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네가 믿느냐?(200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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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우리들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인생의 마침표입니다. 아무도 죽음의 권세 앞에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그 자체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에게 잡혀 일생을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정의해 주셨습니다.(히브리서 2:14-15)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왠지 서둘러 가시기는커녕 태연한 어조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면서 도리어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보내시고서야 그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는 나사로가 이미 죽은 후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소망이 끊어진 그 집에 당도하신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서 부활이라는 사건을 대하는 인생의 한계를 발견하고 또한 오늘날 부활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점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
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에게 있어서 부활이라는 사건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오는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의 부활 말고도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부분을 강조하시면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다그치시는 모습입니다. 즉 현재적으로 당하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그 믿음으로 대처해나가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믿음은 죽은 후에 마지막 때에나 일어날 사건이라는 믿음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후에야 비로소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동행하는 사람들이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도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속내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시체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사로를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이를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생명의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부활 뿐 아니라 그 마지막 때까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부활의 생명력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리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또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마르다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송장냄새가 나는 절망적인 조건에서도, 무덤 속에 갇힌 듯 앞이 깜깜한 인생의 기로에서도, 생과 사의 극한상황이나, 끝을 알 수 없는 회의와 좌절과 자포자기의 나락에서도 부활의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길에서 당할 수 있는 이 모든 부정적인 것들마저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부활의 생명력으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부활의 날까지 이 땅에서 날마다 승리의 부활을 경험하는 역동적인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왠지 서둘러 가시기는커녕 태연한 어조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면서 도리어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보내시고서야 그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는 나사로가 이미 죽은 후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소망이 끊어진 그 집에 당도하신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서 부활이라는 사건을 대하는 인생의 한계를 발견하고 또한 오늘날 부활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점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
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에게 있어서 부활이라는 사건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오는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의 부활 말고도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부분을 강조하시면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다그치시는 모습입니다. 즉 현재적으로 당하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그 믿음으로 대처해나가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믿음은 죽은 후에 마지막 때에나 일어날 사건이라는 믿음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후에야 비로소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동행하는 사람들이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도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속내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시체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사로를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이를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생명의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부활 뿐 아니라 그 마지막 때까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부활의 생명력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리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또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마르다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송장냄새가 나는 절망적인 조건에서도, 무덤 속에 갇힌 듯 앞이 깜깜한 인생의 기로에서도, 생과 사의 극한상황이나, 끝을 알 수 없는 회의와 좌절과 자포자기의 나락에서도 부활의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길에서 당할 수 있는 이 모든 부정적인 것들마저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부활의 생명력으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부활의 날까지 이 땅에서 날마다 승리의 부활을 경험하는 역동적인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