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이해, 화해 / 여호수아 22:7-12 (한순홍 목사, 0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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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여호수아 22:7-12
제목: 오해, 이해, 화해
날짜: 7/7/13
김동인의 단편소설 “배따라기”(배 떠나기) - 어부 형제 사이의 오해
“난 당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해요” - 부부지간에 정말 그럴까요?
“당신은 무지개 같아” - 말을 액면 그대로 알아들을까요?
살다보면 자그마한 오해가 자칫 큰일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해의 발단은 언제나 상대방의 의도를 알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한나는 자식 없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입술만 중얼중얼하면서 기도하자 엘리 대제사장은 “대낮부터 웬 술이냐? 술을 끊으라!”고 했습니다. 한나가 받은 오해입니다. 오해는 남녀노소, 직분에 관계가 없습니다.
여호수아 22장에서는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었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서편으로 함께 건너와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중에 쌓았던 단을 통해 생긴 오해와 이의 해명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화해한 후 더욱 돈독해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도 성도 사이나 충성된 사람들 사이에 이런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기 전에 이미 모세시대에 요단강 동편의 이스라엘이 머물렀던 지역인 모압 평지가 있는 곳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었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나머지 지파들의 가나안 정복에 동참하기 위해 요단강 서쪽 땅에 와서 함께 전쟁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이 동편의 사람들은 신실하게 그들의 책임을 이행했습니다. 그들의 처자와 부모를 동쪽에 남겨두고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싸웠고 서편 지파들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충성스럽고 신실하게 생명을 걸고 도왔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와 신앙과 공동체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 정복의 대역사가 마무리되고 이제는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야할 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제 그 동안 자신들과 함께 요단 서편에 들어와 수고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들에게 그동안의 수고를 칭찬 치하하며 그들에게 이제는 수많은 전리품과 함께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합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이 앞으로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간곡하게 당부하였고 그런 후 그들을 축복하여 보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6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모습도 아름답고 그들을 위해 마음껏 축복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습 역시 마찬가집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서로를 축복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그런데 본문 10절 이하를 보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갑자기 무엇인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10절)
얼마 후에 요단강 동편 땅으로 돌아간 2지파 반이 요단강 저편에 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요단강 서편 가나안 땅을 차지한 나머지 지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12절)
도대체 요단강 건너 동쪽 저편에 단을 쌓은 것이 무엇이라고 이 난리가 난 것일까요?
도대체 요단강 동편 지파의 사람들은 왜 거기에 단을 쌓은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제단에 관하여 말씀하신 분명하고 엄연한 사실이 있습니다. 신명기 12:13절 이하에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은 “여호와가 선택하실 오직 그 한 곳에서만”이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일치를 위해 일 년에 세 번은 여호와의 장막에 와야 했습니다.
또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브올의 죄악과(민25장), 아간의 범죄로 인한 교훈을(수7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다 줄 것에 대한 결론을 불을 보듯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수 22:16-20)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바알 브올의 사건'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의 간교한 술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게 절하고 그 앞에서 범죄한 일이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일이 쓰라린 아픔처럼 기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어떤 우상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는지 모릅니다.
여호수아 7장에 기록된 여리고성 정복 후 아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몫으로 챙겨가는 것이었습니다. 불신하고 속이고 숨기고 거짓하고 ……. 그 결과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고 수십 명의 군사들이 죽고 백성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온 이스라엘에 의해 아간은 아골 골짜기라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래서 요단 서편의 사람들은 매우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해도 이것은 동편 사람들이 영적인 죄를 범했다고 단정하게 되었고 이 행위를 반역이라 생각하여 분노하고 그들과 전쟁할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말씀과 경험에 비추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진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을 도와 싸워준 고마운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그들의 신앙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정복전쟁에 함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들이니까 웬만한 실수나 잘못은 눈감아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이스라엘은 이 두 가지 일을 기억하고 지금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당시의 범죄를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범죄의 싹을 뽑아버리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관계의 파악보다 자기편에서의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자기편에서의 이해였기에 겉으로는 의로운 결론이었지만 사실은 오해를 한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해명을 하게 되는 것이 여호수아 22장의 뒷부분입니다. (21-34절)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 당황했습니다. 더군다나 동족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이니 두말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느니라 하여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 번제와 우리 다른 제사와 우리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으로 후일에 우리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다 못하게 하려 함이로라" (수 22:24-27)
