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4일(주일) 요한복음 2:11-22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 이아브라함 목사님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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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브라함 목사 칼

 

2007년 3월 4일(주일) 요한복음 2:11-22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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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크리스쳔 신문 기사에 지금 영국에서는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이나 힌두교사원 또는 써커스 공연장, 식당을 비롯한 기타 상업시설로도 바뀐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읽고 마음이 심히 답답하게 억눌려 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교인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산주의 사회에서 70년 동안 억압을 당해온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붕괴된 1990년대 초반 이후 11,000개의 교회가 새로 설립되었고 지금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편하게 신앙생활 하던 나라에서는 신자가 줄고, 핍박과 어려움을 경험한 곳에서는 도리어 교회가 늘어나고... 참으로 묘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PCUSA라는 교단이라는 미국 최대의 장로교단에서는 성공회에 이어서 동성애자를 목회자로 안수할 수 있도록 결정을 하였답니다. 즉 동성애자라도 각 개 교회가 교회법으로 안수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하여 사실상 동성애자가 목회자로 안수 받을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지요. 그래서 뜻있는 많은 교회들의 교단 탈퇴가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어수선한 소식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진실한 믿음의 설자리가 자꾸 좁아지는 듯한 마음이 듭니다.

교회당이란 건물은 그 속에서 교회가 모였을 때 부르는 이름이고, 그 속에서 이슬람예배가 행해지면 이슬람사원, 장사를 하면 shopping center, 먹을 것을 만들어 팔면 식당, 소를 키우면 마굿간, 돼지를 키우면 돼지울간이 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지요.

오늘 우리들이 모이는 이곳은 교회당인줄 믿습니다. 확실합니까?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여 유대교로 입교한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돈을 바꾸고, 비둘기와 양과 소를 파는 장사꾼들을 보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울분이 치솟은 듯 분을 이기지 못하여 사뭇 난폭하고 파괴적인 모습으로 그 모든 것들을 다 뒤집어엎으시고 내어 쫓으시며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다른 성경말씀에서는 볼 수 없던 별난 모습이지요.

그런데 당시 성전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요, 자존심이요 신앙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예배를 드리려고 준비하는 시간에 누군가 저 입구에 들어와서 table을 뒤엎고, 주보, 헌금봉투를 다 집어던지고 또 입구에서 안내하는 성도님을 밀어내고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터를 만들지 말라.” 고 고함을 치고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다 내 쫓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지배국인 로마사람들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곳인데, 일개 갈릴리 출신 시골 청년이 이토록 난동을 부렸다는 것은 이 일에 그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켰다”는 말은 주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정신을 잃었다, 이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것은 우상의 성전, 인간의 성전, 형식의 성전이며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도적의 소굴일 뿐 아니라 그야말로 돈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물질주의로 오염된 장사터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벌려진 성전 market의 운영자가 대제사장들이었다고 합니다.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보증된 business, 결코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거대한 장사이었습니다. 유월절 한 주간 동안에만도 25만 마리 정도의 양이 제물로 바쳐졌다니 실로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잘나가는 business입니다. 그곳은 과연 장사터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곳이 그러하듯이 장삿터에는 장사의 원리가 작용하는 법입니다. 겉만 잘꾸며져서 화려하고 풍성한 모양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신 거룩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도 없이 다만 사고팔고 속고 속이는 또 다른 생존경쟁의 한 마당으로서 떠들썩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암소 같은 큰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우대하고 대접받고, 비둘기 같은 작은 제물을 드릴 능력 밖에 없는 사람들은 홀대받고 밀려나고....
또 장사꾼들이 저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뇌물을 쓸 것이고 제사장들은 이를 통해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리며 권위를 부렸을 것이고...

자연히 제사장들의 마음이 성전 깊숙한 곳에 계신 하나님께 있지 않고 성전 market에 있었겠지요.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보셨으므로 그토록 분을 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 제사장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철저히 무시되고 도리어 이용당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실 때, 그것은 이미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상의 전, 거짓성전일 뿐이었습니다.

마6:21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묻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은 자나 깨나 그 마음이 자기가 보물을 묻어둔 곳에 있게 되겠지요.

여러분, 무엇이 저와 여러분의 보물입니까?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 제사장들이 보물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돈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성전마켓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더이상 보물이 아니었고, 귀중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이름을 이용하여 치부를 하는 제사장이라는 이름의 businessmen 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으로 분이 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들과 이들의 신앙을 인도하는 제사장들이 왜 이렇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거룩한 성전이 왜 형식적인, 인본적인, 물질적인 우상의 전으로 전락하게 되었을까요?

“참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즉 살아계신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예수님은 이러한 생명의 관계에 계셨으므로 그 기도가, 예배가, 역사가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살아 계시는 생명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을 아시고 또 그 진노를 아시고 이 성전 청소에 생명을 거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은 예수님께는 당신 자신의 생명만큼 귀한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리하셨습니다.  결국 이런 이유로 십자가에 사형수가 되셨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백성들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다만 의식만 남아버렸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생명 없는 종교인, 생명 없는 예배, 생명 없는 헌신, 생명 없는 의식..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입니다.

