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만찬의 목적” 고전 11:23-26 8/3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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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 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전 11:23-25
친구가 보내온 글 (마음이 쉬는 의자 중에서)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 가세요.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서로 손잡고 건너 가세요.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 마음이 쉬는 의자 중에서
친구목사님에게 받은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요즘 이런 비슷한 내용의 글들을 카톡으로 받을 때가 종 종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끝까지 동행해주는 관계에 대한 염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동행해주는 관계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동행하는 관계를 원하면서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그 이유가 명예와 소유 문제때문입니다. 그것이 명예에 관한 것이든 소유에 관한 것이든 자기의 것을 희생해야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우정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학교동창들처럼 10년 20년 30년 40년 오랫동안 같이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를 참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돈이나 재산 문제 때문에 명예문제 때문에 친구간에도 식구들 간에도 하루 아침에 원수로 변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데 간혹 방금 만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10년 20년 30년 사귄 사람보다 금방 신뢰가 가고 깊은 관계성을 갖게 하는 사람이 드물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서 이런 신뢰와 가까움을 느끼게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돈이나 재산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0-11)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믿고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나 명예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압니다. 세상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갖게되는 가치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소유나 명예 보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때문에 참된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신 주님께서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라는 부탁입니다. 이런 사랑이 선택이 아니라 그리고 그런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씀하신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런 관계성이 있습니까?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을 해야겠지요. 우리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먼저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고 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2:13
그러나, 교회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실지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한국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가 전한 이야기입니다: 한 연세 많으신 권사님이 교회 건물 리모델링을 위해서 1억 5천만원을 헌금하셨는데 같은 교회 집사로부터 사기를 맞고 다 잃었다는 내용입니다. 드물지 않게 듣게되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불행히도 다른 성도와의 관계성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물질욕에 사로잡혀 교회를 파괴하고저 하는 이들도 교회안에 적지 않게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가진자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무시하고, 누가 더 위대한 지도자냐란 문제로 파벌이 있었고, 은사를 남용하는 사람, 성적인 불륜에 빠진 자, 심지어 교우 간에 법정에 고소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교회내의 관계성의 위기가 왔을 때에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관계와 (고전 12:13) 또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교회 내의 문제가 마치 주님의 만찬을 소홀히 생각하고 참여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주님의 만찬을 가치 있게 의미있게 참여하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복음을 기억하라: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 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 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고전 11:23-25)
주님의 만찬을 드는 이유는 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주님의 만찬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님의 몸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안이나 권고가 아니라, 예수님꼐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의 만찬을 먹고 마시므로 복음을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왜 복음을 기억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가?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2 그러므로 그는 늘 복음을 생각하므로 복음중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미국의 어떤 소년이 길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줍고 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행여 또 이런 일이 있을까 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녔는데 그것이 그만 그의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데 큰 취미가 생겨서 그가 주운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수천개의 동전, 그외의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것들을 줍느라고 그 일생이 결국 넝마주이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어느 구두닦이 소년은 구두를 닦을 신발을 찾기 위하여 하루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으나 결국 그의 인생을 구두닦이로 마쳤다고합니다.
저는 이 예화를 읽으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저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칫 돈 만 생각하다가 돈보다 더 귀중한 문제를 생각치 못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부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도 돈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적구조와 환경이 가난한 사람도 돈만 생각하기 쉽게끔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 모두조심해야햐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연속극, 오락 등도 우리를 중독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한 일 당한 것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불평하는 사람, 감사할 것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감사의 사람, 후회할 것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 한숨쉬는 사람, 앞으로 일어날 일 걱정만 하며 사는 염려하는 사람.. 사람은 무엇을 쳐다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fixing our eyes on Jesus) 아예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자라고 권고합니다.. 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는가?