이 단은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기 위한 단이 결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단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아홉 지파 반과 두 지파 반이 동서로 나뉘어 살아가게 될 상황을 당대보다 후손들 간의 관계를 염려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 언덕 가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큰 단을 쌓아놓고 이것을 동서간의 하나 됨의 징표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두 지파 반의 생각은 상대방에게 좋은 의미로 전달되었습니다. 오해가 풀어지고 사건의 사연이 이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진정되었습니다. 동서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호수아 22장의 마지막절인 34절 말씀은 이 모든 상황이 종료한 이후의 기록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34)
전쟁이 일어날 직전까지 갔던 위기의 상황이 마감되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들은 자신들이 쌓은 단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이 '엣'입니다. 히브리어로 '엣'이란 뜻은 '증인' 또는 '증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이 단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요단강 서편에 있는 지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나만의 이해는 오해를 부르고 불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오해의 제공자는 적극 해명하여 이해를 도와야 하며 오해한 사람들은 해명을 듣고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가 일어납니다. 섣부른 단정, 판단, 자기만의 해석은 금물입니다. 신중하게 심사숙고하여 배려해야 하는데 자신의 오감이나 감정이나 생각으로 내린 결론을 그것이 오해임에도 마치 진실인양 붙들고 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생활이 때로 실패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와 같은 섣부른 판단이나 오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았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들인 동족끼리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서로 축복하는 사이지만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도 오해는 생길 수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 자기만의 해석, 감정에 의존하면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오해가 생기면 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해명하고 경청하면 이해할 수 있고 화해가 됩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분노한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표들을 보내서 자초지종을 듣고 오도록 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두령 10명, 13-14절) 그들은 보다 신중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결국 요단 동편의 사람들이 자기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로 그 일을 하였다는 것들 듣고 모두가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중함은 이해를 돕고 오해와 분열을 막는 도구가 됩니다. 만일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을 쌓았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을 시작했다면 이스라엘은 찢겨져서 흔적조차 없어지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신중함은 더욱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이처럼 화해는 사람들을 더욱 돈독한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삶에 더욱 활력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오해나 분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고 화해를 이루어 간다면 이야말로 복된 일입니다. 하나 되는 힘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푸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로 풀어 가는 것입니다. 화해하는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들입니다.
“오해가 생기면 신중함으로 접근하십시오. 신중함은 오해로 인한 불화, 분쟁,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화해하면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8: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8)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4:5)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습니다.
상대편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화해하였습니다.
공동체가 회복되었습니다.
제목: 오해, 이해, 화해
날짜: 7/7/13
김동인의 단편소설 “배따라기”(배 떠나기) - 어부 형제 사이의 오해
“난 당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해요” - 부부지간에 정말 그럴까요?
“당신은 무지개 같아” - 말을 액면 그대로 알아들을까요?
살다보면 자그마한 오해가 자칫 큰일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해의 발단은 언제나 상대방의 의도를 알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한나는 자식 없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입술만 중얼중얼하면서 기도하자 엘리 대제사장은 “대낮부터 웬 술이냐? 술을 끊으라!”고 했습니다. 한나가 받은 오해입니다. 오해는 남녀노소, 직분에 관계가 없습니다.
여호수아 22장에서는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었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서편으로 함께 건너와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중에 쌓았던 단을 통해 생긴 오해와 이의 해명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화해한 후 더욱 돈독해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도 성도 사이나 충성된 사람들 사이에 이런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기 전에 이미 모세시대에 요단강 동편의 이스라엘이 머물렀던 지역인 모압 평지가 있는 곳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었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나머지 지파들의 가나안 정복에 동참하기 위해 요단강 서쪽 땅에 와서 함께 전쟁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이 동편의 사람들은 신실하게 그들의 책임을 이행했습니다. 그들의 처자와 부모를 동쪽에 남겨두고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싸웠고 서편 지파들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충성스럽고 신실하게 생명을 걸고 도왔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와 신앙과 공동체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 정복의 대역사가 마무리되고 이제는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야할 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제 그 동안 자신들과 함께 요단 서편에 들어와 수고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들에게 그동안의 수고를 칭찬 치하하며 그들에게 이제는 수많은 전리품과 함께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합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이 앞으로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간곡하게 당부하였고 그런 후 그들을 축복하여 보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6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모습도 아름답고 그들을 위해 마음껏 축복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습 역시 마찬가집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서로를 축복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그런데 본문 10절 이하를 보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던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갑자기 무엇인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10절)
얼마 후에 요단강 동편 땅으로 돌아간 2지파 반이 요단강 저편에 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요단강 서편 가나안 땅을 차지한 나머지 지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12절)
도대체 요단강 건너 동쪽 저편에 단을 쌓은 것이 무엇이라고 이 난리가 난 것일까요?
