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로마서 12:1 9/7/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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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공동번역)
그런데 지금부터 약 4천년전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즐기던 하란이란 곳에서 잘 정착해서 살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살기 힘든 각박한 가나안 땅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예배자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러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도, 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다백성들을 다시 본토로 이끌으신 것도 그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것도 그리고 세상에 살던 우리를 부르시고 죄에서 구원하신 이유도?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나서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나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대하 16:9)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찾으시는 역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오늘날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을 ‘예배’라 부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 는 모든 행동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배자로서의 삶을 사는가를 알려면, 매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이 내게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라고 권고합니다.(엡 5:10). 예배자로서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까? 물론 성경에 대답이 나와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행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요약한다면 두가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 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13장 우리가 하는 그 어떤 행위도 이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 기쁨을 줄 수가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과 저는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미 지난 번 설교 할 때 나누었지만, 저는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고민을 한적이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나의 갈증과 배고픔이 해결함 받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죽으셨는데, 나는 아직도 목마르고 뭔가 부족함과 허전함을 느끼면서 하루 하루 살고 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좀 더 내가 돈이 있다면, 좀 더 젊다면, 건강하다면, 좀 더 유능하다면 인생의 갈증이 해결되고 좀 더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란 결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소원으로 내 심령이 충만하다면, 어떻게 예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갈증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필요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내 심령이 세상적인 갈증에서 주님을 향한 갈증과 배고픔을 가진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다윗이 고백처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듯한 간절한 심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 답을 그의 고백에서 “여호와의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19:9-10)
우리의 심령은 이상합니다. 우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그 것에 댛ㄴ 갈증이 더 심해집니다. 연속극, 스포츠, 뉴스, 시사 이런 것을 읽거나 보면 볼 수록 더욱 이에 대한 갈증이 생기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우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갖게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보니까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로마서 12:1 예배자로서의 조건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크심을 깨달아야합니다.
1.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호세아 6:6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란 예배행위 자체보다는 성도들이 자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또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제사는 드렸지만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매주마다 예배의식에 참여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포이어바흐라는 약 150년 전의 유명한 무신론자가 “지금 기독교인이 섬기는 신은 자기 입맛대로 신을 만들어 그걸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 가짜라는 겁니다. 이 분은 무신론자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 분의 평가가 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나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들이 스스로 상상으로 그린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예배행위 자체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주일날 예배모임에 참여하므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 하나님을 알므로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있는 자, 주일에도 주중에도 예배자로서의 삶을 사는 자를 말합니다.
다윗뿐 아니라 모든 참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고, 하루 종일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자들입니다. 에스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7), 성전 성가대 지휘자였던 아삽은 "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시 77:12) 라고 고백합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 일용할 양식보다 그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욥 23:12)라고 시인합니다.
사도바울이 그토록 주님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빌 3:8)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목숨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고전 2:2)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진정한 예배자냐? 오늘 내가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얼마나 알아가느냐로 결정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만큼만 그 분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란 고백이 나올 때에 진정으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매주 예배의식에 참여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데 우선권을 두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제 자신과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만족을 추구 하면서 사는 자들이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가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는 세상적이요 공허한 대화를 할 수 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자들만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롬 12:1)
2. 진정한 예배자는 드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받으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려고 나가는 것이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물론, 예배자로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과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자체가 예배는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해서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삶을,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재물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영어로 worship -worth 가치란 뜻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가치를 하나님의 중요성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시간과 소유, 재능, 노력등을 기꺼이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이심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란, “주님, 주님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란 고백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드리느냐로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므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한 여인은 향유옥합을 깨드려 주님께 드리므로 주님을 예배했던 여인처럼, 예배란
내가 쓰다 남은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다 남은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다 남은 재능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다 남은 건강을 젊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우선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아벨처럼 첫 양새끼를 드리는 우선권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무 소산이나 드리므로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진정한 예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그래서 다윗은 땅과 제물로 드릴 소와 장작을 공짜로 드리겠다는 “아라우나”에게 "내가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지 않겠다" (삼하24:24,)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무엇을 드리므로 그리고 어떻게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분임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나의 전부입니다란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물질이던 시간이던 젊음이던 건강이던 자녀들이던 재능이던 우선권을 드리십시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자기 중심성 (self-centeredness)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자의 수준은 우리가 서로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1요 3:16)
그러나 우리의 참 모습이 어떻습니까? 지금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임에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 서로 양보 못하는 자들로 그득 차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분임을 보여드리는 것이 예배요, 예수님이 나의 전부란 고백이 예배라면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란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하라는 화해하라는 사랑하라는 그 분의 명령을 순종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예배자가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제사를 드리기 전 화해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시도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조차 없이 예배를 계속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심지어 분노를 촉발하는 것이었습니다 . 차라리 성전문을 닫아 걸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요구를 하실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에게는 자녀들이 서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김유니스 자매 다니엘 자랑; 서민선 자매님 승현이 자랑) 하나님의 심정은 그분의 자녀들이 서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그렇게 아니 그 이상으로 바라실 것입니다.
화해를 위하여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항상 편리하고 편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의지를 필요로합니다..
