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201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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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13:31-38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Domine, quo vadis. 오래전에 본적이 있는 영화제목입니다.
십자가를 행해서 가시는 예수님께 드린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가시는데, 소위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과녕 어디로 가시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여쭈어 본 것입니다.
지난 3년동안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삶을 나눈 베드로가 정작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두고는 그 향방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마16:16) 고 정확하게 대답을 드림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를 코 앞에 두신 시점에서는 그 의중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길로 떠난 후에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6:68)라고 결연히 대답하던 베드로 입니다.
지금도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노라." 고 담대하게 헌신을 결단하는 베드로 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목에서는 영적으로 길을 잃고 헤메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잘 알아야 우리들도 주님 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가롯유다가 배신을 하러 나서는 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때가 임박한 시점입니다.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죽으러 가시는데...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헛갈리는 상태를 볼 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심정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아오니...." (마19:28) 라는 베드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심정을 모른다는 것은 그들의 큰 "약점" 입니다.
하물며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채, 모든 것을 움켜쥐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주님의 심정을 알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마음이 심히 답답해 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왜 하나님의 뜻이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첫사람 아담이 타락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 직후에 이미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워 놓으이고 이를 선포하셨습니다. (창3:15)
이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끝장내시는 때가 임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귀가 마지막으로 발악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아 죽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죽는데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떄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올려드린다고 착각합니다.
이사야 1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그들이 제사와 예물에 정성을 다했다고는 하나 하나님께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너희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고 일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제사를 위해서 제물을 사고 팔고 헌금을 하기 위해서 돈을 환전하고 ...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했으나. 예수님은 이것들을 다 내어 쫓으시면 고함을 치셨다. 내 아버지의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고...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도적질 하는 자들이었으며,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터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심정을 모른 때문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노목자님께로부터 이번에 다녀오신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잠간 들었습니다. 스페인에 있는 세비야성당은 그 규모가 정말 대단하답니다. 로마 베드로 성당, 런던의 바울성당과 더불어 세계 3대 성당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약 100년 이상 건축했는데 규모가 웅장하고 호화롭기가 실로 대단하다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 예배처가 아니라 관광지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지을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었는데 지금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할까요? 그들은 나님의 심정과 상관 없이 자기 열심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과연 주님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요?
우리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늘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 찬양,기도, 전도, 선교, 헌금,... 이 모든 것들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를 심각하고 정직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무엇인 영광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목숨을 건 충성을 맹세했다가 배반했다가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했는가?
"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서 너희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이룬 교회가 바로 "너희"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게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두신 뜻이 곧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예배, 찬양, 기도, 헌금, 헌신, 사역, 전도, 선교, 희생, .... 이 모든 것들 이전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를 이루어 드릴 때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 된 우리를 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우리 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감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1) 죄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사랑하시되 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인과 죄를 분리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죄인의 비위를 맞처주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죄로
부터 회개하도록 사랑으로 돕는 것입니다.
(2)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것이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나같은 죄인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3) 목숨을 주기 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분량에 있어서 죽기 까지 희생하는 극단적인 것으로서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일에 말씀을 나눈대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뜻을 이루어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데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영광드리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 보다 먼전 선행되어야하는 것이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모든 activities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자기 합리화가 아니면 죄의식을 cover하기 위한 종교적 몸부림에 불과 합니다. 마치 몇 백년을 들여서 성당을 짓는 것과 같이....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결코 습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와 같이 이기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이를 억지로 해보려고 몸부림을 처봐도 않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않될 일을 시키는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니하시고 시험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는 불가능합니다. 애초부터 않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날마다 제십자가를 지고...
-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 속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침례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망하여야하리라. More of Him and less of me.
베드로와 제자들은 실제로 충성을 바쳤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그 진심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자기들을 향한 예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중,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셨을 때 그들은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 계신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본적도 없는 예수님을 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랑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성령님께 내어드릴 때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성령님께 저를 내어드리게 도와주십시오.
서로사랑하게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서 서로사랑하지 않는 우리의 이기적인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위선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마십시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하나님께 책임을 돌렸던 것과 같은 위선을 우리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십시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신대로...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겠습니다. 지금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실천하겠습니다.
부족한 대로 시도하겠습니다.
지금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방법을 따르십시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 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2-43)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을 도우시던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와 함꼐 하시는 성령님께서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시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Domine, quo vadis. 오래전에 본적이 있는 영화제목입니다.
