지가 동생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에게 느닷없이 말씀하신다.
『여보! 살아가기가 힘들지?』
『…』
어머니는 모든 게 다 귀찮은지 아무 대꾸가 없었다. 평시에 원래 말이 없던 아버지는 그날 밤에는 무슨 생각이 나셨는지 절망 속에 잠겨 있는 어머니에게 내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시었다.
『올 봄에는 힘들고 시간이 없어도 火田(화전)을 좀 해야겠소. 봄이 오면 낫겠지. 또 우리 ○○이 때는 잘살게 될 거요. 우리 아무쪼록 수령님만을 믿고 살아갑시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이제 찾아올 봄에 대한 확신이 차 넘쳤고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신뢰의 믿음으로 적이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글쎄요』
애매한 어머니의 대답소리가 한馨?함께 튀어나왔다.
「1945년도 공산당원」인 아버지는 수령님과 당에 대한 철석같은 신념을 생명으로 간주한 성실하고 근면한 일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교양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바쳤으나 왜정 때도 살아보셨고 전쟁의 간고한 시련도 겪어보신 어머니는 방송에서처럼 되풀이되는 앞날의 미련보다 집식구 먹여살릴 일이 더 바빴고 아이들의 한숨소리에 수명이 감소되는 당신의 신상이 더 고달팠기에 아버지의 선동에 끝내 동조하지 않았다.
그날의 반신반의하던 어머니의 태도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수년 세월이 흐르면서 끝끝내 오늘의 현실 앞에 증명되고야 말았다.
수령님만을 믿고 따르면 ○○이 代(대)는 옛말하며 살 거라고 장담했던 아버지의 예언은 거꾸로 서서 ○○이 代에 와서 우리 가문이 결딴나고 말았으니 저승에 가신 아버지께 해명할 수도 없고 녹아난 것은 결국 나뿐이었다.
원족 날의 추억
내가 열세 살 나던 해 어느 봄날 우리 학교에서 遠足(원족:소풍)을 가게 되었다. 황해도 연탄군의 처녀봉 막바지에 있는 「심원사」라는 절간으로 들놀이를 갔다.
학급 아이들은 좋다고 웃고 떠들었지만 나는 사이다병에다 수수죽을 점심으로 싸가지고 다니는 주제여서 원족을 간다고 선포하시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사형 선고처럼 어마어마하게 들려왔다.
어머니 주머니가 비어 있는데 손내밀면 무엇이 나온다더냐 하는 심보로 나는 내일 원족 간다는 말을 아예 내비치지 않았다. 가난이 때이르게 힘들게 한 것이다.
나는 그 이튿날 어머니가 종전대로 싸주는 죽병을 책보에 싸들고 개운치 못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15리 길이었는데 나는 신발이 없어 어머니의 코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니었다. 학교 근방의 풀숲에다 코신을 감추어 놓고 맨발로 학교에 들어가 아닌 보살하였는데(편집자 注:시치미를 뚝 떼다) 그날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30여리나 되는 산골길은 도저히 맨발로 걸을 수 없는 것이고 의무적인 조직생활, 집단생활이 생명으로 간주되는 세월이어서 원족을 안갈 수도 없었다.
나는 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학급 애들을 따라 遠足이랍시고 떠나기는 하였지만 책보에 들어가 있는 사이다병 때문에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부모들의 성의로 마련된 음식을 다 함께 펴놓고 선생님께도 올리고 동무들과도 나누어 먹는 원족놀이 풍습을 빤히 아는 나로서는 이제 점심시간에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생각하니 끔찍스럽기만 하였다.
나는 변소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절간 뒤의 벼랑턱으로 슬금슬금 피해갔다. 심원사는 경치가 참 좋은 곳이었다. 울창 수려한 기암절벽의 우아한 경치에 비해 나의 점심은 자연 앞에서도 부끄러운 지경이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내가 먹지 너보고 먹으라서 걱정이냐?』 중얼거리며 싸늘한 수수죽물을 입으로 쏟아 넣었다. 그래도 굶기보다는 나았으니 그날의 아픔은 깨어버린 병 조각과 더불어 나의 가슴속 한구석에 오늘도 깊숙이 박혀 있다.
