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려면" 로마서 6:1-11 2/1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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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아니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매주 화요일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한인의사 한분이 운영하시는 저소득층자를 위한 클리닉을 전도하기 위해서 방문합니다. 대부분의 환자는 주로 중남이분들인데 지난 주에는 오랫만에 한국분을 만나서 약 3시간 반을 대화를 했습니다. 적어도 4년 이상 교회를 다닌 젊은 청년인데 아직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구세주로 그리고 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예수를 믿는 것이 교회사람들처럼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믿고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되었다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예수님을 믿게되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믿는다는 사람들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에도 한 목사부부가 딸을 살해하는 끔직한 범죄에 대해 신문기사를 읽었겠지만, 오늘날은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오히려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계속 기독교인들의 문제점을 지적받습니다. 불행히도 이 것이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문제일뿐 아니라, 신약성경이 처음 쓰여질 약 2천년 전의 교회들의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교회내의 수 많은 문제점을 다룬 것이 신약성경의 서신서.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8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29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31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로마서 6:1-11절까지 죄란 말이 7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6장전체에는 16번언급. 그만큼 죄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저들은 교회가서 죄의 용서를 빌기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죄를 가볍게 여긴다"라고 비난합니다.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지로, 신약성경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우리의 선한행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죄를 멀리해야하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죄을 안만지어도 괜찮은 보험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켯던 구원파… 회개의 기도가 없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를 보니까, 심지어, 의도적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은혜를 더욱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까지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Absolutely not!)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아니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
(아무리 죄를 저도 용서해 주시니까, 죄를 지면 질 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란 발상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고 남용하는 것입니다. 고후 6:1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Absolutely not!) “말도 안된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죄에는 죽은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죄 가운데 살겠다는 이야기냐?)
(그렇지 않으면, 혹은 or) (죄에대하여 죽은 사람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겠다는 것이냐?) 기가 막혀서 따지듯이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침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가지 가능성- 알면서도 혹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죽은 자를 것을 설명한 것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인으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란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침례를 받을 때 여러분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모릅니까 )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침례는 장례식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러니까, 죄의 지배를 받던 옛사람에 대한 장례식을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1.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을 알라
그런데 저도 사도바울과 똑같이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싶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침례를 받은 여러분, 죄에게 종노릇하던 여러분의 옛사람이 죽은 것을 아십니까?
죄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이란 무슨 뜻인가? 를 알아야 대답하실 수 있을 것 같아 설명드립니다.
미국 위스콘신주의 30대 커플이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9살밖에 되지 않은 딸에게 운전을 맡겼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경찰이 차량을 발견했을 때, 운전석에는 성인이 아닌 9살짜리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에게르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며 자신의 딸에게 운전을 시킨 것이다. 유아용 카시트에는 11개월짜리 아기가 안전벨트를 맨 채로 있었다. 경찰에 발견됐을 당시 에게르트와 로스는 술에 만취된 상태였으며 경찰이 "9살짜리 아이를 운전하게 하는 것은 범죄"라고 말하자 에게르트는 "1950년대에는 9살짜리도 다들 운전하고 다녔어"라고 맞받아쳤다.
그는 체포 당시 경찰에게 욕을 내뱉었다. 응급 차량이 단속 현장에 도착했을 때 구급차량 직원한테도 욕을 했다. 인사불성인 채로 주먹을 휘두르며 몸싸움을 걸기도 했다. 에게르트와 로스는 지난 5일 위스콘신주 포크카운티 순회 법원에 출석해 무죄를 주장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판단이 법입니다. 그래서 무죄를 주장합니다. 무법자.
“성경은 죄란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 Lawlessness - 법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법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해방" 죄의 종노릇한다는 것은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자를 말합니다.
죄의 종이 되었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내가 법이 되어 나 중심적으로 살던 옛 나는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우리는 자기 중심적으로 안살아도 되게 해방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알기전의 내가 조금 조금씩 개선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옛사람의 죽음으로 장례식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이런 정체성이 분명해야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도 죄를 많이 짓고 아직도 자기 중심적인 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호히 죄의 종이 아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죄를 질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고 있지만 죄의 노예는 아닙니다.
그러나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도 침례를 받고도 아직도 옛사람처럼 죄의 노예가 된 사람처럼 삽니다. 죄를 질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하고 반드시 선포해야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지금도 죄와 싸와 질때도 많지만, 죄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적이다.
