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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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士멘토의 열공특강]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 "꿈은 찾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
중학 시절 공부 대신 백과사전 들춰보길 즐겨
대학 4학년, 유타대 교수 만나 삶의 목표 전환
동물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최재천(53)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학창시절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스스로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고 시험을 아주 혐오한다. 하지만 출발이 늦은 사람도 나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솔제니친의 수필 "모닥불과 개미" 속에 그려진 개미들의
행동에 의문을 갖게 됐다. 서울대 동물학과에 입학한 뒤 4학년 때 24학점을 듣는 발군의 뒷심 끝에
턱걸이 학점을 받고 졸업, 유학길에 올랐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그냥 잘 놀았다"
최 교수는 학창시절 "한 번도" 과학자가 되리라 꿈을 꾸지 않았다. "어쩌다가
"말려서"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로 전학 갔지만 고향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고3 기간을 빼고는 여름과 겨울방학 모두를 깡그리 강릉에서 보냈다. "방학 마다 시골
집에 가서 개울에 첨벙거리고 대관령까지 산을 타곤" 했다. 당시 고민하면서 내린 장래 희망은 시인
이었다. "가끔 시 한편 쓰고 먹고 사는 줄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서울 변두리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잘했지만 6학년 때 교동초등학교로 전학
면서 졸지에 바닥으로 밀려났다. 중학교에 진학한 다음에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 채 그냥
"잘 놀았다"고 한다. 그래서 성적은 바닥까지 내려갔다. 시간만 있으면 공부 대신 빈둥빈둥
동아백과사전을 들춰보길 즐겼다.
"영어참고서라는 게 있다는 걸 중2 말이 돼서야 알았어요. 3학년 한해 열심히 해서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으로 고교(경복고)에 진학했지요. 당시 무시험으로 고교에 진학했지만 다행히 "우반"
에 편성될 정도까지는 했습니다."
그는 "낭만 고양이"처럼 공부 보다는 문예반과 미술반 같은 문예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고교시절 부모님이 사주신 한국단편문학전집과 노벨상문학전집을 읽고 또 읽곤 했다. 그나마 고3이
되면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이른바 "상위급"에 들어갔다.
하지만 "너무 벼락치기를 한 게 탈이 났는지" 보기 좋게 대학에 낙방하고 말았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재수시절에는 삶에 회의를 느껴 염세주의에 푹 빠져 살았다. 쇼펜하우어의 말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2지망 턱걸이로 1973년 서울대 동물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지망으로 들어온 대학생활
역시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의실보다 바깥으로 싸돌아 다녔다. 서울대 사진동아리 "영상"을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고 독서동아리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운명적인 만남
대학 4학년 때 "하루살이"를 연구하러 한국을 찾은 미국 유타대 교수를 만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된다. 수업 다 빼먹고 일주일간 미국 교수의 조수역할을 맡았다. 그가 한 일은 "지도를 펼쳐놓고
그냥 좋은 강물, 개천을 안내하는 것"뿐이었다. 미국 교수는 차를 몰고 가다가 개울만 보이면 차에서
내려 뛰어들었다. 최 교수가 신발과 양말까지 벗는 동안 그는 신발을 신은 채 첨벙첨벙 개울로 뛰어들었다.
할 수 없이 그도 신발을 신고 개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교수가 떠나기 전날 그는 "도대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한국까지 와서 생고생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 교수는 너무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루살이를 채집하러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한국이 102
번째 나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좋은 집에서 살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학교에 가기도 하고, 플로리다 바닷가엔 별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 유타대 교수를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그냥 넋 놓고 있는데 천사가
억지로 제 마음을 흔든 건 아니에요. 길을 찾느라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 분이 나타났기
때문에 알아본 것이지요. 천사는 늘 우리 삶에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다만 찾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지요."
그날 최 교수는 "선생님처럼 되는 게 꿈인데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미국 교수는 미국
대학으로 유학방법을 일일이 적어주며 9개 대학을 꼽아주었다. 그러면서 하버드대를 1순위로 꼽으며
"하버드대 윌슨 교수 밑에 가면 참 좋은데…"하더니 그를 곁눈으로 보면서 "꼭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얼버무렸다. 최 교수는 턱걸이로 서울대를 졸업한 뒤 펜실베이니아주립대로 진학했고 결국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합격, 결국 월슨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그는 공부와 관련된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하버드대 입학으로 꼽았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곳이었는데 정말 운좋게 된 겁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미국 친구들도 "
어떻게 감히 그런 곳에 도전을 하느냐"고 저를 참 겁 없는 놈이라고 했어요. 저는 그렇게 얘기하는
친구에게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네가 해준 말이 있다. 미국에서는 You never know
until you try!(도전해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그래서 도전해 본다"고 말했는데 막상 붙고
나니 그 친구가 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더군요."