어머니 품 떠나 軍에 입대
그날 저녁. 어머니는 동네 나갔다가 마을 아낙네들이 『그 집에서 애들에게 뭘해 보냈소?』 하는 인사 소리를 듣고서야 이 아들이 원족 간다는 걸 숨겼다는 사실을 알았단다.
그날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 자식두, 간다는 말이라도 했으면 쑥떡이라도 뭉그려 주는 건데, 쯧쯧』
눈물이 글썽하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나의 머리만 자꾸 쓰다듬어 주시었다.
내가 인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십 리나 떨어진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해다가 광주리를 엮어 부업을 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아침 일찍이 집을 나서시며 형님에게 이르셨다. 오늘은 점심 전에 집에 올 것 같지 않으니 찬장 안에 있는 점심을 나누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허리춤을 끈으로 동이고 낫을 거머쥐신 가냘픈 어머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지 얼마 안되어 형님은 찬장 안에서 냄비를 꺼내들었다.
그릇 안에는 옥수수 꼬장떡이라고 명명하는 가루음식이 여섯 개가 있었는데 세 개는 형님의 몫이고 두 개는 나의 몫이었으며 한 개가 어머니 몫인 모양이었다. 형은 나보다 좀 크다고 언제나 한 개를 더 주었고 나는 어머니보다는 한 개가 더 많았는데 그게 우리 집안의 음식문화였다. 형은 제몫을 골라쥐고 나에게 물었다. 『너?』 나는 형의 의도를 몰라서 『어떻게 할라기니?』하고 물으니 『난 아침에 미리 먹고 갈 거야』 한다. 그럼 나도, 하고 내 몫을 집어들었다. 어머니는 옥수수 가루를 살살 끓는 물에 반죽하여 사카린과 소금을 넣고 납작납작하게 빚어서 가마 둘레에다 붙여서 익히는 이 음식을 아주 맛있게 하시었다.
우리 두 형제는 꼬장떡을 다 먹어버리고 뎅그렇게 비어 있는 양재기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몫의 꼬장떡 한 개가 외롭게 남아 있다. 그때 그것마저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날까지 얼굴 뜨겁게 추억된다.
잘 사는 간부네 집 같으면 이제 잠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에 우리 두 형제는 점심까지 먹어 버렸으니 어두울 때까지 무슨 맥으로 공부하고 일과에 복종하나 하는 생각으로 눈앞이 다 캄캄하였다.
그날 형은 나에게 아침에 점심 먹었다고 어머니에게 일러바치면 큰일 난다고 하면서 나에게 주먹을 불끈쥐고 두 눈을 부릅떴다. 저도 아마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먹을 때의 용기가 근심으로 바뀌어지던 그 시절이 자못 새삼스럽기도 하다. 그후부터 어머니는 변변치 못한 음식이나마 제 시간에 먹게 하려는 의도에서 동네 사람들이 웃는데도 불구하고 찬장에 열쇠를 채워버리는 大(대)용단을 내리기도 하시었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웃기는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내 나이 군대에 갈 때가 다가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군대에 나가서 조선 노동당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추세로 되고 있었고, 그런 것이 또한 누구나 없이 다 받아 안게 되는 영예가 아니었으므로 나도 조국 보위와 입당을 원하여 어머니 품을 처음으로 떠나게 되었다.
신체검사에서 합격하고 돌아온 그날 어머니가 왜 그렇게도 서럽게 울던지 나는 무슨 말로 어머니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품을 떠나 초소로 떠나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올지 모르는 조건에서 언제 한번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고, 좋은 것 한번 못 먹인 것이 가슴이 아프다고 되뇌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는 떠나는 버스를 붙잡고도 몇 번이나 되뇌이며 우시었다. 그때 어머니가 왜 그리 슬피 울었는지 후에 나도 아버지가 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언제 한번 배불리 먹여보지 못했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억울한 염원을 가슴에 새기며 조선 인민군에 입대하여 병사생활을 시작하던 그때도 굶주림은 여전히 잊지 않고 우리들을 위협하였다.
「3774 카로리」
우리 부대 식당 정면에는 「영양카로리 분석표」라는, 갖가지 색깔의 조화를 섞어 그려 붙인 카드가 붙어 있었다. 둥그런 원 안에 빨간 색깔로 「3774 카로리」란 글자가 또렷이 안겨오는 분석표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상식이었다. 18세가 되도록 의무교육을 받아왔어도 그 어디서도 배워주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던 카로리 상식이었다. 그 속에는 쌀 몇 그램에 몇 카로리, 돼지고기, 달걀, 쇠고기, 과일, 남새, 기름, 사탕가루 등 사람에게 수요된다는 산수적 수치들이 적혀 있었고 군인에게 하루 공급되는 수치들을 정확히 그려 넣고 있었다.
