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로마서 4:1-3 1/1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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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 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4장이 다루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르키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2000년 동안 할례를 행하고 1500년동안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믿어온 이들에게, 이런 것들이 구원에 도움이 전혀되지 못한다고 하니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바울을 지난 1500내지 2000년도안 종교전통을 무시하는 이단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이들을 설득하고저합니다. 4:1 “육신으로 우리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유대인의 관점에서 말함)의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발견했느냐)”
성경의 역사속에 아브라함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창세기를 통하여 세계의 창조역사로 시작해서 인간의 타락과 전세계적인 홍수와 바벨탑 사건등 모든 인류에 해당하는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지기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바꾸게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창세기 기록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 손자인 야곱, 증손자인 요셉 개인들 이야기로 주제가 바꾸어집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유대인들의 조상인 족장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창 12:1-4
왜 아브라함이 이토록 중요한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용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알리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4: 2절은 공동번역으로는 다음과 같이 번연되어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공로가 아닌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본보기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크게 자력종교와 타력 종교로 나누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신의 행위로서 무엇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받는 자력종교인데 반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절대적으로 타력종교입니다. 나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구원받는 종교를 말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받았다든지 특별한 경지에 오르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랑할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라고 먼저 바울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평생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유대인들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말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가르친 복음은 자신이 새롭게 받은 계시나 의견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믿어온 구약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이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해왔습니다: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또 한가지의 의미는 너희는 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왔고 성경을 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을 자세히 보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이 정말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공부하고 믿었어도 성경의 핵심을 이해치 못할 수 있습니다)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원래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 5-6)
무엇을 믿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그의 자손이 별들처럼 많아질 것을 말씀하시므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그 비젼을 다시 기억나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고 ,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살아 있는동안에 이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니지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22:18)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 3:13-14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수 많은 별들은 단지 그의 육적인 자손뿐 아니라 믿음의 자손들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포함해서 예수를 통해 구원받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조상이요. 아브라함은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던 자입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 (요 8:5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란 말씀이 구약성경에 여기 딱 한번 언급되어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행함과 믿음)
하나님과 대면하기 바로 이전에 아브라함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은 10년 전에 하란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면서 600 Km 여정을 거쳐 세겜에 이르렀지만 곧 그 곳을 떠나냐했고 벧엘에 이르러서도 곧 떠나야했습니다.
그가 정착치 못했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미 가나안 족속이 거주하고 있는 땅에 장막을 치면서 겪은 긴장감, 압력 심지어는 위협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네겝에 이르렀지만, 흉년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공포심과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그 곳에서 쫓겨나는 수치심, 그리고 다시 벧엘에서 평생 같이한 롯과 결별하게되면서 느꼈을 배신감과 고독함, 그리고 납치된 롯을 찾아 살리기 위해서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투를 치루어야했던 긴장감과 피로감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지 10년 동안 너무 힘든 여정을 거치면서 나이는 들어 85세가 되어 점점 늙어가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은 아직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부를 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질 조짐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직도 아들이 없어서 가문을 지키며 이어 갈 자도 없고 나이가 늙어 감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대한 소유권도 확보하지 못한 채 주변 민족들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다는 암담한 절망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아브라함이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5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낙망과 좌절감과 불안감과 죄책감에 사로잡였을 뿐 아니라 후손을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에 까지도 흔들리는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별과 약속을 믿었다고 해서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신 하나님. 그런데 그 다음 절7절과 8절을 보면 아직도 의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말씀하시고 곧 16장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16장에 보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왜 과감하게 최종 종착지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떠나 올 때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겼다”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외아들 이삭까지도 과감히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했던 그 때에 하나님꼐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겼다”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만약에 갈바를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났던 사건이나, 외아들 이삭까지도 제물로 드리려던 순간에 하나님꼐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겼다”란 말씀을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겼을 줄 몰라도, 아브라함도 스스로를 자랑하며 교만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2)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자랑할 것이 있는 것은 같이 병행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롬 3:27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방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쓰러지고 실패하고 죄책감과 실망과 낙망과 수치를 행하고 느끼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았다는 그 것 하나때문에, 자랑을 느낄 것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우리가 항상 담대하고 흔들리지 않고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며 그 분의 명령을 충성되이 지키므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격려를 받습니다. 오히려 흔들리며 의심과 싸우고 고민하며 낙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저 하는 것, 나의 신실함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함을 의존하는데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된다는 말씀은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현실 생활에도 큰 격려를 줍니다. 어쩌면 요즘 저와 여러분은 큰 낙망과 좌절에 빠져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를 시작할 때의 비젼은 어디로 가버리고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 교회적으로 기대했던 것들이 무너져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지고 꼭 우리가 공동체를 고집해야하는가 하는 좌절감에 빠질 수 있기때문입니다. 이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고, 의심과 괴로움과 함께 우리 자신을 볼 때 너무 한심할 뿐입니다. 우선 제자신을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이 교회의 비젼이 어떤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포기하게되고 결국 무너지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의 비젼이 우리의 비젼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젼이라면 하나님의 신실하심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고 그의 비젼을 이루어나가실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하나님이 신실하게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을 지켜주시고 세워주셨기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음을 배웁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란 주님의 음성을 들고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든다면 우리 자신이 그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누군가를 통해서리도 그 뜻을 이루실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신실하심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로마서4장이 다루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르키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2000년 동안 할례를 행하고 1500년동안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믿어온 이들에게, 이런 것들이 구원에 도움이 전혀되지 못한다고 하니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바울을 지난 1500내지 2000년도안 종교전통을 무시하는 이단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이들을 설득하고저합니다. 4:1 “육신으로 우리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유대인의 관점에서 말함)의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발견했느냐)”
