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는 - 하나님의 의” (로마서 3:21-26) 12/13/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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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들킨 죄인과, 들키지 않은 죄인이 있다고 합니다.. 저나 여러분 이나, 거룩해 보이는 사람이나 악해 보이는 사람이나 다 죄인들이란 이야기입니다. 실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죄인이란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네”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이유입니다. “주머니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어디있느냐 정도로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를 주머니의 먼지로 비유할 때 죄에 대한 심각성은 별로 엿보이지 않습니다. 살다가 보면 누구나 어쩔 수 짓게되는 것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지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진짜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죄를 경솔히 여깁니다. 남의 죄에 대해서는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많고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곧 크리스마가 되 오는데,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란 질문보다도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면, 내가 존재하는 목적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러 온 분입니다. 예수란 이름의 뜻,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입니까? 죄로부터.. 우리 인간들은 죄의 문제를 가볍게 여길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죄의 문제를 그 무슨 문제보다도 심각하게 여긴다는 말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말씀 첫절 로마서 3:21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 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 뒤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예상치 않게 깜짝 쑈처럼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율법과 예언자란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경을 의미하는데, 구약 성경전체가
예수님을 미리 증거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담의 첫 범죄 이 후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구원이란 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경우 우리는 구원이란 말을 사용합니까? 저는 구원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요.
대학생때 혼자 제주도에 가서 바닷가에서 수영하다가 익사할 뻔 한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어떤 아이가 통나무를 내게 보내서 구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물에 빠지거나 혹은 불에 휩싸여서 도저히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데 누군가의 힘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것은 죽을 수 밖에 없고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을 전제로합니다. (죄란 물이나 불처럼 죽음에 관한 문제 -하나님의 심판에) 예수님은 우리를 단순히 도와주는 정도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경히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도움을 받는 정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들로 좀 더 선하고 착한 삶 희생의 삶을 살도록 가르
치시고 본을 보이신 위대한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20세기의 위대한 성인으로 알려진 슈바이쳐박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 슈바이쳐 박사는 박사학위를 다섯개
나 받은 분으로 의사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요 음악가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흑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슈바이처를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예수님을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분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단지 이런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모델이요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하나의 인간 이었습니다. 슈바이쳐 박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사셨지만,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슈바이쳐 박사 뿐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인들이나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기 보다는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여 착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세운 도덕 기준에 따라 얼마나 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악한 사람, 법이 없어도 살 사람등 사람들을 다양하게 평가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열심을 내서 선한 일을 행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기준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인간이 세운 도덕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 기준이요 심판의 원칙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니까 이사야 64:6 우리의 선행조차도 더러운 걸레같다 (filthy rag)라고 기록합니다
단지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우리 마음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심성에 우리 양심을 비교할 때 철저히 부패했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라고 말씀합니다. (렘 17:9) 지성과 감정과 의지 - 전 인격적인 타.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자들 중에도 구원을 추구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자들이 아니라 존경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부자청년도 바리새인도 열심히 율법을 지켰던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율법을 좀 지키니까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자들입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 줄 아세요. 갈 5:4 “율법으로 지키므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나쁜일입니까?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는 생각.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인간의 의의 수준으로 얕보고 인간의 의를 하나님의 의의 수준으로 높이는 죄를 법했습니다. 스스로 무엇인가 행하고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여러분은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교회다니는 것 , 성경보는 것, 남을 도와 주는 것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다 좋은 일이지만. 이런 것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 스스로의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를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정말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묻고싶습니다. 정말 저와 여러분은 자신을 심각한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은 너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서 개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하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들의 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구원의 필요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죄의 심각성과 문제점을 모르거나 인정치 않는다면 우리 죄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또 죄이야기야?라고 생각할 분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저도 왜 이렇게 죄에 대한 문제를 반복해서 말씀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아십시요. 이 세상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눌 수 있는 곳이 교회란 사실입니다. 교회가 남의 죄를 지적하면 망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죄를 서로 고백하며 회개하며 극복해나갈 때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공동체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들킨 죄와 들키지 않은 죄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렸는데. 우리들에게는 들킨 죄보다는 들키지 않은 죄가 비교도 안되게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들키지 않께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이 이미 남편이 있는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되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전쟁터에 있던 그 남편 우리아를 불러들여 부인인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고 임신한 것이 마치 우리아로 인한 것으로 숨기려고 했지만,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동료들을 생각하여 부인 밧세바와 동침하기를 거부합니다. 다윗은 자신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어 살해당하게합니다. 자기 죄를 숨기려고 결국 살인까지 하게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사악한 죄을 보시고 책망하십니다. “네가 나를 멸시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보는데서는 죄를 저지를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는데서는 떳떳하게 죄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 3절은 말씀합니다.“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
또, 우리 자신이 의도적으로 숨기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죄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수 많은 바리새인들처럼 그 누구가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수 많은 종교인들이 열심히 수양하고 선행하면서 자기가 오히려 죄를 짓고 있다고 누가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의 수준을 모르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오히려 교만 죄를 지게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에게는 물론이지만 사람에게도 죄를 짓는지 모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 남을 도와 주면서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말로, 마음 자세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느닷없이 제 말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 여전도회에서 매학기 집에서 떨어져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먹거리를 소포로 보냅니다. 학생들이 대개 감사해합니다. 그런데 먹거리 소포를 매 주 보낸다고 해봅시다. 감사를
잃게되기 쉽습니다. 사실 부모님들은 매일 먹거리 소포를 보내드린 것과 같겠지요. 그런데 같은 부모의 사랑과 돌봄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감사하는 자식이 있는 반면에 불평하는 자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도 안하고 불평도 안한다면 – 무반응이라면, 불효자식 입니까 효자입니까?