그런데 분석표와는 달리 끼니 때가 되면 옥수수밥 2백g에 소금물로 간을 맞춘 곤포(다시마)국, 염장무 몇 조각이 일당 백이 돼야 한다는 병사의 식사량 전부였다. 수수죽도 변변히 못 먹고 자란 나에게는 매끼 쌀밥을 먹게 되는 것이 다행스럽고 대단한 것이었지만 반면에 훈련강도가 너무 세차고 노동자 집단생활, 규율생활에 들볶이다 보니 어머니가 떠주는 죽 한 그릇 얻어먹고 가만히 있기보다 못한 것 같았다.
훈련이 좀 완화될 때는 죽을 먹고 있는 동생들이 생각나 밥 먹는 것이 목이 메기도 하였다. 부대식당에 붙어 있는 카로리 분석표는 완전히 엉터리였다. 나는 군대복무를 햇수로 11년, 만 10년을 했어도 어느 하루 어느 한 끼를 써붙인 분석표대로 식사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분석표는 버젓이 붙여놓고 주는 것은 언제나 소금국이었다.
『먹는 데는 개처럼 날쌔야…』
어쩌다 돼지 한 마리 잡으면 소문뿐이고 실지 병사들에게 차려지는 것은 두세 점의 고기와 국물뿐이었다. 돼지를 잡은 날이면 국물도 마음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고기 삶은 물이라고 너도 나도 그릇 들고 더 주기를 바라니 나처럼 체면 많은 사람들은 맨 국물도 얻어 먹기 힘들었다.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구대원들은 국그릇을 받아놓고 『축산기사 장화 신고 건너갔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것은 고기는 없고 비린내 나는 정도의 국물밖에 차려지지 않는 부대 실정에 대한 비웃음에서 나온 말이다.
부대 안에서는 언제나 먹는 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부정부패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남보다 더 먹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때 우리 부대 안에서는 『먹는 데는 개처럼 날쌔야 한다』는 은어가 생겨나 병사들은 먹는다는 소리만 나면 정말 개처럼 날쌔려고 이모저모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었다. 한번은 우리 병사들이 「리론식사」를 하면서 낮잠 자는 분대장 주변에 빙 둘러앉아 모표를 닦고 있었는데 잠자던 분대장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만 『너희들 뭘 혼자 먹니?』하면서 시퍼런 광약(구두약) 덩어리를 입에다 넣고 와작와작 씹어대다가 아이쿠 하면서 막 뱉어버리는 것이었다.
광약은 금속 연마 후 빛을 내게 하는 화학물질인데 낮잠 자다 개꿈을 꾸었는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입에다 넣고는 씹어대는 것이었다. 아마 굶주림으로 시달리다 먹는 꿈을 꾸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분대장 앞이기 때문에 마음놓고 놀려대진 못하고 서로서로 의미있는 눈짓을 해가며 소리없이 웃었다.
부대에서는 새벽이면 구대원들과 하사관들이 저마다 식당에 몰려가서 식당 근무병을 구슬려 이밥으로 제 배를 채웠다. 새벽밥이 되었겠다 하는 시간이면 각 중대들에서 권한 있는 자들이 떼를 지어 식당에 찾아와서 밥을 퍼먹고 달아났다. 식당 근무성원들은 또 그들대로 저들의 몫을 따로 퍼서 감추어 버린다. 그러고 나서 軍官(군관)들의 밥을 골라 떠놓고 삽으로 밥을 버무리면 쌀알은 찾아보기 힘들고 빳빳한 황금밥이 되고 만다. 그런 밥마저도 병사들에게 차려지는 밥은 탁아소 아이들 밥량이다. 아침밥을 새벽에 퍼먹은 하사관들이 식사시간이면 시치미를 떼고 줄을 서서 식당으로 들어오니 戰士(전사)들의 밥량이 적어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전사들은 전사들대로 배식해 놓은 책상 옆을 지나가다가 슬그머니 밥그릇을 모자 안에다 담아 가지고 다른 데 가서 먹어 버린다.
