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야까시(ひやかし)와 쪽팔려...“(200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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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몬트레이 한인 침례교회(Monterey Korean Baptist Church)를 개척한지 약 8개월 쯤 되었을 때, 미군에 근무하던 우리 교인이 한 젊은이를 인도해 왔는데, 첫눈에 보기에도 쉽사리 친해지기가 힘들어 보이는 까다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대면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를 인도하신 분이 자기 집에서 점심식사에 나를 초대하고 “인사하세요. 우리 교회 목사님이세요.”라고 소개 하였는데, 그는 곁눈질로 흘금 바라 볼 뿐 아무 말도 없이 무시하듯 얼굴을 돌려 외면하고는 돌아앉는 것이아닌가? 순간, 나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또 황당하기도 하였지만 애써 웃음을 띠며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데도 그는 전혀 대꾸를 하지 않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였기에 그의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었었다.
좌불안석, 매우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 식사를 마치고 서로 인사할 겨를도 없이 헤어져 돌아오는데 마치 뭣을 밟은 것 같은 께름칙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무슨 뜻이 계셔서 우리를 만나게 하셨을 것 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모든 인생들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필연이야......” 그런데도 괘씸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바로 그 주일은 우리가 공원에서 야외예배로 모였는데 뜻밖에도 그 젊은이가 가족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었다. 그를 인도한 교인의 말이, “내일은 공원에 가는 날이니까 함께 가서 놀다가 오자”고 비위를 맞추었더니 서슴지 않고 따라오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려는데 역시 얼굴을 휙 하니 돌려버리는 바람에 마음이 언짢다 못해 화가 났다. 예배와 점심식사를 마치고 모두들 그룹을 지어 게임과 배구를 하는데도 그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자기 부인과 아들 만 데리고 따로 놀고 있었다.
그 주 수요일에는 가을비가 유난히도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성경공부 및 기도회를 위하여 교회당에 가보니 날씨 때문인지 불과 너댓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한동안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이 오는 것이다. 얼굴에는 예의 그 비아냥거리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이미 두 번이나 무시를 당했기에 편치 않은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작 하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여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실 때 여인이 퉁명스런 조로 반응하는 대목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여인은 남자를 여럿 바꾸어 살면서 남자들에 대해서 경험이 많고 또 상처도 많이 받은
지라, 이 유대인 남자가 자기를 은근히 멸시하며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
다. 쉽게 말하자면 “히야까시”를 하는 것으로 봤을 것이란 말입니다....“
히야까시(ひやかし)란 ”남자가 여자에게 흑심을 품고 추근대는 것“을 뜻하는 일본말로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던 터라 무의식중에 튀어 나왔던 것이다.
그 다음 주일에도 그는 싱긋이 웃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또 참석했다. 물론 여전히 인사는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도 되고 또 조금은 신경이 쓰였으므로 부인에게 “어떻게 계속 교회를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주었다.
“당신은 교회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 왜 자꾸 나가는 거예요?“
“야, 성경에 아주 이상한 여자의 이야기(사마리아 여인)가 있어서 신기해서 그런다.
성경에 그런 것도 있데..... 그리고 그 이목사라는 사람 말이야, 목사가 히야까시라는 세상
말을 쓰는 것을 보니 나하고 말이 좀 통할 것도 같다 아이가?, 그래, 이번 일요일에 마지
막으로 한번만 더 나가보자....... ” 하더랍니다.
그 부인은 사실 자신도 신앙이 없는 터라 거의 교회생활을 하지 않았었다고 하며, 그 주일 에는 남편이 도리어 더 재촉하여 교회로 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그날은 마태복음 8장 1절-4절 말씀을 “내가 원하노니.....”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 교회를 나왔지만 늘 성경 내용에 대해서 공격하며, 교회에 대한 비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우리 집에 와서 놀기도 하며 나와 이야기하고 교제를 가지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알게 된 것은 그가 밋션스쿨을 다녔으며 소위 예수쟁이들과 목사들에게서 매우 위선적이며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았으므로 교회와 예수쟁이들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신다...“ 고 반복적으로 간절히 도전했을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기를 두어 달. 결국 그해 12월 남선교회 수양회를 통하여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고, 1983년 1월 첫 주일에 그 부부가 침례로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어정쩡한 만남이었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구원 받기에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인격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하셨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 형제님은 열심히 말씀훈련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갔다. 섬김과 봉사의 삶에 기쁨이 넘치는 듯 은혜로 충만한 삶이 눈에 보였다. 이 사람이 곧 내가 전에 쓴 칼럼에 등장하는 “개똥 줍는 집사”이다.
그런가 하면 수년 전에는 위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어느 교회에 초청되어 설교를 하는 중에 흔히 유행하는 속된 말을 했다가 무안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설교 하는 중에 “쪽팔린다.” 라는 말을 한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에 그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분이 다가와서 정색을 하며 주위를 주는 것이다.
“오늘 말씀으로 처음에는 은혜가 되었는데 그 속된 말을 하는 순간 모두 쏟아져 버렸습니다”
분명 한국어이긴 하지만 옛날에는 없던 새로운 신조어들이 많이 생겨난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쪽 팔려...”, “신경 꺼...”, “... 은 아주 쥑인다...” 등등, 물론 속된 말인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것들은 joke 수준의 흥미를 줄 뿐 아니라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감정표현이 원색적이어서 전달이 쉽기도 한지라 내가 설교할 때에 양념을 치듯 때때로 사용하고는 했다.