현대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로봇이 일상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이 온갖 일을 다 해냅니다. 사람보다도 더 충성스럽게 지치지 않고 일합니다. 그렇다고 그 로봇이 나와 생명의 관계에 있는 게으른 내 아들만큼 가치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봅니다. 로봇을 만들 때 예배하고, 헌신하고, 거룩한 모습을 하고, 시간적으로 주일이면 교회를, 가고 하루 세 번 기도하게 하고, 이 모든 프로그램을 입력한다면 외형적으로는 얼마나 충성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는 선택된 백성들과 비교가 되기나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는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운명공동체로 지금 우리 속에 살아계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6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지금 여기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행 20:28에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셨다고 합니다.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바 된 교회이므로, “예수님짜리”이므로, 우리에게 그만한 피 값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청소하신 성전은 지성소도, 성소도, 마당도 아닌 이방인의 뜰이었다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셨다. 대제사장들, 제사장들, 레위인들, 백성들..... 소위 제사장들의 마음이 지성소에 있지 않고,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는 성전 market에 있었다. 지성소에 계신다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거대한 business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물질주의(하나님을 이용한 business)
- 형식주의(믿음이 없는 가인의 제사)
- 인본주의(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종교생활)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바 된 교회의 거룩함과 그 귀중함이 여지 없이 무시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오늘 이 시간 목숨을 걸고 성전을 청소하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분을 참을 수 없었던 2000년전의 예루살렘 성전은 마치 오늘날 십자가를 강단에 걸어 놓고 벌리는 거대한 business의 원형이라고나 할까요?
예수 믿고, 출세하고, 이름 내고, 권위 부리고, 부자 되고, 대를 물려가며 해먹고, .....  소위 사역이라는 것이 먹고사는 방법이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며 마음이 답답합니다. 지저분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젊었을 때는 거룩한 목회사역이 조금이라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거나 타성에 빠지면 언제라도 손을 씻겠다고 교인들에게나 동료 사역자들에게 공언하며 담대한 마음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고 보니 목회를 그만 두면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다른 길이 없으니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자주 던지게 됩니다. 이제는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누가 써줄 사람도 없고 또 할만한 것도 없으니 어떻게 먹고 살겠습니까?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여기에 내 인생의 황금기를 걸었는데 말입니다. 요사이 들어 자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곤 합니다. 
과연,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 물질주의(하나님을 이용한 business)
- 형식주의(믿음이 없는 가인의 제사)
- 인본주의(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종교생활)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성소에? 성전 market에?
성전 중심에 있는가? 성전 주변에 있는가?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핵심적인 장소는 성전의 가장 안쪽에 있는 지성소 즉 지극히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표를 일 년에 한번 특별하게 만나주시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곳은 아무나 들어가면 즉습니다. 다만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백성들의 죄를 고하고 용서 받는 일을 할 수 있는데 그 때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즉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옷 술에 방울을 달고 발에 밧줄을 매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밧줄을 당겨서 시체를 끄집어내려는 것이지요. 성전의 지성소는 그러한 곳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 곧 성전의 중심인 지성소에 있을 때는 평안과 축복을 누리고, 그들의 마음이 성전 밖에 널려 있는 것들에 쏠리면 저주와 멸망이 이어졌습니다. 주변에 있는 민족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히도록 버려두셨던 것이지요. 구약시대에 이러한 반복이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반복교훈인 셈입니다.

여러분 !!!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을 때 평안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평안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주변에 있을 때 고통과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매사가 헝클어지게 마련이지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빠집니다. 예수님 믿기 전의 그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아십니다.
제사장들이 무슨 짓을 하든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 백성들은 속고 그것이 성전인가보다, 믿음인가보다 하고 순종하고 제물을 드리고 하라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속을 꿰뚫어 보시고 아셨습니다. 다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다 파괴하셨습니다. 쫓아 내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배드리면서 도리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1-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2.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예배를 받으실 창조주이시며 나에게서 예배를 받으시려
  고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3. 주님께서 헐어버려라 하실 때 헐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들은 그 댓가를 철저히 지불했습니다. 고통스런 댓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경고를 하셨지만 끝내 듣지 않자 하나님은 바벨론을 시켜 솔로몬왕 때지은 성전을 철저히 헐어버리셨습니다. 그 백성들은 큰 환난과 고난과 포로생활을 감당해야했습니다. 

예레미야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말라.

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 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경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은 예루살렘 성전은 이렇게 말씀하신지 불과 30여년 만인 주후 70년에 철저히 파괴되고 백성들은 참혹한 고통을 치르며 전 세계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회개치 않은 결과입니다.

잘못된 예배, 신앙은 우리 자신이 헐어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성령님께서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 시간 철저히 헐어버리십시오.
아니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을 들어 헐어버리실 때에는 우리는 고통스런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다.
1.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수 있습니다.
2. 예배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로서의 의무이며 사명입니다.
3. 잘못된 예배의 자세는 헐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거듭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말입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축복의 길이요. 영광스런 승리의 길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 살아계십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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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님의 댓글

no_profile 이윤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말씀이 있지않으면 나의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것들로 꽉 채워 질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깨끗게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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