사라진 산 오리 소동
1970년대 이르러 전국의 요새화 방침이라는 구호를 내놓고 땅굴을 파는 운동이 전체 군부대와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거행되었는데 우리 부대도 방어공사라는 명목으로 갱도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어 준다고 金正日(김정일)이 우리 부대 병사 한 사람당 오리 한 마리를 기준으로 선물이라고 보내온 적이 있었다. 특무장은 우리들에게 산 오리를 한 마리씩 나누어 주면서 털을 뽑아 바치라고 명령하였다. 제 먹을 것 제가 손질한다는 수작이었다. 살아 있는 오리의 털을 뽑자니 소란스러웠다. 그런대로 오리를 손질하여 바치게 되었는데 1백49마리의 오리를 나누어 주었는데 1백48마리밖에 안되었다. 다시 헤아려 보아도 틀림없는 1백48마리였다.
화가 치민 특무장은 병사 호상간 2m 너비로 앞 뒤 옆으로 벌려 세우고 몸수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박박」 하는 오리의 비명소리가 다급히 울려왔다. 조○○이라는 병사가 오리를 괴춤에 감추었었는데 털을 뽑히며 고생을 한 오리가 숨막히는 괴춤에서 질식되기 전 최후의 힘을 모아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현실 앞에서 병사들은 아연해졌다. 나도 ○○○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은 부대를 떠나는 10여년간을 제 이름을 잃고 강연회 때나 학습회 때나 저녁 점검시간에도 「조박박」으로 불렸다. 조○○도 맨 처음에는 겁이 나서 먹지도 못하면서 별명만 붙었다고 투덜대더니 너무도 오랜 세월 그렇게 들으니 그걸 제 이름으로 간주하고 더 내색을 하지 않았다. 1백50명분으로 출고되는 기름이 4백g 정도로, 시래기국을 소금물에 끓여 먹고사는 병사들에게 이런 웃음거리가 생겨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육류는 1년에 다섯 번 정도인데 1월1일, 2월16일, 4월15일, 4월25일, 9월9일이다. 두부는 軍 복무기간 중 두 번 정도. 앞서 지적한 것들은 내가 군복무를 할 때 옛말 같은 이야기이고 지금은 그것마저 없고 암시장에서 軍品(군품)을 팔아 영양상태를 유지하는 형편이다. 지금 군인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래도 내가 군사복무를 하던 때가 꽃이라고 느껴진다.
고양이 잡아먹고 영양보충
1998년 중국 양수진 남대천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일로서 내가 들은 사연을 이야기하련다. 1998년 2월 남대촌 마을의 순박한 농민의 집에 시커먼 총부리를 들이대며 우리 국경 경비대 대원 2명이 새벽 3시경에 들이닥쳤다. 주인은 총부리 앞에 기겁을 하였는데 휘두르는 총대에 비해 그들의 요구조건은 너무나도 소박하였다. 밥을 한번 실컷 먹게 해주고 중국 담배가 있으면 몇 갑 달라는 것이었다.
이 단적인 사실만 유의해도 군인들의 건강상태, 식생활 상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 군인들은 영양실조를 면해보려고 民家(민가)에 뛰어들어 노략질을 하고 軍品을 훔쳐다가 암시장에 팔고, 밤길을 지키고 있다가 軍官들을 붙잡아 옷을 벗기어 암시장으로 날라가고 음식을 사먹는다. 나는 군복무기간에 충수염(맹장) 수술을 받고, 영양보충은 ○○이라는 동무가 부대 식량창고를 지키던 고양이를 훔쳐다 끓여주는 것을 먹고 다소 위로받은 적도 있었다.
우리 부대에 남보다 배고픈 고생을 많이 하는 김○○이라는 동무가 있었다. 남달리 신체가 커서인지 그는 언제나 먹는 문제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부대식당에서 불을 때는 직무를 가져야만 된다고 판단하고 누구든 꺼려하는 그 직무를 自願(자원)해 나섰다. 무연탄을 이겨서 하루 세 끼 불을 때고 거기에서 자야 하는 개구쟁이 생활이었지만 ○○이는 배곯기보다 낫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군복무 기간을 火口間(화구간)에서 보냈다.
