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평화" 로마서 5:1-2 1/1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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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에 미국 역대 복권 사상 최대 당첨금인 약 16억달러가 걸린 복권 당첨자 3명 중 한 명의 신원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5억불 정도의 당첨금을 받게된 것이지요. 당첨된 이 분은 아마도 잠도 잘 못자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할 줄압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수 많은 재산과 특권을 누렸던 다윗, 그러나 그는 그가 과거에 간음하고 살인했던 죄책감에 짓눌려서 “자신의 뼈가 쇠하여 졌다고 고백합니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셀라) 시 32:3-4 그의 재산과 권력이 그의 마음의 평안을 갖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고 “7 Oh what joy, blessed are those 얼마나 복된가! 지은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주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기쁨을 고백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복권당첨보다 더 중요한 복은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이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없다고 인정받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죄인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무엇을 믿음으로 입니까? 오늘 본문 5:1절 바로 전절의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롬 4:25 “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란 이 메시지를 성경은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죄가 용서받고 내가 의롭다 여김을 받는 사실을 신학적인 용어로 전가 (Imputation)라고 말합니다 나의 죄가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전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죄를 지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가 내게로 옮겨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어 내가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본문 1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 골 1:21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자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관계가 된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평화의 관계인가? 변할 수 없는 화평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현재완료형 You have been justified -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좀 더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있다” We have peace with God)
우리가 하나님께 잘 보이면 평화가 유지되고 잘 못보이면 평화가 깨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환경에 따라 변화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마치 , 자식들이 변덕을 부리고 못되게 굴어도 부모님들이 자녀들과의 관계는 변화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 하나님과의 평화된 관계가 우리가 잘나고 착하고 잘보여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에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갖게된 관계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관계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를 의롭다 칭해주신 근거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고, 화평의 근거도 예수님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평화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누려야할 하나님과의 이 회복된 관계를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돤 관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과의 평화란 말씀도 있지만 Peace with God 하나님과의 평화/ Peace of God 하나님의 평화란 말씀도 있습니다. 신약성경 안에는 사도바울이 쓴 편지가 13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사용하는 로마서를 비롯해서 사도바울의 모든 서신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있을 지어다” 란 인삿말로 시작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주님의 은혜와 평안은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 순서가 반드시… 단 한번도 예외가 없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평안을 누릴 수 있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밤에 제자들에게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께서 “나의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시면서도 주님께서 느끼셨던 그런 평안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진작 이 평안을 주시지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제자들이 누리게될 평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것 설명했던 대로) 하나님과의 평안 뿐아니라 하나님의 평안, 주님의 평안도 받았고 누릴 수 있게 되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주님의 평안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지 못할까? 저는 그 이유를 세가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려면 우선 가정 먼저 하나님과의 평안이 당연히 전제 되어야하고 두번째로는 다른 성도들과의 평안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환경을 초월하는 평안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주에 걸쳐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기 위한 이 세가지 종류의 평안을 하나씩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해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과거의 죄떄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치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데도 과거의 죄의식때문에 평안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분 속에 심어 주신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여라” 야고보서 1:21 구원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적용하지 못하다란 뜻으로 해석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로마교회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대로 모르기때문에
이 것은 마치 수 많은 기능을 가진 스마트폰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그 용도를 몰라 제대로 사용치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know what you have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라) 이 것이 성경공부를 하고 설교를 듣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의 혜택과 특권과 의무를 배우지 못한다면 구원만 받았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구원받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것을 누리지 못한다.
히 2:1“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마땅히 우리가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We must pay the most careful attention to what we have heard.” 이미 들은바 구원의 말씀에 최고로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빠져든다고 말씀한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마땅히 우리가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천사들을 시켜 하신 말씀이 효력을 내어, 모든 범죄와 불순종에 공정한 보응이 내렸거든, 3 우리가 이렇게도 귀중한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 어떻게 그 보응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주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이요,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여 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에, 예수님 안에 속한 수 많은 축복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 (골 2:3) 우리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주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 천국백성, 거듭남, 성령님 받음,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심, 하나님과의 평호된 관계 등등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진죄가 계속 괴롭힙니다. 주님만 아시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죄. 수없이 죄를 고백했음에도 어떨 때는 용서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계속 생각나며 마음을 괴롭힙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해보셨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하고 계십니까?)
골 2:1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죄란 뜻은, 모든 죄를 뜻합니다 (He forgave us all our sins).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시기까지 하시며 이토록 용서하시는데 막상 자신은 잊지도 못하고 용서도 못하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임을 기억하십시요.
우리가 용서 받고 싶은 마음보다 더욱 더 간절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고
그 분의 평안을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용서받음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느낌으로 확인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전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도 우리의 느낌으로는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느낌으로 알 수 없었듯이. 이제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화평된 관계 속에 있음에도 느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느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갚아야할 것이나 용서를 구해야할 것은 구하십시요. 그리고, 이제 믿음으로 용서받았음을 받아들이고 선포하십시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받아들였음에도, 죄의식이 여러분을 괴롭힐 때는 감사하십시요.
