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에는 만족이 없다 :고린도후서 10:12 - 18 (12/2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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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정하신 분량의 한계에 따라 자랑하며,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복음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기를 소원합니다. 진정 옳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입니다.
☞ 주님이 정하신 분량
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2 We do not dare to classify or compare ourselves with some who commend themselves. When they measure themselves by themselves and compare themselves with themselves, they are not wise.
13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3 We, however, will not boast beyond proper limits, but will confine our boasting to the field God has assigned to us, a field that reaches even to you.
☞ 끝없는 도전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We are not going too far in our boasting, as would be the case if we had not come to you, for we did get as far as you with the gospel of Christ.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5 Neither do we go beyond our limits by boasting of work done by others. Our hope is that, as your faith continues to grow, our area of activity among you will greatly expand,
16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6 so that we can preach the gospel in the regions beyond you. For we do not want to boast about work already done in another man's territory.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17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in the Lord."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18 For it is not the one who commends himself who is approved, but the one whom the Lord commends.
분량 밖의(13절) : 한계를 벗어나. 아무런 기준 없이
본문 해설☞ 주님이 정하신 분량 (10:12~13)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뜻과 욕심을 굽히고 순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입니다. 그러나 소명도 없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의 일이나 일꾼을 빼앗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이 닦아 놓은 터전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과 이익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들은 그 동기와 시작이 자신이기에, 스스로 기준이 되어 자신을 평가하고 자랑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지혜가 없도다’(12절)라며 개탄했습니다. 바울은 성령님이 막으실 때 아시아 지방으로 가려던 자신의 계획을 취소하고 마게도냐로 갔으며, 역경과 환난을 이겨 내고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게 일했고, 그 결과를 주님 안에서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 끝없는 도전 (10:14~18)
참된 사역자는 현실에 만족해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부르심을 향해 나아갑니다. 고린도 지역은 바울을 통해 처음으로 복음을 들었고,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가 떠난 후 슬며시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바울이 뿌린 복음 사역의 열매를 자기들의 업적인 양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선을 더 높이, 더 멀리 향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서, 자신이 고린도 지역을 넘어 더 먼 곳까지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동역자가 되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처럼, 주님이 보여 주신 꿈을 따라 멈출 때와 나아갈 때를 알고 헌신하는 사역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진정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화자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내가 세운 계획과 다를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계획을 꺾고 순종합니까?
●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이만하면 됐다며 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비전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입니까?
오늘의 기도주님, 이만하면 됐다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정해 주신 분량 이상을 욕심내지 않게 하소서. 온전한 겸손과 순종으로 주님의 뜻을 이뤄 드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묵 상 에 세 이
☞ 영적 타성
인지력에 대해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타성’이라는 현상에 맞닥뜨린다. 타성이란 주변에 새로운 사물이나 자극이 생기면 처음에는 그것을 강하게 인식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버린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새 손목시계를 차면 처음에는 손목시계의 존재를 느끼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손목시계를 찼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새집으로 이사를 가면, 사름들은 고쳐야 하거나 개조할 것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그런 것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5년쯤 지나면, 여전히 그 목록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고쳐야 할 부분들이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 중에 하나는 ‘영적 타성’과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영적으로 현상 유지의 삶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합리화한다. ‘나는 큰 죄에 빠져 있지 않고, 구원을 잃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어, 나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어.’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너희가 그럭저럭 살라고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괜찮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일종의 ‘영적 집중력 장애’를 앓고 있다. 영적 타성은 너무나 미묘하고 점진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영적 타성은 어떤 면에서 영적 타락보다 더 위험하다.
「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존 오트버그
절 묵상고린도후서 10장 17~18절
존경을 얻으려는 시도는 나비를 좇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좇아도 나비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비가 당신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관심을 받고 싶습니까? 허풍을 늘어놓거나 뽐내지 마십시오. 그저 십자가 아래에 서서 다음을 되새기십시오. “우주를 만드신 이가 나 없이 사느니 나를 위해 죽는 편을 택하셨다.” 굳이 자랑하고 싶다면 이 사실을 자랑하십시오.
맥스 루케이도/ 오크 힐스 교회 담임목사
댓글목록
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v.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
주님 안에서 하는 자랑과 주님 밖에서 하는 자랑이 있습니다.
주님을 자랑하는가 세상에 속한 것을 자랑하는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자랑인가 아니면 남을 세우기 위한 자랑인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섬김을 받기 위한 자랑인가 섬기기 위한 자랑인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자랑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귀하게여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자들이 갖는 자랑을 말할 것입니다.
이은경님의 댓글
이은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절대평가 혹은 상대평가라는 말이 있는데,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비교대상을 무엇으로 삼는가의 문제입니다.
전 자신을 돌아보면 신앙에 관해 아직도 상대평가에 적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합니다.
저 사람에 비하면 내가 좀 더 낫지, 나는 적어도 저런 행동은 안 하니까 좀 더 인간적이지,
저 사람보다야 내가 봉사도 많이 하지, 내가 그래도 한 번은 더 성경을 읽었으니까 좀 더 잘 알지 등등등,,,
수많은 상대평가 속에 저 스스로 대견해하고 어깨를 으쓱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그리하라"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으신 것은 아마도 우리가 우리끼리 서로 비교함으로 말미암아
교만해지고 정죄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목표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다시 수정합니다.
모든 저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저의 모델로 삼아 더욱 겸손히 섬기며 사랑하며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더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히 교통하며 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