■"책 안 읽고 공부 잘하는 이 못봤다"
최 교수는 1990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바로 하버드대 전임강사로 임용된다. 생물학과와 인류학과에서
2년간 "생태학,
사회성 곤충학인간행동학" 등의 강의를 맡았다. 1992년 한 학기 동안 하버드에서 멀지 않은 터프스대
생물학과에서 초빙 조교수로 "동물행동학"을 강의한 뒤 그해 여름 미시건대 생물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미국생활에서 미시건대 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미시건대 생물학과 교수 겸 미시건명예교우회의
"젊은 학자(junior fellow)"로 지냈지요. 매주 수요일 젊은 학자들끼리 모여 발제를 하고
토론을 하는데 허구한 날 늦은 밤까지 헤어지기 아쉬워했습니다. 학문을 하면서 그런 멋진 경험을 해보는
이가 몇이나 있겠어요?"
1994년 귀국해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2006년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학생들과 개미를 비롯해 각종 사회성 곤충과 거미, 까치와 조랑말의 사회구조 및 성(sex)의 생태,
박쥐를 비롯한 동물의 인지능력과 인간 두뇌의 전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최 교수는 학생들에게 중간·기말 시험을 따로 보지 않는다. 대학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한 경험 때문이다.
"제가 가르치는 과목에서는 시험을 보이지 않아요. 한 학기 내내 배운 것을 단 한두 시간에 쏟아내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 학생들로 하여금 과제를 함께 하게 하고, 책을 많이 읽게 하고,
토론을 많이 하게 하며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서 공부 잘하는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어요.
물론 수업에서 읽으라는 것만 읽어서 성적을 잘 따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런 사람은 사회에 나가 처음 몇
년은 성공할지 모르나 길게 보면 지속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아주 적습니다."
그는 "통합적으로 학문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얽히고 설킨 관계망(network) 속에서 복합적인 구조를
갖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통섭적으로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학 시절 공부 대신 백과사전 들춰보길 즐겨
대학 4학년, 유타대 교수 만나 삶의 목표 전환
동물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최재천(53)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학창시절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스스로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고 시험을 아주 혐오한다. 하지만 출발이 늦은 사람도 나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솔제니친의 수필 "모닥불과 개미" 속에 그려진 개미들의
행동에 의문을 갖게 됐다. 서울대 동물학과에 입학한 뒤 4학년 때 24학점을 듣는 발군의 뒷심 끝에
턱걸이 학점을 받고 졸업, 유학길에 올랐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그냥 잘 놀았다"
최 교수는 학창시절 "한 번도" 과학자가 되리라 꿈을 꾸지 않았다. "어쩌다가
"말려서"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로 전학 갔지만 고향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고3 기간을 빼고는 여름과 겨울방학 모두를 깡그리 강릉에서 보냈다. "방학 마다 시골
집에 가서 개울에 첨벙거리고 대관령까지 산을 타곤" 했다. 당시 고민하면서 내린 장래 희망은 시인
이었다. "가끔 시 한편 쓰고 먹고 사는 줄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서울 변두리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잘했지만 6학년 때 교동초등학교로 전학
면서 졸지에 바닥으로 밀려났다. 중학교에 진학한 다음에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 채 그냥
"잘 놀았다"고 한다. 그래서 성적은 바닥까지 내려갔다. 시간만 있으면 공부 대신 빈둥빈둥
동아백과사전을 들춰보길 즐겼다.
"영어참고서라는 게 있다는 걸 중2 말이 돼서야 알았어요. 3학년 한해 열심히 해서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으로 고교(경복고)에 진학했지요. 당시 무시험으로 고교에 진학했지만 다행히 "우반"
에 편성될 정도까지는 했습니다."
그는 "낭만 고양이"처럼 공부 보다는 문예반과 미술반 같은 문예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고교시절 부모님이 사주신 한국단편문학전집과 노벨상문학전집을 읽고 또 읽곤 했다. 그나마 고3이
되면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이른바 "상위급"에 들어갔다.
