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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 이성을 넘어 영성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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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강인숙 교수 부부  가족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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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강인숙 교수 부부 뜻밖의 가족 스토리 첫 공개
이어령 교수가 암과 망막 손상으로 시련의 시간을 보낸 딸이 건강을 회복하자 딸과 함께 믿음의 동반자가 되기로 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이 시대 최고의 석학 이어령 교수 부부에게 가족의 의미를 물었다.



이어령교수 따님【장민아집사 간증】: 동영상
http://www.cgntv.net/event/program.asp?pid=2303


                                                                  위의 동영상을 꼭 보십시오.


“암과 싸워 이겨낸 딸과 아내, 사랑으로 위기 극복한 老부부의 지혜”


서울 평창동 고갯길을 숨이 가쁘도록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영인문학관. 녹록치 않은 거리임에도 평일 한낮에 나이 지긋한 문학계 인사들이 문학관을 가득 메웠다. 이광수를 비롯해 김훈, 박두진, 박완서 등 문인들의 필기구와 집필 모습을 담은 사진 등 귀한 자료들을 전시한 ‘지필묵의 문화사’전을 관람하기 위해 기꺼이 발품을 판 이들이다.
영인문학관은 우리 시대 최고의 석학 이어령(73) 교수와 그의 부인 강인숙(74) 교수 부부가 자신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만든 문학관이다. 평생을 문학인으로 살아온 부부가 그동안 공들여 모아온 도서와 육필 원고, 문인 초상화 등 진귀한 자료와 작품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난 2001년 사재를 털어 건립했다.
“우리 집에 있는 자료에는 참 귀한 게 많아요. 국가에 기증해도 되지만 아무도 나만큼 이 자료들을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았어요. 내가 살아 있을 때 일을 벌여야 하겠기에 문학관을 건립해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게 됐어요. 나중에 어차피 이어령 선생의 기념관도 필요할 것 같구요.”
2001년 문학관 개관 당시 강인숙 관장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병마와 싸우는 중이었다. 인후암 진단을 받고 두 번씩 수술을 받으며 병석에 있으면서도 그녀가 사생결단의 의지로 문학관 건립을 추진한 이유는 지금 안해놓으면 보배와 같은 자료들이 영원히 사장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직업병이에요. 강의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목을 많이 쓰게 되잖아요. 지금 제 목소리가 듣기 좀 편하지 않죠? 인후암이라는 게 종양 부위가 크면 말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요. 다행히 목소리를 잃지 않았으니 감사한 일이죠. 이전에는 뇌에 혹이 생겨 큰 수술을 받는 바람에 사경을 해맨 적이 있어요. 나중에 내가 없을 때를 대비해 그나마 힘이 있을 때 일을 벌인 거죠.”
강인숙 관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자료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공익을 위하는 것이 아닌 사사로운 개인사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고집스러운 책임감도 큰 편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소신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령 선생하고 저는 서울대 국문과 동기 동창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흔다섯이 돼서야 전임교수가 됐습니다. 막내아들이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만하면 자식들 다 키워놨다고 생각해 학교(건국대)에 들어간 거죠. 그 전에는 애들 키우느라 공부에 전념하기가 어려웠어요. 또 이어령 선생이 한창 글을 많이 쓰고 활발히 활동할 때라 한쪽이라도 흔들리면 안 됐었어요. 아내와 어머니로서 제 몫은 해야죠. 그래도 20년을 전임교수로 있었으니 여한은 없어요(웃음).”
집안의 우환 이겨내고 기독교에 귀의한 까닭
‘복을 아끼라’는 뜻의 석복(惜福)은 이어령 교수 집안의 가훈이다. 검소하게 생활하고 귀한 것은 남에게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에 대해 강 교수는 “황금은 돌이 아니라 그냥 황금이다. 황금을 신으로 아는 것도, 황금을 돌로 보는 것도 모두 위선이다”라고 말한다. 본래의 제 값만 인정하고 그 이상 자랑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우리 딸이 전국에서 1~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어요. 손주들도 그렇고요. 그래도 저는 칭찬한 적이 없어요. 저 역시 형제 중에서 가장 성적이 뛰어났는데도 부모님께서 한 번도 칭찬하지 않으셨거든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거였죠. 남이 부러워할 걸 가진 사람은 더 겸손해야 해요. 1등은 한 명이잖아요. 나머지 애들은 1등을 부러워하거나 상처를 받게 되죠. 칭찬을 받지 않아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 아닌가요.”
이어령 교수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딸은 대학을 3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쿨을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사위 역시 변호사이다. 큰아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막내아들은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한 후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고 있다. 평생을 반듯하게 학문에만 힘쓴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자녀들 모두 사회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 하지만 모든 게 갖춰진 것 같은 이 교수 가정에도 적지 않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이어령 교수의 큰딸 민아(47)씨가 지난 15년간 닥친 시련을 눈물로 고백한 아픈 사연이 소개된 바 있다.
그녀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92년 갑상선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다. 수술을 했지만 1996년과 1999년에 두 차례나 암이 재발했다. 설상가상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아들이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판명이 나면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몸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아들을 돌봐야 할 일이 늘어나자 그녀는 변호사 사무실까지 문을 닫고 아이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이주했다.
“일부에서 제 손자가 마치 심한 자폐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던데 사실은 ADHD예요. 요즘 미국 아이들 10명 중 1명 정도가 이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주의력이 산만하고 집중을 잘 못 하는 아이들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딸이 주로 청소년 범죄를 다뤘던 변호사이다 보니 LA보다는 하와이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안전하고 치료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작년 7월에 이사를 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아씨의 눈은 점차 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망막이 손상돼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 이어령 교수 부부는 급히 하와이로 건너갔다. 눈이 안 보여 설거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딸을 보고 두 부부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갔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어령 교수는 아이들을 봐줄 테니 한국에 가서 검사를 받자고 딸을 불러왔다.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아씨가 점차 시력을 회복하더니 급기야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다. 혹시 미국 의사가 오진을 한 거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얼마 전 민아씨는 서울의 한 교회를 찾아 믿음을 통해 지난 15년간의 시련을 극복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실로암의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자 이어령 교수도 감동을 받고 개신교에 귀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내가 딸에게 아버지로서 못 해준 것을 그 분이 해주셨다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딸이 가진 믿음을 나도 한 번 가져보고 싶어진 거죠. 그래서 언젠가는 세례를 받을 예정입니다. 우리 딸은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요. 미국에서 가난한 교회를 돕고, 외국 목사들의 동시통역도 해주며 지내죠. 하지만 중요한 문제니까 종교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집안은 아직도 유교적이에요. 엄연히 수직관계가 유지되고 있죠. 흔히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는 것과 부모의 권위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잘못된 거죠"