“주님, 제가 이미 용서 받은 죄를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죄도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죄를 다시 생각나게 해주셔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안도록 결단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2. 현재의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 마티루터가 신부가 되어 수도원에 들어가 수행하는 동안 끊임없는 죄책감과 불만족 가운데 마음의 평안이 없었고 블결한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자 그 수도원장이 화를 내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 찾아오거라. 마틴, 너는 나를 귀찮게 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모르느냐?”
나중에 루터는 죄사함의 확신을 갖기 위해 수도원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헌신했던 이 기간을 영적으로 가장 절망에 빠졌었던 기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나는 구세주이시며 위로자이신 그리스도와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오히려 그 분은 내 영혼을 감옥에 가두는 간수로 그리고 나를 교수대에 매다는 사형수로 여겼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보다는 항상 눈치 보며 좋게 보여야만 하는 무서운 재판관 혹은 시험관으로 여겼던 것입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행위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좌우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자책감과 자기의 완벽주의 때문에 자기를 학대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아니라,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틴루터가 생각했던 것 처럼, 심판관이나 감옥의 간수나 교수대에 매다는 사형수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빠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8] (그러나 하나님은 But God)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한 “그러나 하나님은”구절일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하나님은 그러나..”의 사건, 다시 말하면 십자가 사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처럼 너무 특별하고 놀라운 “하나님은 그러나..”사건은 없습니다.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19-20).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수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그러나 하나님은 ….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되었을 떄에 자기 아들을 보내신 분이십니다. 이제는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용서 못할 때마다 자신을 보지 마시고 “그러나 하나님은”의 그 하나님을 보십시요. 그리고 우리가 현재 서있는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용서받는) 은혜의 자리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치 못하는 이유는) 미래의 죄를 용서바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과거의 죄도 용서하셨고 형재의 죄도 용서하시지만 자신의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하실까 궁금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자신이 변절하지 않을까 중간에 자신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합니까?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은 과거에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자로서,
현재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서있으며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한다"라고 말한다. 이 것은 마치 대학합격 통치서를 받은 학생이 아직 대학생활을 시작 안되었지만, 미래에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게될 자격을 가진것에 대해서 미리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게 되면, 현재에 은혜의 자리에 서있다는 확신도 없게되고 미래에 대한 확신도 갖을 수 없는 것이다. 미래의 소망이 분명치 않게됩니다.
미래의 구원, 미래의 죄의 용서에 관한 문제도 결국 누구를 바라보는 가의 문제입니다. 나의 과거의 구원과 현재의 구원, 나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의 용서가 나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었다면, 아무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그러나 하나님은…: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미래를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증거하신다. “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되었을 때에 일방적으로 죽으셨다. 내가 죄인되었을 때에도 내가 원수되었을 때에도 이렇게 사랑했는데, 내가 의롭다함을 받은 뒤에 구원을 받은 뒤에는 어떤 사랑을 베푸시겠는가. 그의 사랑이 절대로 취소가 안된다.
비록 탕자는 집을 떠났을 찌라도 끝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사도바울처럼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일도, 장래 일도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땅에서는 서지도 걷지도 못하지만, 수영장 안에 들어가면 수영을 할 수 있습니다. 수영장안에는 새로운 법 부력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과거의 죄던 현재의 죄던 미래의 죄던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세상에서 역사하는 죄와 죽음의 법이 적용이 되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법이 과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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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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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평화” 로마서 5:1-2 (1/17/201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1.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수준으로 생각하기때문에 확신 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But God” (그러나 하나님은)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에,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되었을 때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임을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시기까 우리가 용서 받고 싶은 마음보다 더욱 더 간절하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골 2:13 하나님께서는 ...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죄, 다시 말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도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내느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치 못하는 이유는 현재의 죄를 용서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틴루터가 수도원에 있을 때 항상 자책감에 시달려 수도원장에게 죄를 고백하곤했습니다. 구원을 받기 전 그에게는 하나님이 무서운 재판관 혹은 시험관같은 분이었습니다. 내 행위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좌우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책감에 시달려서 하나님의 현재적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롬 5:2).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틴루터가 생각했던 것 처럼,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빠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되었을 떄에 자 아들을 보내신 분이십 니다.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용서 못할 때마다 자신을 보지 마시고 그 하나님을 보십시요. 우리가 현재 서있는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용서받는) 은혜의 자리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치 못하는 이유는 미래의 죄를 용서받을 것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죄는 용서하시지만, 자신의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하실까 불안해 합니다.
자신이 변절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은 현재적으로 은혜의 자리에 서있으며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 을 믿는다면, 나의 미래에도 같은 사랑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결국 누구를 바라보는 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현재일도 장래 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고 고백합니 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과거의 죄던 현재의 죄던 미래의 죄던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세상에서 역사하는 죄와 죽음의 법이 적용이 되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법이 과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