소원대로 배는 곯지 않았어도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는 제대 배낭 하나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도 당원이 되어 부모 형제들 앞에 떳떳이 돌아가고픈 소원이 있었으련만 10여년간을 아궁이 앞에 앉아 있은 그에게 당원의 영예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열차에 오르던, 눈물이 글썽한 ○○○를 바래다주던 ○○역의 전경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굶주림은 한 청년의 앞날을 여지없이 꺾어버린 것이다.
입으로 보고 눈으로 말하라!
1974년 초겨울 일찍이도 추위가 닥쳐왔던 해였다. 방어공사에 내몰리며 苦役(고역)을 치르던 어느 날 군부대장이 현장에 내려와 병사들을 모아놓고 공사가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한다고 추궁한 적이 있었다. 모모한 간부집 출신인 최○○이란 병사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배고프지만 않게 해주면 공사가 제대로 추진될 것」이라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우리들의 심정을 반영한 현실적 제의였다. 그런데 군부대장의 입에서 『나쁜 놈의 자식!』이란 말이 튀어나와 우리를 아연 실색케 하였다.
당의 명령에는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그 아무리 조건과 환경이 어려워도 흥정할 권리가 없다는 독재체제의 횡포에 순종만이 살 길이었건만 아쉽게도 ○○○은 그 이튿날로 어디론가 실려갔다. 먹는 문제만 풀어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한 최○○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의 운명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나는 그때 한 가지 진리를 터득하였다. 『입으로 말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눈으로 말해야 현명하다. 입으로 보고 눈으로 말하라! 철없던 병사시절에 생활 속에서 터득한 이 진리를 나름대로 고수한 덕에 나는 큰 봉변을 당하지 않고 오늘까지 존재할 수 있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었어도 굶어죽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앓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식량은 곧 정치」라고 규정된 사회다 보니 굶어죽었다는 말을 삼가야지 짧은 혀 때문에 긴 목이 달아나는 것이다.
군사복무 과정도 순탄치 않은 배고픔을 이겨낸 덕분으로 나는 언제 한번 배불리 못 먹였다고 눈물 흘리며 바래다주던 어머니 품으로 ○○○보다는 좀 낫게 떳떳이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던 날 어머니는 또 슬피 울었다. 집 나가서 얼마나 배를 곯았느냐며….
아내의 이상한 밥그릇
그동안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나 하나만의 입만 건사하면 그만이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지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리게 되니 나의 입에 들어오는 것이 자연히 줄어들었다.
내가 갓 결혼하고 신혼살림을 할 때의 일이다. 한번은 아내가 구석에 돌아앉아 열심히 무엇을 하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하고 넘겨다 보니 아내는 배급받은 식량을 술잔으로 몫을 나누고 있었다. 총 15일분으로 몫을 나누어 놓고 그 한 몫 한 몫들을 다시 세 몫으로 나누는 작업이었는데 마치 아이들 소꿉놀이를 방불케 하였다.
국가에서 주는 15일분 식량을 6일 정도 먹으라면 넉넉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식량을 45몫으로 나누어 놓으니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만 하였다.
나는 아내가 나누어놓은 식량의 수량을 보면서 생각하였다. 저것을 둘이서 나누어 먹자면 아내가 무엇을 먹으랴, 나는 도시락도 싸가지고 가니 집에 있는 아내는 굶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입맛이 없다든가 배가 아프다든가 하는 구실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떠주는 밥 다 먹으면 아내는 굶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식사시간마다 구실이 많아지자 어느날 부터 아내의 밥그릇이 높아졌다. 자기도 내일은 어떻게 되든 한 그릇씩 먹을 테니 마음놓고 식사를 다 하라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밥량이 높아진 데 대하여 반신반의하면서도 적이 마음이 놓여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앞에서 아내가 밥 그릇을 다 비우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앞에서 한 그릇 되게 담아놓고는 그것을 가지고 조금씩 며칠 먹는가보다 하고 내 좋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흰 밥 쪽으로 골라 떠주는 밥을 아내를 먹이고 싶어 아내의 잡곡밥을 내 앞에 가져오고 나의 밥그릇을 아내 앞에 놓아주며 오늘 아침은 바꾸어 먹자고 했더니 당황한 아내가 아우성을 친다. 나는 그러는 아내를 개의치 않고 아내의 밥그릇에 숟갈을 박았다. 아뿔싸 밥그릇에 숟갈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의 광경을 내 없는 글 재간으로 어떻게 표현하랴! 위의 밥을 다 걷어내고 보니 그 안에는 빵을 할 때 쓰는 가재천 보자기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내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울려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죽을 쑤든 밥을 하든 제몫을 나누지 않고 한 그릇에 퍼놓고 서로서로 위하며 식사를 하였다. 나는 아내를 위하여 먼저 숟갈을 놓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숟갈을 놓아 우리 집 식사시간은 언제나 多事(다사)하였다.
