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자세”(대체신학 vs. 회복신학) 로마서11:20 & 11:25-27 4/2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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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자세” 로마서11:20 & 11:25-27
20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 각자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2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27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룰 것이다."
4월 22일은 ‘지구의 날’입니다.‘ 지구의 날’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으로부터 지구를 살리자는 취지로 1970년 4월 22일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로 46주년을 맞은 지구의 날은 세계 193개국 참여하는 세계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1970년 첫 지구의 날을 제정했을 때에 환경론자들과 인구통계학자들은, 인류가 뭔가 급진적인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지구와 인류에게 큰 재앙이 찾아 올 것을 다음과 같이 예견했습니다.
• 인류는 15년이나 30년 안에 멸망하게될 것이다.
• 수억의 인구가 10년 내에 굶어 죽게될 것이며 30년 후에는 인류의 거의 모든 인구가 기근에 시달리게될 것이다.
• 공기 오염과 공해때문에 각 도시에서는 깨스 마스크를 차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 석유가 바닥이 날 것입다.
• 정부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애기를 낳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게될 것이다.
그러나, 환경론자나 인구통계학자들의 예측이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류의 재앙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습니다. 인류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로 지구가 뜨거워져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해수면이 상승해 세계 주요 도시가 바다에 잠기게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측에3만1,487명의 미국 과학자들이 서명했고,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져서 각국의 대통령들과 유엔까지 나서 지구온난화에 대비해야한다고 난리입니다.
이제 말세란 개념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자들이 먼저 나서서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일반인들까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영원히 갈것처럼 착각하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도 다른 각도에서 인류역사의 종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롬 11:2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27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룰 것이다.
언제 종말이 오는가?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자로서 예수믿고 구원받기로 예정된 이방인들의 숫자가 차고 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면 마지막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 24:14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며,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된다는 뜻이 무엇인가? 모든 유대인 개개인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집합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생각됩니다. “온 이스라엘”의 표현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아간을 돌로 쳐서 죽이고”란 말씀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7:25) 문자적으로 모든 각 개인을 포함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된다는 것은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발견하게 될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27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룰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이 두가지 견해를 대체신학 그리고 회복신학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해석과 관련하여 논란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심각한 이단적 신앙에 빠지기도 하여 딱딱한 주제이지만 신학적인 문제를 간략하게 나마 다룹니다)
대체신학 (Replacement theology)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No plan for Israel as Nation) 유대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정체성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 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히 8:12-13 새 언약이 구약을 대체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 21:43)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만으로 구성되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온 세계 모든 민족들로 구성되는 하나님나라를 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므로 이스라엘의 역할은 끝난 것입니다.
반면 회복신학 (Restoration Theology)은 이스라엘이 국민과 영토를 소유한 국가로서 회복된다는 해석입니다. (Israel will be restored as nation with people and land)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국가단위의 이스라엘이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을 성취키 위해 유대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배반하지 않고 메시야로 받아들였으면 있었을 유대국가의 재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과거의 유대법을 다 지키도록 허락하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끝이 이르면 유대인들을 반드시 다시 찾아 회복시켜 그들은 기어이 역사의 중심에 앉히신다는 ‘이스라엘 회복’을 믿는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방인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선민 유대민족을 본 위치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신사도 운동, 백투 예루살렘. 이스라엘 회복 운동 등, 유대인들의 국가, 문화, 신앙이 회복되도록 돕는 운동이 회복신학의 예가될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아직도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고국 땅으로 돌아가도록 기도하고, 이들에게 여행비용까지 대주어 그들이 안정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정착하여 살도록 돕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제 3성전 짓는 것을 재정적으로 돕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학의 바탕아래 이스라엘과 교회가 함께 하는 희년의 대축제를 계획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선권을 세계 선교 보다는 이스라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는 종교적 기반이 아니라 사회주의 공동체에 기반한 세속 국가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성경의 예언대로 흥어져 살다가 회개해서 하나님께서 약속된 땅으로 돌아온 경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기독교 혐오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북한에서도 사용하는 적십자 로고를 십자가가 들어가 있다해서 다른 로고를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수학 교과서에서조차 십자가를 안 쓴다고 +싸인대신에 ㅗ싸인을 사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내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경제적, 인권적으로 매장되다시피 엄청난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맏아들인다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않다가 지난 2008년에야 처음으로 12명의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들이들이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시민권을 받으려면 유대교로 개종해야한다는 말은 풍문이 아닙니다)
