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 1:16-17 10/18/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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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여러분 직장동료들이나 믿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갔을 때 식사하기 전에 혼자라도 기도하십니까? 물론 소리를 내서 기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기도 금식 구제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기도 안하는 것도 결국 같은 위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남의 평가에 아주 민감하여 무슨 이유로던 수치나 부끄러움이나 창피당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보는데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줄압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고 후회스런 경험이 있는데요. 제가 초등학교 3,4학년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소풍을 가던 날인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 어린 눈에도 시골 아주머니처럼 보였던 엄마에 대한 창피를 느껴서 다른 학생들 앞에서 제 엄마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지금 이 말하면서도 어머니에게 그러했었다는 사실로 제 마음이 아프네요. 도대체 이런 수치감과 창피를 어디서 배웠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 경험도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 어떤 친척은 항상 저의 형은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저는 데리고 나가는 것을 꺼려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를 창피하게 여겼던 것을 것을 압니다.)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때부터 체면을 위해서 숨기고 속이고 가리는 것을 예의라고 배웠고 이런 과정에서 수치, 부끄러움, 위신같은 것들을 알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자라왔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이야기라고 하고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이런 수치심에서 자유하십니까? .
제가 알라바마주에 한동안 살았습니다. 그 때에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한인침례교회들 가운데 잘 알려진 목사님께서 부흥회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 목사님께 인사드리려고 집회에 방문했던 저와 같은 나이 또래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은 학벌과 가정배경등이 저에 비해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그 청년을 감탄하며 칭찬하며 배우자를 소개하겠다는 등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 목사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가를 짐작할 수 있었고 열등감과 수치감을 느꼈던 것을 기억합니다. (목사라고 하지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수치감을 주고, 저 역시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세상의 잣대를 버리지 못해 수치감을 느낀 것입니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자랑도 조심해야합니다. (대형교회들) 어떤 교회는 목사의 학력이 높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교회에 의사 변호사가 많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교회당 건물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이런 자랑은 역으로 표현하면 목사의 학력이 높지 못하거나 의사 변호사가 없는 교회나 교회당 건물이 없는 교회는 교회는 수치를 느껴야한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21세기 침례교회는 다른 어떤 조건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교회의 주인되신다는 사실 하나로 자부심을 느끼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목사를 자랑하다면 그 분은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하는 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을 자랑한다면 여러분들이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가 자랑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수치감을 느낀다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자랑하지 않는 것 때문에 서로 애통해 하고 수치감을 느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부득불 내 자랑을 해야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고후11:30)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주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성도들과 교회의 특징이 무엇일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음”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로마성도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8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들에게 바울이 구태여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고백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이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로마교인들 중에 복음을 부끄러워 한 자들이 있었을까?
http://en.wikipedia.org/wiki/Alexamenos_graffito
1857년에 로마의 한 고대 건물 벽에서 1-3세기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과 낙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낙서의 제목은 “자신의 신을 예배하는 알렉사메노스”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만해도 당시 사회에서 모욕의 대상인데, 거기다가 당시의 모욕의 대상인 당나귀의 머리를 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예배하는 장면이며, 결국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 때 당시 기독교인들은 조롱받고 멸시 받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라고 고백한 것은 그 당시 복음에 대한 조롱과 멸시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란 전세계의 중심지, 제국의 수도에 사는 로마시민들에게는 유대라는 식민지의 어느 이름 없는 작은 시골 출신의 한 목수출신의 청년, 그 것도 흉악범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시골 청년을 믿으라는 것은 정말 조롱과 망신을 당할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유대인에게는 비위에 상하는 것으로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사도때뿐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 전에 유대땅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 갈릴리 청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선포하는 것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말도 안되는 것으로 들립니다.