도대체 요단강 동편 지파의 사람들은 왜 거기에 단을 쌓은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제단에 관하여 말씀하신 분명하고 엄연한 사실이 있습니다. 신명기 12:13절 이하에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은 “여호와가 선택하실 오직 그 한 곳에서만”이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일치를 위해 일 년에 세 번은 여호와의 장막에 와야 했습니다.
또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브올의 죄악과(민25장), 아간의 범죄로 인한 교훈을(수7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다 줄 것에 대한 결론을 불을 보듯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수 22:16-20)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바알 브올의 사건'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의 간교한 술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게 절하고 그 앞에서 범죄한 일이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일이 쓰라린 아픔처럼 기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어떤 우상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는지 모릅니다.
여호수아 7장에 기록된 여리고성 정복 후 아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몫으로 챙겨가는 것이었습니다. 불신하고 속이고 숨기고 거짓하고 ……. 그 결과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고 수십 명의 군사들이 죽고 백성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온 이스라엘에 의해 아간은 아골 골짜기라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래서 요단 서편의 사람들은 매우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해도 이것은 동편 사람들이 영적인 죄를 범했다고 단정하게 되었고 이 행위를 반역이라 생각하여 분노하고 그들과 전쟁할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말씀과 경험에 비추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진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을 도와 싸워준 고마운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그들의 신앙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정복전쟁에 함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들이니까 웬만한 실수나 잘못은 눈감아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이스라엘은 이 두 가지 일을 기억하고 지금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당시의 범죄를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범죄의 싹을 뽑아버리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관계의 파악보다 자기편에서의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자기편에서의 이해였기에 겉으로는 의로운 결론이었지만 사실은 오해를 한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해명을 하게 되는 것이 여호수아 22장의 뒷부분입니다. (21-34절)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 당황했습니다. 더군다나 동족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이니 두말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느니라 하여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 번제와 우리 다른 제사와 우리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으로 후일에 우리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다 못하게 하려 함이로라" (수 22:24-27)
이 단은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기 위한 단이 결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단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아홉 지파 반과 두 지파 반이 동서로 나뉘어 살아가게 될 상황을 당대보다 후손들 간의 관계를 염려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 언덕 가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큰 단을 쌓아놓고 이것을 동서간의 하나 됨의 징표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두 지파 반의 생각은 상대방에게 좋은 의미로 전달되었습니다. 오해가 풀어지고 사건의 사연이 이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진정되었습니다. 동서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호수아 22장의 마지막절인 34절 말씀은 이 모든 상황이 종료한 이후의 기록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34)
전쟁이 일어날 직전까지 갔던 위기의 상황이 마감되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들은 자신들이 쌓은 단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이 '엣'입니다. 히브리어로 '엣'이란 뜻은 '증인' 또는 '증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이 단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요단강 서편에 있는 지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나만의 이해는 오해를 부르고 불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오해의 제공자는 적극 해명하여 이해를 도와야 하며 오해한 사람들은 해명을 듣고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가 일어납니다. 섣부른 단정, 판단, 자기만의 해석은 금물입니다. 신중하게 심사숙고하여 배려해야 하는데 자신의 오감이나 감정이나 생각으로 내린 결론을 그것이 오해임에도 마치 진실인양 붙들고 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생활이 때로 실패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와 같은 섣부른 판단이나 오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았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들인 동족끼리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서로 축복하는 사이지만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도 오해는 생길 수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 자기만의 해석, 감정에 의존하면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오해가 생기면 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해명하고 경청하면 이해할 수 있고 화해가 됩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분노한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표들을 보내서 자초지종을 듣고 오도록 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두령 10명, 13-14절) 그들은 보다 신중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결국 요단 동편의 사람들이 자기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로 그 일을 하였다는 것들 듣고 모두가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중함은 이해를 돕고 오해와 분열을 막는 도구가 됩니다. 만일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을 쌓았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을 시작했다면 이스라엘은 찢겨져서 흔적조차 없어지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신중함은 더욱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이처럼 화해는 사람들을 더욱 돈독한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삶에 더욱 활력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오해나 분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고 화해를 이루어 간다면 이야말로 복된 일입니다. 하나 되는 힘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푸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로 풀어 가는 것입니다. 화해하는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들입니다.
“오해가 생기면 신중함으로 접근하십시오. 신중함은 오해로 인한 불화, 분쟁,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화해하면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8: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8)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4:5)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습니다.
상대편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화해하였습니다.
공동체가 회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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