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나님의 사랑( 201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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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3:16-21
오늘은 음력설입니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구정을 큰 명절로 지냅니다. 중국에서는 이날을 “춘절”(春節)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명절입니다.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가지고 또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또한 오늘은 Valentine's Day입니다. 3세기에 살았던 Valentinus라는 사제로부터 비롯했다고 합니다. 정복전쟁을 해야 하는 로마로서는 병사들이 가족을 가지는 것이 전투력에 부담이 된다하여 황제의 특명으로 군인들의 결혼을 금지했답니다. 이를 부당하게여긴 Valentinus 사제가 비밀리에 결혼을 주례하다가 잡혀서 사형된 날이 바로 오늘이랍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은 개인적으로 저와 아내가 첫 번째 교회의 개척예배를 드린 날로서 오늘로서 만 28주년이 되는 저희들의 기념일입니다. 이제 앞으로 20년을 새로운 각오와 마음으로 주님 앞에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그 때까지 제가 살아있을지는 모르지만 계획은 그렇습니다. 85세까지는 도전적으로 사역에 임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사역에 뛰어들게 되었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싫어 버리고 싶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또 그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인생의 목적이 되었기에 목회의 길에 투신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스스로를 던지신 것 같이,
- 그리고 죄 많은 저의 인생을 더럽다하지 아니하시고 내 속에 자신을 던져
들어오신 것 같이,
- 저 또한 예수님의 발 앞에 저 자신을 내 던져 드렸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당신의 뜻대로 저를 써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노예입니다. 살라시면 살고, 죽으라시면 죽겠습니다. 저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롬 14:8)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전체에 넘쳐 흐르는 대하(大河)같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 역사, 시문학, 서신, 예언 등등 은 다 이 세상 즉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3:16을 암송해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사랑하시나?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God is love.(요일 4:8)
하나님은 그 본성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보면 그 작가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림이든, 음악이든 시나 소설이든 간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변질되고 더럽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보면 창조 때는 어떠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동산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분이시고, 심히 기뻐하시는 분이시고, 사랑이 가득한 분, 아니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 곧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죄로 타락된 더러워진 세상마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세상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생 즉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어야합니다.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토록 큰 은혜의 선물을 어찌 안 믿을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하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로 부터 나온 그 다음의 사람들을 또한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우리들도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생들도 자기가 낳은 자녀들을 우리는 목숨처럼 사랑합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그저 맹목적인 듯 보일 정도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을 해 주어서가 아닙니다.
특별히 다른 애들보다 더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뜻대로 창조하신 분은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서 후손이 계속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또한 사랑하십니다. 저는 아직 손자 손녀가 없지만 사랑하는 자식에게서 태어난 손자손녀는 자식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들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결과론 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나도 사랑하기 힘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사랑, 아, 하나님의 사랑. ...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토록 사랑하시는 인간이 죄로 타락했습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배반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십니다. 죄인으로 타락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집착. 그 불타는 사랑을 아가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아가서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죽음같이 강하고, 잔혹할 정도로 자신을 학대하며 사랑하는 그 집착.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끝내 하나님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그 목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무슨 행위?? 악한 행위 곧 죄 말입니다.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죄를 짓고 곧 스스로를 감추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음으로서 자신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스스로 나무 숲 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악한 행위 곧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속성입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미 용서하시고 죄의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버립니다. 어둠으로 자신을 가려 보겠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가인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도전적으로 대어듭니다.
자기라고 하는 두꺼운 얼굴 뒤에 자신을 숨겼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대어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도리어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그 공격성 뒤에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많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어떠했습니다.
자기의(self-righteousness) 뒤에 자신들을 숨겼습니다. 더욱 공격적으로 예수님을 몰아세웠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악한 모습, 죄의 누더기다 들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좇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숨습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포장하고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비난의 대상이고 핑계의 구실이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떳떳합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삶에 도전합니다.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씁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려고 고심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기뻐할까? 무엇을 해야 이 사람이 행복할까?