염소 생활
아이들이 늘어나자 아내는 산과 들로 쉴새없이 돌아다니며 산나물과 들나물을 채취하여 그것으로 죽을 쑤었다. 아이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풀죽이었다. 음식도 풀이고 찬도 풀이다.맛내기도 없고 기름도 없는 순수 소금으로 가공한 음식이지만 아이들은 탓하지 않았다.
냉이와 미나리, 길장구라는 풀을 섞어 죽을 쑤면 식량만 조금 들어가면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풀죽에 진저리를 내다가도 끼니 때면 군말없이 다 먹어 주었다.요즈음 아이들은 우리가 자랄 때보다 분명해져서 유머적 행동과 발언도 곧잘 하였다.
식사 시간이 되면 ○○이는 배식구에 대고 소리친다.
『야- 염소밥 들여오너라!』
그러면 ○○이와 ○○이는 『음매 음매』 염소의 울음소리로 화답을 한다. 어머니가 들어오면 「염소 엄마」가 왔단다. 너무나도 풀로 씨름을 하니 아이들이 염소에다 모든 것을 비유했다.
우리 부부는 애들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웃는 때가 많았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대로 사는 재미가 있었는데 오늘날은 쌀밥을 앞에 놓고도 기쁜 마음도 맛의 진가도 느낄 수 없으니 오히려 염소 생활을 하던 그때가 못견디게 그리워진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다 뜯어내고 얼마되지 않는 식량을 그럭저럭 줄 때는 그런대로 별문제였다.
1991년 7월이었다. 식량 여유가 한 알도 없는 노동자 생활에 한달 반이 지나도록 배급 준다는 소리가 감감 무소식이다. 억수로 퍼붓는 장마비로 어디 나가볼 수도 없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연3일째를 꼬박 굶고 있었다.
울고불고 하는 아이들을 말로 달래기에는 너무하다 싶어 궁리에 궁리를 짜내던 나는 아내와 토론하여 텃밭에 있는 옥수수를 따다 삶기로 하였다. 8월 보름쯤에 가야 첫 강냉이를 먹는 평안도 지방에서 7월의 옥수수라야 점이 형성되는 정도의, 말이 옥수수지 껍질에 불과했다. 어쨌든 아이들을 위하여 가마 안에 앉히고 불을 지폈다. 먹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이 비쳐오자 울음바다였던 집안에 단조로운 공기가 떠돌았다. 아이들은 가마목에 둘러앉아 어디서 힘이 났는지 재잘거리며 옥수수가 익기를 이제나 저제나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는 아이들을 보기가 안쓰러워서인지 아내는 문밖에 나가 서서 폭우가 쏟아지는 대지를 멍청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아내가 광란하는 대지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내 생각으로는 나한테 시집와서 언제 한번 마음 편하게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지난날을, 아니 희망이 없는 가련한 자기의 처지를 한탄했으리라. 아이들의 간절한 기대와 염원과 희망이 깃들어 있는 가마 안에서 드디어 김이 나기 시작하였다. 『야! 야! 야!』하는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내 주먹만한 아이들의 위도 채워주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올라 나는 공연히 아내에게 소리쳤다.
나의 꽥 소리에 처마 밑에서 멍하니 서있던 아내가 놀라서 들어오며 푸르딩딩한 나에게 『갑자기 신경질은 웬 신경질이오』 한다. 나는 아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그 잘난 것이 뭐 익고 설고 할 것이 있소? 당장 꺼내서 하나씩 나누어 주오』
사실이 그랬다. 소여물 같은 것이 익으면 무엇이 익고 설면 무엇이 선단 말인가! 이러는 나를 아내는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한숨 쉬며 부엌으로 내려섰다. 아내는 젓가락으로 옥수수 한 이삭씩 밑을 꿰어서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에 쥐어 주면서 잊지 않고 중얼거린다.