가족은 보수적이고 낡을수록 좋다
일흔을 훌쩍 넘긴 이어령 교수는 한 시대를 앞선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학자다. 하루에 두 시간을 꼬박 웹 서핑과 채팅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최신 기술과 트렌드를 읽어내는 감각은 젊은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해박한 지식과 사고의 깊이까지 갖추고 있는 그에게 가정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그를 잘 아는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어령 교수에게 다섯 걸음의 시간만 준다면 어떤 주제라도 명확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첫 걸음에 주제를 정하고 다음 걸음에 소재를 선택한다. 그리고 한 걸음씩 서론, 본론, 결론까지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이다. 역시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가족에 대한 특강이 숨 쉴 틈 없이 펼쳐졌다.
“가정은 부-모-자의 삼각 구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이혼으로 인해 결손 가정이 늘어나면서 이 삼각 구도가 깨지고 있는데 여기서 가정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부모와 자식 간 관계가 변하면서 가족제도의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는 거예요. 부모와 자식 관계는 엄연한 수직관계입니다. 그런데 남녀 평등사회니 가정적인 남편이니 하며 가족 관계에 변화가 생기니까 형제 같은 아버지, 언니 같은 어머니가 생겨나고 있어요.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고 다정다감하다고 해서 형이나 누나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어령 교수는 세계적인 사회학자 바우만의 말을 빌려 가족은 인간의 마지막 남은 수직관계임을 강조했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제도가 없어지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가족 관계가 확실해야 전통이 유지되고 가치관과 문화의 계승이 정상적으로 이뤄진다는 주장이다. 실제 이어령 교수 집은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했다.
“우리 집안은 아직도 유교적이에요. 엄연히 수직관계가 유지되고 있죠. 흔히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는 것과 부모의 권위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잘못된 거죠. 권위가 있으면 사랑이 없고, 권위가 없으면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누구보다도 딸을 사랑하고 딸이 불행해지면 내가 그 불행을 대신하고 싶어요. 이런 사랑을 아내와 같이 느끼고 있고요. 이건 분명 형제나 애인과의 사랑과는 다른 것이지요.”
평생을 한 걸음 앞서 새 학문을 탐색해온 이어령 교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가정만은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적이고 낡을수록 좋은 게 가족이라는 것. 인간이 만든 제도 중 가장 오래된 가족제도가 더 이상 해체되고 붕괴되면 인간 자체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현대의 위기는 핵도 아니고 공해도 아닌 가정 내부로부터 온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어령, ‘이성’을 넘어 ‘영성’으로

영원한 문화인, 통섭(統攝)의 지식인으로 불리는 이어령(73·사진) 전 문화부 장관이 개신교에 귀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금까지 그는 종교를 문화의 일부로 인식해 왔으며, 종교를 논하였으나 신앙인이 아니었고, 성경을 읽었으나 열정의 시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방송에서 지명관 한림대 석좌교수와 1년간 성서를 놓고 대담하면서 늘 제3자, 객관적 시각으로 종교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분석하는 데 주력했었다.