거기다가 다른 종교는 다 구원이 없고 오직 이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증거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지옥의 심판을 경고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든는 자들이 아주 독선적이고 편협한 이야기로 듣게됩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메시지를 전하다가는 따돌림과 무시를 받고 박해까지 받기 쉽습니다. 어떤 면에서 복음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복음 자체를 변경시키고 타협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메세지가 어리석게 들리니까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내용을 바꾸어 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길과 진리 들중에 하나이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지 않고 결국 구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이 편협하고 독선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복음의 진리가 변경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변경시키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듣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메시지로 독선적이고 편협한 메시지로 듣는 다 하더라도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은 부끄러워 하자 않는다는 사실만을 밝히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한 것일까요? 좀더 심각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자체가 그만큼 심각하고 중요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복음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창피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 누가복음 9:26 심각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정말 예수믿고 일생동안 복음증거 한 번 못하고 영혼 한명 구하지 못하고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행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일생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됩니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게을러서 복음을 증거할 생각이나 준비를 전혀 안하거나 아니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둘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듣기에 어리석고 편협하고 독선적인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는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수치감을 극복하고 오히려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고 말도 안되게 여겨지는 이 복음의 능력이란 자격없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골 아주머니같은 어머니를 모른척했다고요. 그런데, 지금 그 때 저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를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창피하게 생각했던 제 자신이 너무나도 수치스럽게 여겨집니다. 지금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 저희 어머니를 무시한다 할지라도, 내가 그 분으로 인해 망신을 당한다 하더라도 저는 이 세상의 그 누구 앞에서도 저희 어머니를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철이들면서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되고 이 세상의 어떤 기준으로도 비교할 수없는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제가 저희 어머니에게 느끼는 그런 심정을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항상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육신의 잣대, 세상적인 기준)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바울도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잣대로 (육신을 따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고 지배하는 삶을 살게된 것입니다. 자신을 그 분의 노예라고 불러도 결코 부끄럽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분만을 자랑하며 그 분을 아는 지식이 가장 귀중해서 그 이전에 귀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그 분을 알기를 원했고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구원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권력이나 학력이나 경제력등을 통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능력들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부도하고 열심히 돈벌고 애씁니다. 이런 능력들은 우리의 문제점도 해결해 주고 우리들의 자존심도 세워주고 우리를 행복하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해결에 불과합니다. (양노원에 가보면 과거에 일류대학 나온 분들 정치인들 갑부들 다 있지만 그들이나 전혀 배우지 못한 분들이나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이나 다 결국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런 인간의 능력들로서는 나로 근본적이고 영원한 변화를 경험케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까? 가장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또한 근본적이고 영원한 변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가져다줍니다. 자기를 예배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살던 자가 주님을 예배하는 삶, 영생의 소망, 삶의 목적과 우선권, 인생관,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다 주고, 나를 부인할 수 있는 능력 , 허망하지 않게 살 수 있는 능력; 감사하게 살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있는 능력, 사랑과 관용과 포용과 인내할 수 있는 능력;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통해 변화된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입니다. )
그런데 왜 우리는 로마교인들처럼 때로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까?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믿는 자의 시제가 무엇입니까? 믿었던 자들에게가 아니라, 믿는 자들입니다. 믿음은 과거의 한 사건이지만 현재적이고 지속적인 것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 - 또 물어봅니다. “구원을 받는"이란 표현의 시제는 무엇입니까? 구원도 과거의 한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구원도 현재시제 입니다.
사도바울의 예를 듭시다. 여러분 생각에는 사도바울은 초인간 적인 수준으로 100% 복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에베소성도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조차도 한눈을 팔면 복음을 담대히 증거못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도바울도 복음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한 눈파느라 복음을 현재적으로 믿고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면, 세상의 영향을 받고 세상적 안목과 가치에 사로 잡혀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이미 믿고 구원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이지만 그들이 지속적으로 그 세대를 본받지 말고 지속적으로 마음을 새롭게하고 지속적으로 변화를 받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이목사님께서 함께 도전하는 삶을 위해서 네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날마다 큐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마주대하기
2. 전도대상자를 귀찮토록 찾아가기
3. 복음자체를 전하기(예수님 믿으십시요. 구원 받으십시요. 내가 증인이요 증거입니다. 나를 보십시요) 4. 기도하기 (식사기도 말고 주님과 나누는 은밀한 대화의 시간)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럼 없이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도록 하나님 말씀과 기도에 충실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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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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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로마서 1:16-17
“(왜냐하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7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표준새번역)
“부득불 내 자랑을 해야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고후11:30)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 습니다. 7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8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롬 1:6-8)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 (누가복음 9:26)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육신의 잣대, 세상적인 기준)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