요일 3: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두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때문에 이제는 어떤 사람도 세상의 가치관이나 기준으로 알지 아니하게 되고, 형제자매를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4-16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도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 그 사랑을 듣고 믿다보니까, 내가 소유한 물질이나, 나 자신보다 그들의 필요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되므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섬긴 것 아닙니까?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할 때, 복음을 기억할 때 교회의 하나됨과 사랑을 실천하고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주님의 만찬 - 복음을 선포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11:26)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다시 말하면 복음을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복음을 우리 가운데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으로 성경에서 복음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 혹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로 대치해서 사용하면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만찬은 우리 가운데 복음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서로 서로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하나됨이 없고 사랑이 없는 가운데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야단칩니다: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11:20) 주님의 만찬에 참여 하지만, 서로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므로 형식적인 주님의 만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주님의 만찬을 들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말합니다. (28) 왜냐하면 다른 지체를 무시하거나, 정죄하거나, 용서 못하거나, 남을 속이는 상태에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행위기 때문입니다. (22)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한 상태에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인간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먼저 살펴보지 않고)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28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십시오.” (11:27,28)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회개의 의지가 없는 분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욕되게하는 행위므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확실한 믿음의 검증없이 침례를 주어서 침례를 받자 마자 교회를 떠난 분들도 있었고 신앙 생활을 흐지부지하다가 떠난 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교회의 책임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침례를 소홀히 여기면 참된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 못하는 것처럼, 주님의 만찬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행위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욕되게 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반면, 우리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기회로 삼으며 주님의 사랑에 합당하게 주님의 만찬에 참여한다면, 이로서 주님의 만찬을 들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면 우리 21세기 침례교회가 성서적인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갖게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고백하는 마음으로 저를 따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내 자신을 살펴보아, 죄에서 회개하며, 다른 지체들을 용서하며 귀히 여기며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마음 자세로 다음 주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겠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회개 못할 죄가 있다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지 마십시요 주님의 만찬을 소홀히 여기지맙시다.
너무 자신을 돌아보자 회개하자등 무거운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요. 사실 주님의 만찬은 복음의 선포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소식 보다도 복된 소식의 선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잔치자리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므로 죄가운데 있던 우리들이 죄를 회개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 우리들의 깨어진 관계성이 화해되며, 소원해진 관계성이 가까와지며, 미지근한 관계성이 뜨겁게되며, 얄팍한 관계성이 깊어지며, 형식적인 관계성이 진실된 관계성으로 변화되는 복을 경험한다면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복음의 선포요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가 되겠습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반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운명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들때마다 이런 놀라운 복을 경험하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3. 복음을 선포하라 – 세상에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11:26)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다시 말하면 복음을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복음을 우리 가운데 선포하고 또한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예수요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므로 진리를 증거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지극히 세상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므로 진리를 왜곡되이 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몇 년전부터 알아온 한 분이 있는데 드물게 들를 때마다 많은 시간을 대화한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령이 얼마나 완고한지 불신으로 그득한지를 이번에 깨달으면서 그 분하고는 이제 시간낭비를 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까지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분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의 의미를 실감하게됩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문제삼는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사실이라면 그 분의 불신은 자신의 책임일 뿐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들이 신뢰를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기 원한다는 말씀아닙니까? 그런데 교회의 존재가 오히려 복음선포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 다니고 싶어도 그 사람이 있으면 안갈래 이런 이야기 들어보신적 있으세요. 심지어 “저 성도 집사 저 장로가 있는 (교회는) 천국이라면 나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다"란 표현도 듣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며 마땅히 취해야할 마음 자세로 (a worthy manner) 주님의 만찬에 참여한다면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합당치 않은 자세로 주님의 만찬에 임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메지시를 증거하는 집단에 불과하게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28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빌 1:27-28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라고 권고합니다. 이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 그리고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삶은 우리가 얼마나 올바르게 주님의 만찬에 임하느냐로 결정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는 주님의 만찬을 먹습니다. 우리를 살펴보고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므로 복음에 합당한 삶 그리고 한 정신과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삶을 살므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21세기 침례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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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주님의 만찬의 목적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 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전 11:23-26)
1. 복음을 기억하라: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라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 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고전 11:23-25)
요일 3: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2. 복음을 선포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서로에게) 선포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11:26)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11:20)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11:22)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먼저 살펴보지 않고)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28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십시오.” (11:27,28)
3. 복음을 선포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세상에게) 선포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6 (새번역)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빌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