『야! 이게 다 여물면 실컷 먹을 수 있는건데. 쯧쯧』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은 어머니의 속마음은 아랑곳없이 호호 불면서 소처럼 그 야리야리한 이삭을 야금야금 씹어 삼킨다. 어린 것들의 그런 모습 앞에 아내의 눈가엔 피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그해 한 50평 정도 되던 우리 집 텃밭은 배급을 끝내 주지 않아 이런 식으로 절단이 나고 말았다. 소처럼 이삭째로 씹어서 들크므레한 즙을 짜먹고 속대는 꼭꼭 씹어서 소금 한 알을 입에 넣으면 그런대로 안 먹은 것보다는 나았다.
우리는 옥수수밭을 거둬내고 무를 심어 가을에는 생무로 끼니를 때웠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한 끼에 한 개씩 배정했다. 막내아들인 ○○이는 자기의 특수성을 운운하며 어머니에게 한 개를 얻어먹고는 나를 구슬려 또 한 개를 얻어먹는 수를 써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어느 손가락이 안 아팠으랴. 어린 것 하나를 생각해 주자면 말없이 누워 있는 큰 것들이 불쌍하여 골고루 하나씩 더 먹게 하였다.
多心(다심)한 아내는 아이들이 벗겨버린 무껍질을 잘게 썰어 말려 두었다가 쌀 뜨물이나 국수 씻은 물을 정제하여 그 앙금으로 다시 죽을 쑤어 끼니를 보장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면 자리에 누워서 童心(동심)의 세계를 펼쳐갔다. 우리 사회에서 일명 「리론식사」라고 하는, 말로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았던 자기의 짧은 일생들을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하며 아버지가 장거리에서 사주었던 송편에 대하여 金日成의 생일날에 맛보았던 「선물」 사탕과자에 대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두부장과 콩나물에 대하여…. 굶주리고 헐벗었던 모든 것은 다 버리고 잘 먹고 행복했던 짧은 인생을 간추려 맥이 빠져 잠드는 순간까지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숨막히는 생활의 세파 속에서 누이 동생이 굶어죽었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어머니마저 나의 곁을 떠나갔다.
福(복)은 쌍으로 안오고 禍(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누이동생의 죽음이 어머니를 거쳐 우리 집안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을 대용식품으로 이어온 이 나라의 사정은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아들을 걷어갔다. 초인간적 힘으로 버텨오던 아내가 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다 그 자리서 숨져버렸다.
아내와 아이를 붙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굶기는 피차일반이던 마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묻어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묻어주는 일도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야 나서는 세월이 그때였다.
나는 어머니와 작별할 때도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고여 드릴 베개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베갯속을 꺼내 절구질을 힘겹게 하여 도토리가루 2백g, 옥수수가루 한 줌을 넣어 죽을 쑤어 잡숫다 보니 베개 하나도 남기질 못했었다. 정말 우리 집안에 지옥문이 열려도 단단히 열렸던 1994년이었다.
형님네 집에서는 군대에 갔던 조카가 영양실조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죽는다 산다 야단이었고, 「이 세상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했다는 형은 군 보위부에서 덮쳐간 후 소식이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저녁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구냐? 아니-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쥐약을 풀어 집안 식구를 먹이고 자기는 목을 매 죽은 ○○이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도 그날까지 살아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1995년 11월15일이었다.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딸애의 屍身에서 나온 비닐봉지
그날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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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용님의 댓글
노기용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제 집에 돌아와 이글을 읽으니 너무 가슴 아프고 우리는 너무 행복한 세상에 살았으면서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군요..
그리고 보니 대동아전쟁 시절에 우리도 쌀 한움큼에 씨레기와 된장을넣고 멀겋게 죽을 쑤어
열식구가 먹었을때가 있었답니다.그때 나는 죽먹기싫다고 소리를 빽질러 우리 어머니를 놀래킬때가
있었답니다. 그때는 전쟁때라 돈이 있어도 쌀을 못살때였거든요.전쟁 말기에는 썩은 콩깨묵을 배급으로
주어 우리 어머니 아버지만 그것을 해 잡수셨답니다..어린자식들은 다 시골로 피난가고요.
이글을 읽으니 끄때 그시절이 생각나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생각나네요..우리나라 농사 지은것은 다
일본으로 공출되고 우리 조선백성들만 고생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