620만의 이스라엘 인구중 오직 2만정도 그러니까 0.3%만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건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지 인구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던 여러 종파의 기독교인들을 오히려 무슬림들보다 심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팔레스타인 현지의 가톨릭,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개신교 교파 지도자들이 모여 서방 기독교인들 향해 공동으로 발표한 2009년 카이로스 팔레스타인 선언문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인 이들이 겪는 고통을 뒤틀린 신학적 궤변으로 정당화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소위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미국 교회지도자들을 향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적대시 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인들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어리석음을 깨달으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한국에도 이스라엘의 우리편 팔레스타인은 남의 편이란 편견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 보다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을 더 보호하고 응원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반유대적인 정서도 문제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 초점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당면한 문제는 교회 내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불화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본토박이인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네로의 칙령에 따라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민자들인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차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성도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라고 경고합니다: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 각자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v.20)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 (v.25)
유대인들을 정죄하지 마라. 판단하거나 미워하지 말라. 유대인들을 품어주라 그들을 아끼라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이런 마음으로 유대인들을 대했다면 많은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게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을 이토록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과 항상 이웃하여 살았던 유대인들이 가장 복음화 가 안된 민족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일의 유대인학살을 비롯해서 유럽기독교 역사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지속적으로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선민으로 취급하여 무조건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기독교시온주의도 문제지만, 반유대주의도 큰문제인 것을 보게됩니다.
세상 마지막 시대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틀립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 어떻게 주님의 오심과 연관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좀 더 당면한 문제는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준비할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세대에 주님이 다시 오지 않으시더라도 우리는 어차피 곧 죽게되 있으므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야할 것입니다.).
1992년 10월28일 밤 한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날 전국 155개 교회에는 흰옷을 입은 신도 8200여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세상이 끝난다고 믿고 재산을 버린자, 가정을 버린자, 학업을 중단한자, 임신부로서 낙태한 자, 부모가 종말론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음독자살을 한자도 있었습니다. 심각한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 왔던 이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예수님과 상봉한다고 믿고 자정을 불과 10분 앞둔 11시50분이 되자 모두 일어나 울부짖고 온몸을 흔들며 "주여 나를 데려가소서"하고 부르짖었지만, 결국 약속된 시간에도 대한민국 상공에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6) 시한부 종말론처럼 종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미리 그 날자를 알아서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면서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때려치고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자를 향하여 사도바울은 일하지 아니하려면 먹지도 마라고 경고 하였습니다. .
마지막 날은 도둑 같이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살전 5:3) 그렇지만, 언제 오실까, 어떻게 오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도둑같이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전 5: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우리는 빛가운데서의 삶 깨어있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빛가운데 사는 삶은 사랑가운데 사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요일 1:9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던 다미선교회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정결한 신부의 특징은 그런 외적인 흰 옷이 아니라 사랑으로 옷입은 자들입니다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2-13)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일 데가 없는 삶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에도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빌 1:9-11)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자기 중심적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 사랑이 충만한 삶이 바로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삶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를 방문하셨던 김목사님께서 “남가주 교회들을 방문하여 보니까 다 삭막하다 경직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분위가 삭막하다 경직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 성도들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까요?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5)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므로 서로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아닙니까? 그리고 바로 전 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빌 4:4) 서로 관용하는 삶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의미합니다.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삶도 기쁨의 삶도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 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 전에 무슨 말씀이 있는 줄 기억하십니까?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 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15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살전 5:14-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잃고 삭막하고 경직된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들이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마음때문이 아닐까요? 서로를 받아주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치 못하는 관계성 때문에 우리는 기쁨보다는 원망가운데 사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여러분들과 저의 대화가, 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치 못하는 이유들을 나누는 대화는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우리의 자존심은 세워질지 몰라도, 기쁨보다는 원망과 삭막함과 허탈하고 경직된 마음을 갖게되는 것을 경험치 않습니까? 우리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관용과 서로에 대한 존경으로 충만한 대화를 나누고 그런 삶을 산다면, 우리는 주안에서 기뻐하는 삶,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소식을 듣거나 우리들이 종말을 준비할 때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단 한가지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가, 나는 점 점 더 관용하는가, 용서하는가, 나는 남을 나 자신보다 더 높이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구절을 하나 읽고 마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이것으로써 사랑은 우리에게서 완성된 것이니, 곧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요1서 4:16-17
20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 각자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2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27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룰 것이다."