2.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6:2)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6:11)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라고 명령합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처음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지 않고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로 여기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누리고 지키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갈 5:1 비싼 댓가를 치루면서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를 누리는 것은 쉽지 않기때문에 이런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Jan.1 1863) 이 노예해방을 위해서 미국의 4년동안의 남북전쟁을 통해 75만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을 통해 Proclaimed the freedom of 3.1 million slaves. But, Many of those 3.1 million slaves hadn’t heard about their freedom. They were free but didn’t know. 알지 못해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노예해방법을 안다고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1863년에 노예 해방법이 발효된 이후 100년이 지난 1960년대까지도 수많은 인종차별법이 존재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인이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은 382일 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마틴루터킹 목사를 중심으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져 나아갔다.
남북전쟁이란 큰 희생을 치루면 쟁취된 자유지만, 아직도 그 자유를 누리려면 아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이 스스로 민권운동을 통해서 힘써야만 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80년대 초에 동남부 알라바마에 있는 사립대학을 다녔는데 수많은 교수나 학교 교직원은 거의 100%가 백인들이었고 두세면의 동양인 교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남부에 있는 흑인들은 온순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너무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했기때문에 부분적으로 노예적 생각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죄의 종노릇하면서 살았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에서 자유한 삶을 살도록 구원하셨음에도, 우리 주위의 환경과 우리의 죄의 속성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한 삶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단지 죄와 싸우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
우리는 로자 파크스라는 여인이나 마틴 루터킹 목사가 흑인 민권운동에 앞장 섰던 것처럼,
우리를 다시 죄의 노예로 사로 잡으려는 사탄의 시도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죄에 지배받는 자가 아니라, 지배하는 자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나 중심적으로 살고저하는 죄의 속성에 대항하여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힘써 지키고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
(그런데 죄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할테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부시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테러용의자들을 가두는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미국 땅 안에서는 테러용의자들을 법적으로 재판을 거치지 않고 감옥에 가둘 수 없으므로, 지금의 쿠바가 위치한 섬의 한 부분인 미국땅에 관타나모 수용소를 만들어 테러 용의자들을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한달쯤 전에 테러용의자 한명이 수용소에 있던 석방이 되었는데.. 그냥 남아 있기로 결정. 그 이유는 갈 곳이 마땅치 않기때문에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무엇에로의 자유도 중요하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던데서 자유함을 받았다는 것은, 자기가 법이된 자기 중심의 삶에서 자유함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을 중심으로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실지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인 삶보다 더 좋은 선택이 없기 때문에 그 삶을 계속 살기를 원합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안에서 - 연합한 자로서)
죄의 종노릇 하던자가 해방되어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중심적인 옛사람이 죽는 침례로 시작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침례가 장례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롬 6:5-8을 보니까...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
예수님과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결혼식과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중심적인 죄에 대해서는 죽는 장례식으로,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결혼식으로 시작됩니다. (더 이상 혼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붙어사는 삶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 데살로니가 전서. 5:10)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순간 전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듯이,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관계성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것이 모든 인간이 필요로하는 에덴동산의 회복이요 구원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30년동안 양노원 생활을 하다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과 같은 방에 수용되었던 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돌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양노원에 계신 김종숙 성도님에게도 말씀드립니다. 남편되신 김기영집사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우리 인간은 독립적으로 살도록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도록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일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490번..
그 분을 인생의 친구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은 우리 맘대로 살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구원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연합하여 산자로 여기시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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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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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로마서 6:1-11 (2/14/2016)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불법을 행한자를, 죄를 진자를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치 죄를 져도 상관없는 허가나 보험으로, 심지어 죄를 더 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임한다라는 망령된 생각을 가진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죄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적어도 세가지를 말합니다.
1. “죄에 대해서 죽은 자”란 사실을 알라 (6:2-8)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의 종이었던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v.6)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장례식과 같은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v. 3)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옛사람이 점 점 개선되는 삶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는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 (6:11)
이 명령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지 않고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때문에,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뿐 아니라, 여기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75만명의 전사자 (부상자제외)를 남북전쟁이란 비싼 희생의 댓가를 치루고 노예해방이 선포되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노예로 계속지낸 흑인들도 많았고, 1863년노예해방이 선포된 100년이 지난 후 1960년 대까지도 인종차별법이 존재했습니다. 흑인민권을위해 싸웠던 마티루터 킹목사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주신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싸우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기억합시다. 우리는죄의 종이 아니라 죄와 싸우는 자들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
죄의 종노릇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한 자유입니다. 침례는 단지 장례식일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을 시작하는 결혼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또한 분명히, 그의 부활 하 심 과 같은 부활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혼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붙어사는 삶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죄를 국복하는 삶의 방법이기도 하고 목적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