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201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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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전도서 11:9-12:2
오늘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에게 경사가 있습니다. 세분의 성도님들의 합동회갑잔치 날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저는 이 세분과 여러 해를 함께 했습니다. 박사라성도님과는 같은 아파트 건물에서 산지 10년이 됩니다. 노영희 목자님과는 17년 전에 만나서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또 함께 교회를 개척하며 주안에서 뜻 깊은 삶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최희주성도님은 제가 40대에, 최희주성도님 30대 중반에, 어떤 성경공부 모임에서 처음 만나 주안에서 교제를 나누지 사반세기가량 되었습니다.
이 세분 성도님들은 제 눈에는 전혀 변함이 없어보입니다마는 세월의 흐름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세월이란 그야말로 날아가듯이 지나갑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많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회갑을 맞으시는 세분 성도님들 자신도 참으로 많은 기억이 있을 것이고 가족들과 온 성도들 또한 그분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기억력이 뛰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전적으로 그 삶을 좌우하게 됩니다. 무엇을 머리에 간직하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느냐하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 그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은 전도서 기자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12:1-2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2)
오늘 회갑을 맞으시는 세분도 그렇지만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어떤 한계점이 있습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고,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인생의 저녁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와 함께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것이 “너의 창조자”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억하라.” 라는 말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래의 구절들에 나타나는 권념, 생각, 기억...등등의 단어들은 모두 히브리어 “자카르” 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예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창세기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세기 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
삼상 1:10 한나가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국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중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
삼상 1:19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
출애굽기 2:24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여기에서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단순이 머리속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할 계획을 가지고 그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 한나, ... 누구나 할 것 없이 무엇인가 당신께서 이루실 계획을 가지시고 그 심정을 깊이 헤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는 말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계획과 결단을 가지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드릴까?
- 지금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실까?
여러분,
우리 인생들을 생각(기억)을 많이 하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생각들이 자기중심적인 것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근심과 염려가 많고 또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합니다.
-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책임합니다.
- 결국 하나님께도 무책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지않고 자신을 주장하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자신이 어떠한 처지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없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대해서도 무책임합니다. 창조자 하나님께 무책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억지않는 그 순간 아담은 제멋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죄의 삶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죄인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타인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무책임합니다.
자기를 파괴시키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모습이고 우리 인생 각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무책임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하나님은 우리에 포괄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
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3:16-17)
아담은 선악과만 빼고 모든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포괄적인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의 계명은 아담이 “자기의 창조자”를 기억하는 증표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도 하나님은 포괄적인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절대적인 평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고 경고가 곧 그것입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은 모든 것을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는 유명한 구절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야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기초로 내 인생을 재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잣대로, 우리의 기준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자신을 평가해 왔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속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오늘 현재 이렇게 사는 나는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5) 일찍이 주님은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우리 인생들은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인생길을 헤메고 있는 것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의 아담이 하나님께 그러하듯이 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변호하며, 자기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죄인의 후예들은 오늘도 스스로를 포장하고 죄의 그늘에 숨어 있습니다.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가 아니다. 나는 이런대로 괜찮다. 나는 나름대로 평안하다고, 곧 편해 질 것이라고, 뭔가 이루겠다고, 또 이루어 가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솔로몬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으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고, 가장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생을 산 솔로몬이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헛됩니다. 제 자신이 60평생을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이것을 스스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떠나버린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는 말년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 많은 처들과 첩들의 충동을 따라서 이방신을 섬기는 멸망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자를 기억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어제 저는 아내와 한인타운을 다녀왔습니다. Freeway를 달리면서 보니 모든 교각 하나하나 마다 빠짐없이 지저분한 낙서로 가득했습니다. 벽이란 벽은 모조리 낙서투성이입니다. City에서 낙서를 지운자국이 있는데 그 위에 또 낙서를 했더군요. 이것이 현재의 미국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점점 쇠퇴해가는 대국의 모습입니다. 미국이 망해가는 소리가 가슴 속에서 들립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되 계속적으로 기억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창조자와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헛되고, 헛되고, 진정 헛된 것들을 추구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교회들도 예외는 아닌 듯 합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이 그랬던 것처럼 물질주의, 형식주의,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형국은 아닌지 심각하게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돌아볼 때라고 생각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느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1-2)
3-8절의 말씀은 모든 것이 다 끝나는 때를 뜻합니다. 즉 우리의 인생이 시들어지고 결국은 끝날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 우리의 몸과 영혼, 우리의 인생이 시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7)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Meaningless! meaningless! says the Teacher, "Everything is meaningless.
헛되고 헛된 것을 가지고 근심하며 악을 행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헛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는 우리의 모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저의부부와 노목자님 내외분과 그리고 최희주성도님이 함께 어떤 젊은 선교사님의 천국환송예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작년에 그가 52세 되었을 때 모든 생업을 정리하고 부인과 중국으로 건너가서 선교사역에 헌신했습니다. 특히 탈북자와 이북에서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노영희목자님의 남동생의 찬구이며, 또 제가 LA 한인침례교회 대학부교사를 할 때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세상사람들과 같이 사업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충성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기억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평범해 보이는 인생을 살았지만 진정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환송예배에서 낭독된 말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을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배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 후서 4:7-8)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중심으로 인생을 산 사람들을 하나님은 친히 기억하시고 끝날 곧 심판 날에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바울에게 뿐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며 만나 뵈올 날을 사모하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기억하는 자들을 기억하십니다.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며 창조의 섭리입니다.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그분을 중심으로 인생을 새롭게 편성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사람을 창조자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자를 기억할 때 말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 13:5)
오늘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에게 경사가 있습니다. 세분의 성도님들의 합동회갑잔치 날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저는 이 세분과 여러 해를 함께 했습니다. 박사라성도님과는 같은 아파트 건물에서 산지 10년이 됩니다. 노영희 목자님과는 17년 전에 만나서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또 함께 교회를 개척하며 주안에서 뜻 깊은 삶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최희주성도님은 제가 40대에, 최희주성도님 30대 중반에, 어떤 성경공부 모임에서 처음 만나 주안에서 교제를 나누지 사반세기가량 되었습니다.