아니면 중간입니까? 가만히 있어도 불효자식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크면 클 수록 가만히 있더라도 더 못된 불효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먹거리 소포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을 매초마다 우리에게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치 않더라도 하나님께 무관심하면 마땅히 죽을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므로 범사에 감사..)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감사 안하는 정도 뿐 아니라,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속에 하나님을 제외 시킨지 오래되었습니다. 대신
자신이 스스로 왕노릇 합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으니까,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도 인정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의 편리에 따라 결정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동성연애,
동성 결혼의 문제가 그냥 하는 주장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날이 갈 수록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성경에 이른대로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의)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기를 섬기겠다
는 인간의 교만과 죄성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불리웁니다. 심지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할 진노의 자식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심판을 받아야할 가능성은 100%자신의 힘과 지혜와 노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도 죄문제와 죄의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절망을 느끼십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그러나 이제는 … 이제것 이야기한 것을 반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인간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양심의 법으로도 율법으로도 그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인간의 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죄의 심판에 관한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전되는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로마서 3:21절에 나오는 이 그러나가 성경에 나오는 가장 극적이고 중요하고 위대한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가장 절망적인 소식에서 가장 소망적인 소식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
어떤 역전인가? 21절에 보니까,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가 전혀 예상치 않게 숨겨져 있다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 다시말하면 구약성경 전체가 증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란 주제는 갑자기 등장한 주제가 아니고 성경이 지속적으로 언급한 전체의 핵심주제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주관심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인간의 의는 우리들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행위를 통하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갖게된다고 말씀합니다.)
왜 이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요 구원인가?. 우리는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심판 받을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의를 소유했기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 로마서 1:17절에도 나와있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이 복음인 이유. 복음이 무엇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란 사실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란 사실 속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있다란 말씀입니다. ). 이 것을 3:23 다시 이렇게 설명합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다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표현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속량 – 시장용어 돈을 주고 노예였던 자를 다시 찾아 자신에게 속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댓가를 치루시므로 우리는 이제 죄의 노예가 아니고 예수님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쪽에서는)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26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속죄제물 (화목제물) –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원수였던 자가 속죄함을 받고 화목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신다면 죄인은 죽어 지옥에 가야할 자들인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시면서도 오히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26절에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공의를 어기시지 않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셨고, 또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죄사함과 함께 의롭다함을 얻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을 지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지만, 이 하나님의 의가 내 소유가 되게 하려면, 내가 의롭다 인정함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부모의 말을 믿으면 효자/ 선생님의 말을 믿으면 우등생/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구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기 의에 의존치 마시고 구원을 받으십시요.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간절히 간구합니다. 저와 여러분들 심령속에 성령님이 도우셔서 오늘 들은 이 말씀이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지적으로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으로도 동의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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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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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는 - 하나님의 의” (로마서 3:21-26)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26하나님 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I. 인간의 의
A.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여야할 이유
예수님이 오신 이유/ 구약성경의 주제/구원이란 말의 뜻
B 죄의 문제를 경히 여길 때의 문제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감을 구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개선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의 도덕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의를 구한다.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되려는 생각) 갈 5:4 ”율법으로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C.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인간의 죄
하나님 앞에는 숨겨진 죄가 없고 숨겨진 죄는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다.
깨닫지 못하고 저지르는 죄가 많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돌봄의 크기만큼 이에 대한 무반응도 죄이다
하나님을 제외시키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노릇하는 것이 인간의 죄이다.
D. 인간의 문제점
인간은 죄와 반역으로 하나님의 원수라고 불리우며 진노의 자식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죄로인해 심판을 받아야할 가능성은 100% 이다./ 자신의 힘과 지혜와 노력으로는 의로워질 가능성은 0%이다.
II. 하나님의 의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지만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신다면 우리가 죽어 지옥에 가야할 자들인데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시면서도 오히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가? 그리스도의 피 (속량, 속죄제물)로 말미암아 죄를 심판하셔야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우리의 행위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때문에 의롭다고 인정해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