십자가를 행해서 가시는 예수님께 드린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가시는데, 소위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과녕 어디로 가시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여쭈어 본 것입니다.
지난 3년동안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삶을 나눈 베드로가 정작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두고는 그 향방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마16:16) 고 정확하게 대답을 드림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를 코 앞에 두신 시점에서는 그 의중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길로 떠난 후에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6:68)라고 결연히 대답하던 베드로 입니다.
지금도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노라." 고 담대하게 헌신을 결단하는 베드로 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목에서는 영적으로 길을 잃고 헤메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잘 알아야 우리들도 주님 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가롯유다가 배신을 하러 나서는 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때가 임박한 시점입니다.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죽으러 가시는데...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헛갈리는 상태를 볼 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심정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아오니...." (마19:28) 라는 베드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심정을 모른다는 것은 그들의 큰 "약점" 입니다.
하물며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채, 모든 것을 움켜쥐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주님의 심정을 알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마음이 심히 답답해 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왜 하나님의 뜻이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첫사람 아담이 타락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 직후에 이미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워 놓으이고 이를 선포하셨습니다. (창3:15)
이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끝장내시는 때가 임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귀가 마지막으로 발악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아 죽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죽는데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떄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올려드린다고 착각합니다.
이사야 1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그들이 제사와 예물에 정성을 다했다고는 하나 하나님께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너희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고 일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제사를 위해서 제물을 사고 팔고 헌금을 하기 위해서 돈을 환전하고 ...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했으나. 예수님은 이것들을 다 내어 쫓으시면 고함을 치셨다. 내 아버지의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고...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도적질 하는 자들이었으며,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터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심정을 모른 때문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노목자님께로부터 이번에 다녀오신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잠간 들었습니다. 스페인에 있는 세비야성당은 그 규모가 정말 대단하답니다. 로마 베드로 성당, 런던의 바울성당과 더불어 세계 3대 성당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약 100년 이상 건축했는데 규모가 웅장하고 호화롭기가 실로 대단하다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 예배처가 아니라 관광지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지을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었는데 지금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할까요? 그들은 나님의 심정과 상관 없이 자기 열심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과연 주님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요?
우리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늘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 찬양,기도, 전도, 선교, 헌금,... 이 모든 것들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를 심각하고 정직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무엇인 영광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목숨을 건 충성을 맹세했다가 배반했다가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했는가?
"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서 너희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이룬 교회가 바로 "너희"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교회에게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두신 뜻이 곧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예배, 찬양, 기도, 헌금, 헌신, 사역, 전도, 선교, 희생, .... 이 모든 것들 이전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를 이루어 드릴 때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 된 우리를 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우리 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감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1) 죄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사랑하시되 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인과 죄를 분리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죄인의 비위를 맞처주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죄로
부터 회개하도록 사랑으로 돕는 것입니다.
(2)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것이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나같은 죄인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3) 목숨을 주기 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분량에 있어서 죽기 까지 희생하는 극단적인 것으로서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일에 말씀을 나눈대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뜻을 이루어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데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영광드리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 보다 먼전 선행되어야하는 것이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모든 activities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자기 합리화가 아니면 죄의식을 cover하기 위한 종교적 몸부림에 불과 합니다. 마치 몇 백년을 들여서 성당을 짓는 것과 같이....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결코 습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와 같이 이기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이를 억지로 해보려고 몸부림을 처봐도 않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않될 일을 시키는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니하시고 시험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는 불가능합니다. 애초부터 않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날마다 제십자가를 지고...
-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 속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침례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망하여야하리라. More of Him and less of me.
베드로와 제자들은 실제로 충성을 바쳤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그 진심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자기들을 향한 예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중,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셨을 때 그들은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 계신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본적도 없는 예수님을 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랑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성령님께 내어드릴 때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성령님께 저를 내어드리게 도와주십시오.
서로사랑하게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서 서로사랑하지 않는 우리의 이기적인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위선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마십시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하나님께 책임을 돌렸던 것과 같은 위선을 우리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십시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신대로...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겠습니다. 지금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실천하겠습니다.
부족한 대로 시도하겠습니다.
지금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방법을 따르십시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 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2-43)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을 도우시던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와 함꼐 하시는 성령님께서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시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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