하지만 "너무 벼락치기를 한 게 탈이 났는지" 보기 좋게 대학에 낙방하고 말았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재수시절에는 삶에 회의를 느껴 염세주의에 푹 빠져 살았다. 쇼펜하우어의 말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2지망 턱걸이로 1973년 서울대 동물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지망으로 들어온 대학생활
역시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의실보다 바깥으로 싸돌아 다녔다. 서울대 사진동아리 "영상"을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고 독서동아리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운명적인 만남
대학 4학년 때 "하루살이"를 연구하러 한국을 찾은 미국 유타대 교수를 만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된다. 수업 다 빼먹고 일주일간 미국 교수의 조수역할을 맡았다. 그가 한 일은 "지도를 펼쳐놓고
그냥 좋은 강물, 개천을 안내하는 것"뿐이었다. 미국 교수는 차를 몰고 가다가 개울만 보이면 차에서
내려 뛰어들었다. 최 교수가 신발과 양말까지 벗는 동안 그는 신발을 신은 채 첨벙첨벙 개울로 뛰어들었다.
할 수 없이 그도 신발을 신고 개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교수가 떠나기 전날 그는 "도대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한국까지 와서 생고생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 교수는 너무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루살이를 채집하러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한국이 102
번째 나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좋은 집에서 살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학교에 가기도 하고, 플로리다 바닷가엔 별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 유타대 교수를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그냥 넋 놓고 있는데 천사가
억지로 제 마음을 흔든 건 아니에요. 길을 찾느라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 분이 나타났기
때문에 알아본 것이지요. 천사는 늘 우리 삶에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다만 찾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지요."
그날 최 교수는 "선생님처럼 되는 게 꿈인데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미국 교수는 미국
대학으로 유학방법을 일일이 적어주며 9개 대학을 꼽아주었다. 그러면서 하버드대를 1순위로 꼽으며
"하버드대 윌슨 교수 밑에 가면 참 좋은데…"하더니 그를 곁눈으로 보면서 "꼭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얼버무렸다. 최 교수는 턱걸이로 서울대를 졸업한 뒤 펜실베이니아주립대로 진학했고 결국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합격, 결국 월슨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그는 공부와 관련된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하버드대 입학으로 꼽았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곳이었는데 정말 운좋게 된 겁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미국 친구들도 "
어떻게 감히 그런 곳에 도전을 하느냐"고 저를 참 겁 없는 놈이라고 했어요. 저는 그렇게 얘기하는
친구에게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네가 해준 말이 있다. 미국에서는 You never know
until you try!(도전해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그래서 도전해 본다"고 말했는데 막상 붙고
나니 그 친구가 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더군요."
■"책 안 읽고 공부 잘하는 이 못봤다"
최 교수는 1990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바로 하버드대 전임강사로 임용된다. 생물학과와 인류학과에서
2년간 "생태학,
사회성 곤충학인간행동학" 등의 강의를 맡았다. 1992년 한 학기 동안 하버드에서 멀지 않은 터프스대
생물학과에서 초빙 조교수로 "동물행동학"을 강의한 뒤 그해 여름 미시건대 생물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미국생활에서 미시건대 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미시건대 생물학과 교수 겸 미시건명예교우회의
"젊은 학자(junior fellow)"로 지냈지요. 매주 수요일 젊은 학자들끼리 모여 발제를 하고
토론을 하는데 허구한 날 늦은 밤까지 헤어지기 아쉬워했습니다. 학문을 하면서 그런 멋진 경험을 해보는
이가 몇이나 있겠어요?"
1994년 귀국해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2006년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학생들과 개미를 비롯해 각종 사회성 곤충과 거미, 까치와 조랑말의 사회구조 및 성(sex)의 생태,
박쥐를 비롯한 동물의 인지능력과 인간 두뇌의 전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최 교수는 학생들에게 중간·기말 시험을 따로 보지 않는다. 대학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한 경험 때문이다.
"제가 가르치는 과목에서는 시험을 보이지 않아요. 한 학기 내내 배운 것을 단 한두 시간에 쏟아내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신 학생들로 하여금 과제를 함께 하게 하고, 책을 많이 읽게 하고,
토론을 많이 하게 하며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서 공부 잘하는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어요.
물론 수업에서 읽으라는 것만 읽어서 성적을 잘 따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런 사람은 사회에 나가 처음 몇
년은 성공할지 모르나 길게 보면 지속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아주 적습니다."
그는 "통합적으로 학문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얽히고 설킨 관계망(network) 속에서 복합적인 구조를
갖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통섭적으로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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