그런 이 전 장관이 12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오래 전부터 지성인으로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이제는 영적 측면에서 기독교에 다가가고자 한다"며 "7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그 동안 나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지식을 통해서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며 "이제 그런 부분들을 영적인 차원에서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기독교를 선택하기까지는 딸 민아(47) 씨에게 지난 15년간 닥친 시련이 결정적 작용을 했다.



민아씨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어렵게 공부한 끝에 변호사가 됐고, 한때 로스앤젤레스 지방 검사로 활약하면서 청소년 마약 문제를 다뤘었다. 아버지에게는 자랑스러운 딸, 교민사회에선 성공한 한인이자 전도가 양양한 유망주였던 민아 씨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92년 갑상샘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다. 수술을 했지만 1996년과 1999년 두 차례나 암이 재발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아들이 특수자폐아동으로 판명이 나면서 “지난 10년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울지 않고 잠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고 그는 고백했다.



약물치료를 요구하는 학교와의 싸움, 기도 끝에 변호사 사무실까지 문을 닫고 아이 치료를 위해 무조건 하와이로 건너간 사연, 아이를 받아줄 수 없다는 미국인 학교의 목사 앞에서 “잃어버린 하나의 어린양을 받아 달라”고 통곡했던 일, 하와이에서 자신의 망막이 파열돼 시력을 잃었던 기억,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떼를 썼던 일….



“아버님이 하와이에 오셨는데 제가 눈이 안보여 설거지를 못하자 맘이 몹시 상하셨어요. 그러면서 ‘미국 사람들은 손이 커서 수술을 못한다. 한국으로 가자’고 해서 결국 한국에 왔지요. 한국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았는데 망막이 나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의사가 ‘혹시 미국 사람이 영어를 빨리 해서 못 알아들은 것 아니냐’고 묻더군요.”

민아 씨는 자신과 아들의 길고 길었던 투병기와 완치되기까지의 과정을 3일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온누리교회 새벽기도에서 공개했다. 울먹이며 흐느끼며 30여 분 동안 그가 사연을 털어놓자 교회당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 전 장관이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 것도 그 즈음이다.



이 전 장관은 "딸의 고통 앞에서 아버지가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딸이 오랫동안 믿어온 하나님은 기쁨을 주고 상처를 치유해줬다"면서 "딸이 믿는 대상에 대해 지성이 아닌 경배의 대상으로 다가가고 그런 믿음을 딸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식의 기복적 차원에서 기독교를 믿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 동안 나는 지식인으로서 기독교의 세계를 많이 접해왔다"며 "교회를 나가지 않은 것은 일요일에 교회를 나가야 하고 교리문답을 외워야 하는 등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제도가 싫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때가 되면 평생 지성을 추구해온 지식인이 영성의 세계로 발을 옮긴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하고 싶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세례를 받은 것도,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C3TV 김경수 기자(
bindl@c3tv.com)


이어령 교수 “네가 본 빛을 나에게도…”

딸의 치유 보며 신앙에 다가선 사연 간증 [2007-07-02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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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여대 이어령 명예교수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최근 딸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화여대 이어령 명예교수(73)가 기독교에 귀의한 사연을 밝혔다. 그는 월간잡지 빛과소금 7월호에서 “‘내 딸이 시력을 잃게 되어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정말 믿을 수 없었다”며 “미국 하와이의 한 작은 교회에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고백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그의 기도는 겸허하고 절실했다.

1992년, 이 명예교수의 딸 민아 씨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했지만 1996년과 1999년에 두 차례나 암이 재발했다. 설상가상으로 유치원에 들어간 민아 씨의 작은 아들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로 판명나면서 민아 씨는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몸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아들의 일까지 생기자 그녀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의 눈이 점차 흐릿해졌다. 망막이 손상돼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명예교수 부부는 급히 하와이로 건너갔다. 눈이 안 보여 설거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딸을 보고 두 부부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이 명예교수는 아이들을 봐줄 테니 한국에 가서 검사를 받자고 딸에게 요청했다.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아 씨가 점차 시력을 회복하더니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러한 기적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며 “그 이유로 첫째, 기적은 구제의 표시이지 목적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예수께서는 ‘기적이다’라고 떠들면서 믿으러 오는 사람들을 아주 슬픈 눈으로 쳐다 보셨습니다. 진짜 ‘만나’를 보라고. 영원히 죽지 않는 빵을 보라고 말입니다.”

그 동안 여러 언론매체들의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해 온 이 명예교수는 “내 신앙이 외식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염려됐다”며 “다락방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싶다. 자신의 신앙 변화를 매스컴에 나가 떠드는 것은 외식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명예교수는 오는 7월 24일 온누리교회 주최로 열리는 ‘일본 러브소나타 집회’에서 강연을 맡았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일본의 지성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그가 이번엔 일본문화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역설할 예정이다.

한국=김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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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요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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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겸손하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분 같습니다.

평소에도 그분의 놀라운 지성에 반했었지만

이렇게 겸손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머리 숙여 나오는 이어령 교수님을 보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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