아, 하나님의 사랑 !
이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목숨을 건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사는커녕 늘 불평만 늘어놓고 영적으로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어머님들의 자식을 향한 사랑을 생각해 봅시다.
똥오줌 싸고, 제 구실도 못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철없는 것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목숨을 버리건대, 자식들은 그 사랑과 은혜를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상상도 못합니다. 당연히 감사도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랑 가운데서 살 뿐입니다.
내가 아들들에게 10번 전화하고 email 보내면 그 애들은 한번쯤 합니다. 그런데 저의들이 뭔가 필요하면 몇 번이고 바로바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드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감사도 모르는 무관심, 아둔한 우리들을 끔찍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것인가? 때때로 자책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철든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그 앞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관심을 거기 두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 valentine's day에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며 어찌하든지 기쁘게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3년 동안 지켜보고 삶을 나누고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에 증인이 된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와 같은 맥락입니다.
-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 무엇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습니까?
침례요한 이 그 제자들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침례요한이 이 말씀을 할 때의 그 청중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수탈당하는 그야말로 목자 잃은 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침례요한은 외쳤습니다.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 그가 세상 죄, 나의 죄, 너의 죄 우리 모두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시다.
- 거기에 소망이 있다.
- 보라, 예수님을 보라.
인간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삽니다.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스스로를 “젖먹이 동물”이라고 부릅니다. 동물을 바라본 결과입니다.
돈을 바라보면 자기나 주위사람들의 가치를 돈을 통해서 환산합니다.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원수를 바라보면 자신의 마음이 악해집니다. 미워하는 원수의 모습을 싫어하면서 닮아갑니다. 미움과 증오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같이 나타났습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어야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 서로를 바라보면 한심합니다. 우울해집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내가 내 꼴을 봐도 그렇습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
그 목숨을 나를 위해서 내어던지신 그 희생적인 사랑을 그 은혜를 어찌 감당할 수 있습니까? 다만 예수님의 발 앞에 우리의 인생을 이대로 다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오늘은 음력설입니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구정을 큰 명절로 지냅니다. 중국에서는 이날을 “춘절”(春節)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명절입니다.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가지고 또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또한 오늘은 Valentine's Day입니다. 3세기에 살았던 Valentinus라는 사제로부터 비롯했다고 합니다. 정복전쟁을 해야 하는 로마로서는 병사들이 가족을 가지는 것이 전투력에 부담이 된다하여 황제의 특명으로 군인들의 결혼을 금지했답니다. 이를 부당하게여긴 Valentinus 사제가 비밀리에 결혼을 주례하다가 잡혀서 사형된 날이 바로 오늘이랍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은 개인적으로 저와 아내가 첫 번째 교회의 개척예배를 드린 날로서 오늘로서 만 28주년이 되는 저희들의 기념일입니다. 이제 앞으로 20년을 새로운 각오와 마음으로 주님 앞에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그 때까지 제가 살아있을지는 모르지만 계획은 그렇습니다. 85세까지는 도전적으로 사역에 임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사역에 뛰어들게 되었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싫어 버리고 싶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또 그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인생의 목적이 되었기에 목회의 길에 투신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스스로를 던지신 것 같이,
- 그리고 죄 많은 저의 인생을 더럽다하지 아니하시고 내 속에 자신을 던져
들어오신 것 같이,
- 저 또한 예수님의 발 앞에 저 자신을 내 던져 드렸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당신의 뜻대로 저를 써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노예입니다. 살라시면 살고, 죽으라시면 죽겠습니다. 저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롬 14:8)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전체에 넘쳐 흐르는 대하(大河)같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 역사, 시문학, 서신, 예언 등등 은 다 이 세상 즉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3:16을 암송해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사랑하시나?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God is love.(요일 4:8)
하나님은 그 본성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보면 그 작가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림이든, 음악이든 시나 소설이든 간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변질되고 더럽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보면 창조 때는 어떠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동산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분이시고, 심히 기뻐하시는 분이시고, 사랑이 가득한 분, 아니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 곧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죄로 타락된 더러워진 세상마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세상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생 즉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어야합니다.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토록 큰 은혜의 선물을 어찌 안 믿을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하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로 부터 나온 그 다음의 사람들을 또한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우리들도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생들도 자기가 낳은 자녀들을 우리는 목숨처럼 사랑합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그저 맹목적인 듯 보일 정도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을 해 주어서가 아닙니다.