4월 22일은 ‘지구의 날’입니다.‘ 지구의 날’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으로부터 지구를 살리자는 취지로 1970년 4월 22일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로 46주년을 맞은 지구의 날은 세계 193개국 참여하는 세계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1970년 첫 지구의 날을 제정했을 때에 환경론자들과 인구통계학자들은, 인류가 뭔가 급진적인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지구와 인류에게 큰 재앙이 찾아 올 것을 다음과 같이 예견했습니다.
• 인류는 15년이나 30년 안에 멸망하게될 것이다.
• 수억의 인구가 10년 내에 굶어 죽게될 것이며 30년 후에는 인류의 거의 모든 인구가 기근에 시달리게될 것이다.
• 공기 오염과 공해때문에 각 도시에서는 깨스 마스크를 차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 석유가 바닥이 날 것입다.
• 정부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애기를 낳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게될 것이다.
그러나, 환경론자나 인구통계학자들의 예측이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류의 재앙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습니다. 인류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로 지구가 뜨거워져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해수면이 상승해 세계 주요 도시가 바다에 잠기게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측에3만1,487명의 미국 과학자들이 서명했고,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져서 각국의 대통령들과 유엔까지 나서 지구온난화에 대비해야한다고 난리입니다.
이제 말세란 개념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자들이 먼저 나서서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일반인들까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영원히 갈것처럼 착각하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도 다른 각도에서 인류역사의 종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롬 11:2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27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룰 것이다.
언제 종말이 오는가?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자로서 예수믿고 구원받기로 예정된 이방인들의 숫자가 차고 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면 마지막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 24:14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며,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된다는 뜻이 무엇인가? 모든 유대인 개개인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집합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생각됩니다. “온 이스라엘”의 표현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아간을 돌로 쳐서 죽이고”란 말씀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7:25) 문자적으로 모든 각 개인을 포함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된다는 것은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발견하게 될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26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27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룰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이 두가지 견해를 대체신학 그리고 회복신학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해석과 관련하여 논란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심각한 이단적 신앙에 빠지기도 하여 딱딱한 주제이지만 신학적인 문제를 간략하게 나마 다룹니다)
대체신학 (Replacement theology)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No plan for Israel as Nation) 유대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정체성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 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히 8:12-13 새 언약이 구약을 대체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 21:43)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만으로 구성되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온 세계 모든 민족들로 구성되는 하나님나라를 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므로 이스라엘의 역할은 끝난 것입니다.
반면 회복신학 (Restoration Theology)은 이스라엘이 국민과 영토를 소유한 국가로서 회복된다는 해석입니다. (Israel will be restored as nation with people and land)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국가단위의 이스라엘이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을 성취키 위해 유대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배반하지 않고 메시야로 받아들였으면 있었을 유대국가의 재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과거의 유대법을 다 지키도록 허락하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끝이 이르면 유대인들을 반드시 다시 찾아 회복시켜 그들은 기어이 역사의 중심에 앉히신다는 ‘이스라엘 회복’을 믿는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방인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선민 유대민족을 본 위치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신사도 운동, 백투 예루살렘. 이스라엘 회복 운동 등, 유대인들의 국가, 문화, 신앙이 회복되도록 돕는 운동이 회복신학의 예가될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아직도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고국 땅으로 돌아가도록 기도하고, 이들에게 여행비용까지 대주어 그들이 안정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정착하여 살도록 돕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제 3성전 짓는 것을 재정적으로 돕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학의 바탕아래 이스라엘과 교회가 함께 하는 희년의 대축제를 계획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선권을 세계 선교 보다는 이스라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는 종교적 기반이 아니라 사회주의 공동체에 기반한 세속 국가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성경의 예언대로 흥어져 살다가 회개해서 하나님께서 약속된 땅으로 돌아온 경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기독교 혐오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북한에서도 사용하는 적십자 로고를 십자가가 들어가 있다해서 다른 로고를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수학 교과서에서조차 십자가를 안 쓴다고 +싸인대신에 ㅗ싸인을 사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내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경제적, 인권적으로 매장되다시피 엄청난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맏아들인다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않다가 지난 2008년에야 처음으로 12명의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들이들이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시민권을 받으려면 유대교로 개종해야한다는 말은 풍문이 아닙니다)