같은 속 된 말이라도 어떤 사람은 구원 받는 결과로 또 어떤 사람은 은혜를 쏟아 버리는 결과로 나타난 것을 생각하니, 역시 사람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생 각자는 전 우주 가운데 단 하나 밖에 없는 희귀한 존재요, 하나님께서 뜻을 두시고 만드신 “걸작품”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방법도 여러 가지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속된 말은 삼가야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For we are God's workmanship..)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그를 인도하신 분이 자기 집에서 점심식사에 나를 초대하고 “인사하세요. 우리 교회 목사님이세요.”라고 소개 하였는데, 그는 곁눈질로 흘금 바라 볼 뿐 아무 말도 없이 무시하듯 얼굴을 돌려 외면하고는 돌아앉는 것이아닌가? 순간, 나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또 황당하기도 하였지만 애써 웃음을 띠며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데도 그는 전혀 대꾸를 하지 않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였기에 그의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었었다.
좌불안석, 매우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 식사를 마치고 서로 인사할 겨를도 없이 헤어져 돌아오는데 마치 뭣을 밟은 것 같은 께름칙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무슨 뜻이 계셔서 우리를 만나게 하셨을 것 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모든 인생들의 만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필연이야......” 그런데도 괘씸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바로 그 주일은 우리가 공원에서 야외예배로 모였는데 뜻밖에도 그 젊은이가 가족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었다. 그를 인도한 교인의 말이, “내일은 공원에 가는 날이니까 함께 가서 놀다가 오자”고 비위를 맞추었더니 서슴지 않고 따라오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려는데 역시 얼굴을 휙 하니 돌려버리는 바람에 마음이 언짢다 못해 화가 났다. 예배와 점심식사를 마치고 모두들 그룹을 지어 게임과 배구를 하는데도 그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자기 부인과 아들 만 데리고 따로 놀고 있었다.
그 주 수요일에는 가을비가 유난히도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성경공부 및 기도회를 위하여 교회당에 가보니 날씨 때문인지 불과 너댓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한동안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이 오는 것이다. 얼굴에는 예의 그 비아냥거리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이미 두 번이나 무시를 당했기에 편치 않은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작 하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여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실 때 여인이 퉁명스런 조로 반응하는 대목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여인은 남자를 여럿 바꾸어 살면서 남자들에 대해서 경험이 많고 또 상처도 많이 받은
지라, 이 유대인 남자가 자기를 은근히 멸시하며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
다. 쉽게 말하자면 “히야까시”를 하는 것으로 봤을 것이란 말입니다....“
히야까시(ひやかし)란 ”남자가 여자에게 흑심을 품고 추근대는 것“을 뜻하는 일본말로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던 터라 무의식중에 튀어 나왔던 것이다.
그 다음 주일에도 그는 싱긋이 웃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또 참석했다. 물론 여전히 인사는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도 되고 또 조금은 신경이 쓰였으므로 부인에게 “어떻게 계속 교회를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주었다.
“당신은 교회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 왜 자꾸 나가는 거예요?“
“야, 성경에 아주 이상한 여자의 이야기(사마리아 여인)가 있어서 신기해서 그런다.
성경에 그런 것도 있데..... 그리고 그 이목사라는 사람 말이야, 목사가 히야까시라는 세상
말을 쓰는 것을 보니 나하고 말이 좀 통할 것도 같다 아이가?, 그래, 이번 일요일에 마지
막으로 한번만 더 나가보자....... ” 하더랍니다.
그 부인은 사실 자신도 신앙이 없는 터라 거의 교회생활을 하지 않았었다고 하며, 그 주일 에는 남편이 도리어 더 재촉하여 교회로 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그날은 마태복음 8장 1절-4절 말씀을 “내가 원하노니.....”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 교회를 나왔지만 늘 성경 내용에 대해서 공격하며, 교회에 대한 비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우리 집에 와서 놀기도 하며 나와 이야기하고 교제를 가지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알게 된 것은 그가 밋션스쿨을 다녔으며 소위 예수쟁이들과 목사들에게서 매우 위선적이며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았으므로 교회와 예수쟁이들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신다...“ 고 반복적으로 간절히 도전했을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기를 두어 달. 결국 그해 12월 남선교회 수양회를 통하여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고, 1983년 1월 첫 주일에 그 부부가 침례로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어정쩡한 만남이었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구원 받기에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인격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하셨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 형제님은 열심히 말씀훈련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갔다. 섬김과 봉사의 삶에 기쁨이 넘치는 듯 은혜로 충만한 삶이 눈에 보였다. 이 사람이 곧 내가 전에 쓴 칼럼에 등장하는 “개똥 줍는 집사”이다.
그런가 하면 수년 전에는 위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어느 교회에 초청되어 설교를 하는 중에 흔히 유행하는 속된 말을 했다가 무안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설교 하는 중에 “쪽팔린다.” 라는 말을 한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에 그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분이 다가와서 정색을 하며 주위를 주는 것이다.
“오늘 말씀으로 처음에는 은혜가 되었는데 그 속된 말을 하는 순간 모두 쏟아져 버렸습니다”
분명 한국어이긴 하지만 옛날에는 없던 새로운 신조어들이 많이 생겨난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쪽 팔려...”, “신경 꺼...”, “... 은 아주 쥑인다...” 등등, 물론 속된 말인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것들은 joke 수준의 흥미를 줄 뿐 아니라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감정표현이 원색적이어서 전달이 쉽기도 한지라 내가 설교할 때에 양념을 치듯 때때로 사용하고는 했다.
같은 속 된 말이라도 어떤 사람은 구원 받는 결과로 또 어떤 사람은 은혜를 쏟아 버리는 결과로 나타난 것을 생각하니, 역시 사람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인생 각자는 전 우주 가운데 단 하나 밖에 없는 희귀한 존재요, 하나님께서 뜻을 두시고 만드신 “걸작품”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방법도 여러 가지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속된 말은 삼가야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For we are God's workmanship..)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