성경의 역사속에 아브라함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창세기를 통하여 세계의 창조역사로 시작해서 인간의 타락과 전세계적인 홍수와 바벨탑 사건등 모든 인류에 해당하는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지기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바꾸게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창세기 기록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 손자인 야곱, 증손자인 요셉 개인들 이야기로 주제가 바꾸어집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유대인들의 조상인 족장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창 12:1-4
왜 아브라함이 이토록 중요한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용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알리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4: 2절은 공동번역으로는 다음과 같이 번연되어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공로가 아닌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본보기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크게 자력종교와 타력 종교로 나누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신의 행위로서 무엇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받는 자력종교인데 반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절대적으로 타력종교입니다. 나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구원받는 종교를 말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받았다든지 특별한 경지에 오르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랑할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라고 먼저 바울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평생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유대인들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말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가르친 복음은 자신이 새롭게 받은 계시나 의견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믿어온 구약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이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해왔습니다: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또 한가지의 의미는 너희는 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왔고 성경을 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을 자세히 보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이 정말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공부하고 믿었어도 성경의 핵심을 이해치 못할 수 있습니다)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원래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 5-6)
무엇을 믿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그의 자손이 별들처럼 많아질 것을 말씀하시므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그 비젼을 다시 기억나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고 ,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살아 있는동안에 이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니지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22:18)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 3:13-14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수 많은 별들은 단지 그의 육적인 자손뿐 아니라 믿음의 자손들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포함해서 예수를 통해 구원받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조상이요. 아브라함은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던 자입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 (요 8:5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란 말씀이 구약성경에 여기 딱 한번 언급되어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행함과 믿음)
하나님과 대면하기 바로 이전에 아브라함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은 10년 전에 하란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면서 600 Km 여정을 거쳐 세겜에 이르렀지만 곧 그 곳을 떠나냐했고 벧엘에 이르러서도 곧 떠나야했습니다.
그가 정착치 못했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미 가나안 족속이 거주하고 있는 땅에 장막을 치면서 겪은 긴장감, 압력 심지어는 위협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네겝에 이르렀지만, 흉년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공포심과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그 곳에서 쫓겨나는 수치심, 그리고 다시 벧엘에서 평생 같이한 롯과 결별하게되면서 느꼈을 배신감과 고독함, 그리고 납치된 롯을 찾아 살리기 위해서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투를 치루어야했던 긴장감과 피로감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지 10년 동안 너무 힘든 여정을 거치면서 나이는 들어 85세가 되어 점점 늙어가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은 아직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부를 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질 조짐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직도 아들이 없어서 가문을 지키며 이어 갈 자도 없고 나이가 늙어 감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대한 소유권도 확보하지 못한 채 주변 민족들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다는 암담한 절망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아브라함이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5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낙망과 좌절감과 불안감과 죄책감에 사로잡였을 뿐 아니라 후손을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에 까지도 흔들리는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별과 약속을 믿었다고 해서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신 하나님. 그런데 그 다음 절7절과 8절을 보면 아직도 의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말씀하시고 곧 16장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16장에 보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왜 과감하게 최종 종착지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떠나 올 때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겼다”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외아들 이삭까지도 과감히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했던 그 때에 하나님꼐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겼다”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만약에 갈바를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났던 사건이나, 외아들 이삭까지도 제물로 드리려던 순간에 하나님꼐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겼다”란 말씀을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겼을 줄 몰라도, 아브라함도 스스로를 자랑하며 교만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2)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자랑할 것이 있는 것은 같이 병행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롬 3:27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방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쓰러지고 실패하고 죄책감과 실망과 낙망과 수치를 행하고 느끼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았다는 그 것 하나때문에, 자랑을 느낄 것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우리가 항상 담대하고 흔들리지 않고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며 그 분의 명령을 충성되이 지키므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격려를 받습니다. 오히려 흔들리며 의심과 싸우고 고민하며 낙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저 하는 것, 나의 신실함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함을 의존하는데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된다는 말씀은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현실 생활에도 큰 격려를 줍니다. 어쩌면 요즘 저와 여러분은 큰 낙망과 좌절에 빠져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를 시작할 때의 비젼은 어디로 가버리고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 교회적으로 기대했던 것들이 무너져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지고 꼭 우리가 공동체를 고집해야하는가 하는 좌절감에 빠질 수 있기때문입니다. 이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고, 의심과 괴로움과 함께 우리 자신을 볼 때 너무 한심할 뿐입니다. 우선 제자신을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이 교회의 비젼이 어떤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포기하게되고 결국 무너지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의 비젼이 우리의 비젼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젼이라면 하나님의 신실하심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고 그의 비젼을 이루어나가실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하나님이 신실하게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을 지켜주시고 세워주셨기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음을 배웁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란 주님의 음성을 들고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든다면 우리 자신이 그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누군가를 통해서리도 그 뜻을 이루실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신실하심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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