이 세분 성도님들은 제 눈에는 전혀 변함이 없어보입니다마는 세월의 흐름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세월이란 그야말로 날아가듯이 지나갑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서로 많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회갑을 맞으시는 세분 성도님들 자신도 참으로 많은 기억이 있을 것이고 가족들과 온 성도들 또한 그분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기억력이 뛰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전적으로 그 삶을 좌우하게 됩니다. 무엇을 머리에 간직하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느냐하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 그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은 전도서 기자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12:1-2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2)
오늘 회갑을 맞으시는 세분도 그렇지만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어떤 한계점이 있습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고,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인생의 저녁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와 함께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것이 “너의 창조자”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억하라.” 라는 말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래의 구절들에 나타나는 권념, 생각, 기억...등등의 단어들은 모두 히브리어 “자카르” 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예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창세기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세기 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
삼상 1:10 한나가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국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중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
삼상 1:19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
출애굽기 2:24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여기에서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단순이 머리속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할 계획을 가지고 그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 한나, ... 누구나 할 것 없이 무엇인가 당신께서 이루실 계획을 가지시고 그 심정을 깊이 헤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는 말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계획과 결단을 가지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드릴까?
- 지금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실까?
여러분,
우리 인생들을 생각(기억)을 많이 하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생각들이 자기중심적인 것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근심과 염려가 많고 또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합니다.
-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책임합니다.
- 결국 하나님께도 무책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지않고 자신을 주장하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자신이 어떠한 처지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없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대해서도 무책임합니다. 창조자 하나님께 무책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억지않는 그 순간 아담은 제멋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죄의 삶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죄인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타인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무책임합니다.
자기를 파괴시키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모습이고 우리 인생 각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무책임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하나님은 우리에 포괄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
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3:16-17)
아담은 선악과만 빼고 모든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포괄적인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의 계명은 아담이 “자기의 창조자”를 기억하는 증표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도 하나님은 포괄적인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절대적인 평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고 경고가 곧 그것입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은 모든 것을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는 유명한 구절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야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기초로 내 인생을 재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잣대로, 우리의 기준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자신을 평가해 왔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속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오늘 현재 이렇게 사는 나는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5) 일찍이 주님은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우리 인생들은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인생길을 헤메고 있는 것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의 아담이 하나님께 그러하듯이 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변호하며, 자기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죄인의 후예들은 오늘도 스스로를 포장하고 죄의 그늘에 숨어 있습니다.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가 아니다. 나는 이런대로 괜찮다. 나는 나름대로 평안하다고, 곧 편해 질 것이라고, 뭔가 이루겠다고, 또 이루어 가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솔로몬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으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고, 가장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생을 산 솔로몬이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헛됩니다. 제 자신이 60평생을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이것을 스스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떠나버린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는 말년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 많은 처들과 첩들의 충동을 따라서 이방신을 섬기는 멸망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자를 기억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어제 저는 아내와 한인타운을 다녀왔습니다. Freeway를 달리면서 보니 모든 교각 하나하나 마다 빠짐없이 지저분한 낙서로 가득했습니다. 벽이란 벽은 모조리 낙서투성이입니다. City에서 낙서를 지운자국이 있는데 그 위에 또 낙서를 했더군요. 이것이 현재의 미국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점점 쇠퇴해가는 대국의 모습입니다. 미국이 망해가는 소리가 가슴 속에서 들립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되 계속적으로 기억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창조자와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헛되고, 헛되고, 진정 헛된 것들을 추구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교회들도 예외는 아닌 듯 합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이 그랬던 것처럼 물질주의, 형식주의,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형국은 아닌지 심각하게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돌아볼 때라고 생각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느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1-2)
3-8절의 말씀은 모든 것이 다 끝나는 때를 뜻합니다. 즉 우리의 인생이 시들어지고 결국은 끝날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 우리의 몸과 영혼, 우리의 인생이 시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7)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Meaningless! meaningless! says the Teacher, "Everything is meaningless.
헛되고 헛된 것을 가지고 근심하며 악을 행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지 않고 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헛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는 우리의 모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저의부부와 노목자님 내외분과 그리고 최희주성도님이 함께 어떤 젊은 선교사님의 천국환송예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작년에 그가 52세 되었을 때 모든 생업을 정리하고 부인과 중국으로 건너가서 선교사역에 헌신했습니다. 특히 탈북자와 이북에서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노영희목자님의 남동생의 찬구이며, 또 제가 LA 한인침례교회 대학부교사를 할 때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세상사람들과 같이 사업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충성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기억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평범해 보이는 인생을 살았지만 진정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환송예배에서 낭독된 말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을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배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 후서 4:7-8)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중심으로 인생을 산 사람들을 하나님은 친히 기억하시고 끝날 곧 심판 날에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바울에게 뿐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며 만나 뵈올 날을 사모하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기억하는 자들을 기억하십니다.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며 창조의 섭리입니다.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그분을 중심으로 인생을 새롭게 편성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사람을 창조자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자를 기억할 때 말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