특별히 다른 애들보다 더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뜻대로 창조하신 분은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서 후손이 계속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또한 사랑하십니다. 저는 아직 손자 손녀가 없지만 사랑하는 자식에게서 태어난 손자손녀는 자식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들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결과론 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나도 사랑하기 힘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사랑, 아, 하나님의 사랑. ...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토록 사랑하시는 인간이 죄로 타락했습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배반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십니다. 죄인으로 타락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집착. 그 불타는 사랑을 아가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아가서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죽음같이 강하고, 잔혹할 정도로 자신을 학대하며 사랑하는 그 집착.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끝내 하나님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그 목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무슨 행위?? 악한 행위 곧 죄 말입니다.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죄를 짓고 곧 스스로를 감추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음으로서 자신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스스로 나무 숲 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악한 행위 곧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속성입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미 용서하시고 죄의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버립니다. 어둠으로 자신을 가려 보겠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가인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도전적으로 대어듭니다.
자기라고 하는 두꺼운 얼굴 뒤에 자신을 숨겼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대어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도리어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그 공격성 뒤에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많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어떠했습니다.
자기의(self-righteousness) 뒤에 자신들을 숨겼습니다. 더욱 공격적으로 예수님을 몰아세웠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악한 모습, 죄의 누더기다 들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좇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숨습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포장하고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비난의 대상이고 핑계의 구실이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떳떳합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삶에 도전합니다.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씁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려고 고심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기뻐할까? 무엇을 해야 이 사람이 행복할까?
아, 하나님의 사랑 !
이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목숨을 건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사는커녕 늘 불평만 늘어놓고 영적으로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어머님들의 자식을 향한 사랑을 생각해 봅시다.
똥오줌 싸고, 제 구실도 못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철없는 것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목숨을 버리건대, 자식들은 그 사랑과 은혜를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상상도 못합니다. 당연히 감사도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랑 가운데서 살 뿐입니다.
내가 아들들에게 10번 전화하고 email 보내면 그 애들은 한번쯤 합니다. 그런데 저의들이 뭔가 필요하면 몇 번이고 바로바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드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감사도 모르는 무관심, 아둔한 우리들을 끔찍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것인가? 때때로 자책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철든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그 앞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관심을 거기 두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 valentine's day에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며 어찌하든지 기쁘게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3년 동안 지켜보고 삶을 나누고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에 증인이 된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와 같은 맥락입니다.
-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 무엇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습니까?
침례요한 이 그 제자들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침례요한이 이 말씀을 할 때의 그 청중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수탈당하는 그야말로 목자 잃은 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침례요한은 외쳤습니다.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 그가 세상 죄, 나의 죄, 너의 죄 우리 모두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시다.
- 거기에 소망이 있다.
- 보라, 예수님을 보라.
인간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삽니다.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스스로를 “젖먹이 동물”이라고 부릅니다. 동물을 바라본 결과입니다.
돈을 바라보면 자기나 주위사람들의 가치를 돈을 통해서 환산합니다.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원수를 바라보면 자신의 마음이 악해집니다. 미워하는 원수의 모습을 싫어하면서 닮아갑니다. 미움과 증오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같이 나타났습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어야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 서로를 바라보면 한심합니다. 우울해집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내가 내 꼴을 봐도 그렇습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
그 목숨을 나를 위해서 내어던지신 그 희생적인 사랑을 그 은혜를 어찌 감당할 수 있습니까? 다만 예수님의 발 앞에 우리의 인생을 이대로 다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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