620만의 이스라엘 인구중 오직 2만정도 그러니까 0.3%만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건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지 인구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던 여러 종파의 기독교인들을 오히려 무슬림들보다 심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팔레스타인 현지의 가톨릭,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개신교 교파 지도자들이 모여 서방 기독교인들 향해 공동으로 발표한 2009년 카이로스 팔레스타인 선언문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인 이들이 겪는 고통을 뒤틀린 신학적 궤변으로 정당화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소위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미국 교회지도자들을 향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적대시 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인들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어리석음을 깨달으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한국에도 이스라엘의 우리편 팔레스타인은 남의 편이란 편견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 보다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을 더 보호하고 응원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반유대적인 정서도 문제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 초점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당면한 문제는 교회 내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불화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본토박이인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네로의 칙령에 따라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민자들인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차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성도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라고 경고합니다: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 각자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v.20)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 (v.25)
유대인들을 정죄하지 마라. 판단하거나 미워하지 말라. 유대인들을 품어주라 그들을 아끼라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이런 마음으로 유대인들을 대했다면 많은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게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을 이토록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과 항상 이웃하여 살았던 유대인들이 가장 복음화 가 안된 민족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일의 유대인학살을 비롯해서 유럽기독교 역사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지속적으로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선민으로 취급하여 무조건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기독교시온주의도 문제지만, 반유대주의도 큰문제인 것을 보게됩니다.
세상 마지막 시대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틀립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 어떻게 주님의 오심과 연관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좀 더 당면한 문제는우리는 어떻게 종말을 준비할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세대에 주님이 다시 오지 않으시더라도 우리는 어차피 곧 죽게되 있으므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야할 것입니다.).
1992년 10월28일 밤 한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날 전국 155개 교회에는 흰옷을 입은 신도 8200여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세상이 끝난다고 믿고 재산을 버린자, 가정을 버린자, 학업을 중단한자, 임신부로서 낙태한 자, 부모가 종말론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음독자살을 한자도 있었습니다. 심각한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 왔던 이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예수님과 상봉한다고 믿고 자정을 불과 10분 앞둔 11시50분이 되자 모두 일어나 울부짖고 온몸을 흔들며 "주여 나를 데려가소서"하고 부르짖었지만, 결국 약속된 시간에도 대한민국 상공에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6) 시한부 종말론처럼 종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미리 그 날자를 알아서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면서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때려치고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자를 향하여 사도바울은 일하지 아니하려면 먹지도 마라고 경고 하였습니다. .
마지막 날은 도둑 같이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살전 5:3) 그렇지만, 언제 오실까, 어떻게 오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도둑같이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전 5: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우리는 빛가운데서의 삶 깨어있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빛가운데 사는 삶은 사랑가운데 사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요일 1:9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던 다미선교회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정결한 신부의 특징은 그런 외적인 흰 옷이 아니라 사랑으로 옷입은 자들입니다
"주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데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3:12-13)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일 데가 없는 삶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에도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빌 1:9-11)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자기 중심적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 사랑이 충만한 삶이 바로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삶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를 방문하셨던 김목사님께서 “남가주 교회들을 방문하여 보니까 다 삭막하다 경직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분위가 삭막하다 경직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 성도들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까요?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5)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므로 서로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아닙니까? 그리고 바로 전 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빌 4:4) 서로 관용하는 삶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의미합니다.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죄하며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삶도 기쁨의 삶도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 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 전에 무슨 말씀이 있는 줄 기억하십니까?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 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15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살전 5:14-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잃고 삭막하고 경직된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들이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마음때문이 아닐까요? 서로를 받아주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치 못하는 관계성 때문에 우리는 기쁨보다는 원망가운데 사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여러분들과 저의 대화가, 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치 못하는 이유들을 나누는 대화는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우리의 자존심은 세워질지 몰라도, 기쁨보다는 원망과 삭막함과 허탈하고 경직된 마음을 갖게되는 것을 경험치 않습니까? 우리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관용과 서로에 대한 존경으로 충만한 대화를 나누고 그런 삶을 산다면, 우리는 주안에서 기뻐하는 삶,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소식을 듣거나 우리들이 종말을 준비할 때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단 한가지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가, 나는 점 점 더 관용하는가, 용서하는가, 나는 남을 나 자신보다 더 높이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구절을 하나 읽고 마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이것으로써 사랑은 우리에게서 완성된 것이니, 곧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요1서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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