마지막 포인트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본문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롬 12:1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3.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므로: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제사가 있듯이, 오늘날도 우리들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 역시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있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예배가 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 참여자가 예배모임 중 감동을 많이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느끼며 하나님의 임재함을 느끼면 성공한 예배모임입니까? 그리고 이런 느낌과 경험을 하지 못하면 마치 헛된 예배를 드린 것입니까?
예외 없이 예배모임을 마친 뒤에, 오늘 예배모임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좋아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 우리 인간이 보고 느끼기에 어떻게 느꼈느냐를 말합니다. 사실은 하나님만이 예배모임의 유일한 관객이 되고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관객노릇을 하고 우리가 어떻게 느꼈느냐가 예배모임에 대한 평가로 남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이면에서 오류를 많이 범합니다.)
예배모임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함을 느끼게 해달라고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기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내가 무엇인가 경험하는 것을 앞세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보다는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예배모임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설교말씀이나 찬양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나란 사실 보다는, 내 감동받음 여부에 상관 없이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내 자신을 복종시키는 자세가 사실 더 중요합니다. 실지로 설교나 찬양 등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다고 해도 그 것에 대한 아무런 결단과 헌신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느끼기보다 신뢰하는 것 그 분에게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것이라고 말씀했지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이 예배에도 적용됩니다. 내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거나, 혹 내 삶에 그분의 역사하심의 가시적인 증거가 없을 때에도 나는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닌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대로 그 분의 임재하심을 느끼든 느끼지 않던 그분이 이 곳에 함께 하신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끼는 것은 감정이고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것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주님을 예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시간을 기도해도 수년을 기다려도 아무런 응답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수있습니다. 오히려 감정이 냉냉해지는 것을 발견할수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가졌던 가장 큰 공포: 내가 정말 주님을 필요로 한 순간에 침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것이 불과 몇번 안됩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이 후에 13년이 흘러서야 이삭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욥기 37장 동안 하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떤 중국 목사님이 중국감옥에서 17년 동안 갖히어 있으면서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를 간증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겠 습니까? 그러나 그는 풀려 나오지 못하고 계속 감옥에 갖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어두운감옥에 갖여서 항상.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하신 말씀에 대해 어둠속에서 의심하지 말라." 란 말을 되뇌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앞으로 나의 모든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삶에 인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이 사실만으로도 그분은 우리의 남은 삶 동안 찬양과 예배와 감사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란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없음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분의 임재하심을 선포하며 그분에게 무엇을 드릴가를 염려하면서 살아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갖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버리셨다.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찬양해야 한다. 다시는 무엇에 대해 감사해야 할지 고민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던 느끼지 않던 기쁨이 있던 없던 하나님을 항상 예배하는데 충분한 조건이 되어야할 것이다.”
주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알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내 중심적인 속성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자로서 내가 무엇을 느끼는가 보다는, 감동을 추구하기 보다는 내가 어떻게 헌신할까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까에 촞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평생 빚진자로서 평생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삶, 그리고 드리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를예배자로 불러주시고 훈련시키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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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공동번역)
1.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므로:“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로마서 12:1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나는 내 일용할 양식보다 그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욥 23:12
2.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므로: ”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롬 12:1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내가 꼭 값을 지불하고서 사겠소. 내가 거저 얻은 것으로 주 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는 않겠소.” 삼하 24:24
3.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히 11:6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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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더 예배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갖게된 것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야 말로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갈증과 열망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준비임을 깨닫게 하신 것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함이란 "하나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란 깨달음과 감격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 없이 주신 그 은혜에 평생을 드려 아니 죽음 이 후에도 이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예배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단했다"고 고백한다. "내 은혜가 네가 필요한 전부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은혜을 알고 또 알고 감격하고 또 감격하는 삶이 예배자의 모습이다.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사랑이 내가 필요한 전부입니다"란 자세가 예배자의 자세라면, 예배자는 무엇을 주님께 더 바라는 것처럼 얻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던 그 무엇이던 내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귀중한 분인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한번은 내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할 인정을 못 받는 듯하여 하나님께 원망 비슷한 조로 호소한 적이 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내 외아들을 주었건만 그 것 가지고도 부족하단 말이냐?" 그 말씀에 통곡하며 회개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도 또 계속적으로 그 크신 은혜를 잊곤 하지만)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드리되 그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나의 자아를 내어 놓는 것이 내가 주님께 드려야할 바임을 깨닫는다. 내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권리, 자존심까지 내놓을 수있는 자세가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이다. 그리고 화해하기 위해서 먼저 내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세도 포함된다.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자세가 예배자로서의 자세이다.
평생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배자는 자신의 느낌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로서는 그것이 예배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지극히 아름다운 감동까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드리는 나의 헌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의 감동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비로운 경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주님이 이미 베푸신 은혜로 족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위해 죽으신 사실 만으로도 그분은 나의 남은 삶 동안 찬양과 예배와 감사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고백"이 예배자의 고백이다. 앞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주님이 이미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그 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이에 따른 합당한 헌신을 드리고저 하는 자세로 예배모임과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