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되신 예수님(200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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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8:1-12
Texas Killen이란 곳에 Fort Hood 군부대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그곳에서 실로 엄청난 총기사건이 일어난 것을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들었을 줄 압니다. Malik Nidal Hassan이란 Moslem 교도인 군의관 소령이 총기를 난사해서 십수명을 살해하고 30여명에게 부상을 입힌 끔찍한 일입니다. 예상치 못한 총격으로 인하여 숨지거나 다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얼마나 통탄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가 하면 총격을 가한 그도 또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런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또한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 범인이 지금 부상당한 상태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회복되어 재판을 받는다면 종교적인 issue로 비화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또 Florida에서는 수년 전에 직장에서 해고된 전 직원이 자기가 근무하던 사무실에 난입해서 총기를 발사해서 한명이 죽고 또 여럿이 부상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총기사고는 이제는 너무나 빈번하여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처럼 여겨진지 오래입니다.
인간사회에 선과 악의 문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혼돈이 이런 지경으로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이를 거역하여 선앙과를 따먹고 곧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일먼저 생각한 것이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려야한다라고 생각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가리려고 말입니다. 아담은 스스로 정죄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들 대에 와서는 가인이 아벨을 정죄하고 때려죽이고,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소년을 죽이고 ..... 서로 정죄하며 살육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즉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는 존재가 선악을 알게 되자 이것은 곧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선악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악의 기준이 자기가 되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세상이 곧 죽음이고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다시 말해서 너는 선악을 알 필요가 없다. 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살아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내가 옳다, 너는 그르다 입니다.
그래서 지옥처럼 되어버린 세대를 하나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때 오직 노아만 구원 받았는데, 그 기준이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창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될 때 그 곳은 곧 지옥이 됩니다.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세계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기준이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 이 율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기본인데 이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기 시작하자 이 율법으로 자신의 삶을 다스리기보다 남을 정죄하는 흉기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율법에 의하면 너는 이러저러하게 나쁘고,
- 율법에 의하면 너는 돌을 맞아야하고,
- 율법에 의하면 .....을 계속하다가, ....
그러다가 결국 율법에 의하여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율법의 노예가 된 자들이 저지른 만행입니다.
이런 죄악세상, 지옥으로 변해버린 세상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심판으로도 율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죄, 선악을 앎으로 말미암아 저지르는 무참한 죄를 스스로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 에덴 동산의 아담에게는 선악과의 계명이 절대적인 죽고 사는 기준이듯이,
- 노아에게 하나님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의 기준이신 것처럼..
-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이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인 기준임을 선
포하셨습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지금부터 2000년 전 예수님 앞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간음 중에 잡혔는고로 그 죄와 수치가 적나라하게 들어난 모습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 뿐 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를 돌로 처 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모두들 손에 돌을 들고 이런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정죄하며 살기가 등등했을 듯합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주위에는 늘 가장 의로워 보이는 사람들만 가득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이를 주동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남을 정죄하는데 이용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을 죄인들인데 다만 사람들에게 들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이 가진 선과 악의 잣대입니다. 들어난 악과 자기 의로 포장 된 감추인 악이 들어난 악을 무자비하게 정죄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런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을 조명해야합니다.
-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율법에 기초하여 사람을 정죄하려는 군중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람들이 하나 둘씩 손에 있는 돌을 내려 놓고 다 가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까지도 모두 가버리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모두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오늘날에 비해서 조금은 더 양심적이고 순수했던 듯 합니다. 요사이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를 상상해 봤습니다. 법대로 하자, 소송을 하자 고 목청을 높이지 않았을까요?
마음 아픈 일이지만 지난 주간에 보도된 동양선교교회의 사건을 예로 보자면 과연 그럴 법도 합니다. 모두가 법대로 하자고 들고 일어난 끝에 교회는 상처를 입고, 결국 예수님은 또다시 곤욕을 치르신 결과가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법대로 하자고 외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입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지금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경고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각자는 마음속에 과연 몇 개나 되는 정죄의 돌을 쥐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 놔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께 돌팔매를 던지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들고 설치든 사람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이제 그녀를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일 자격과 권리가 있으신 예수님만이 그녀를 마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무슨 말씀인가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이 장면에 예수님이 계셨기에 그녀는 살 소망이 있었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죽음의 암흑에서 생명의 빛을 본 것입니다. 살길이 열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소망이 됩니다. 생명의 빛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여기 등장하는 모든 자들은 다 어둠 속을 가는 인생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돌을 들고 설치는 군중들....간음 중에 잡힌 여인 할 것 없이 캄캄한 인생의 어둠 속을 방황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과연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에 하나님께 간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 물질세계의 어두움 즉 어두운 가운데 등불이 꺼지면 깜깜하고 답답합니다.
그것이 촛불이든, flash이든, 형광등이든 불을 켜면 됩니다.
- 지식의 어두움, 또한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 무지하면 깜깜합니다. 보는 사람도 그 자신도 서로 암중모색,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시사,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지리, 역사.....그것이 무엇이든 무지하면 아두운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공부하고 배우면 됩니다.
- 영적인 어두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 하나님, 영혼, 천국, 죽음, 그 후의 세계 .... 모두 어둡습니다. 깜깜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천국은 이렇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 등등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봅니다.
- 천국으로 가는 길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빛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생명의 빛이십니다.
여기 이 여인, 죽음에 직면한 가령한 여인은 진정한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새로운 인생이 열렸던 것처럼 저 자신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1972년 11월 지금부터 37년 전 간음 중에 잡힌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서 있던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나 자신이 스스로 용서할 수 없던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짙은 어두움으로 갈 바를 모르던 길 잃어버린 나를, 없어져도 이 세상에 별 영향이 없던 나를, 살아 있대도 별 유익이 되지 못하는 이름도 존재가치도 없는 나를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왔다. 너 같은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왔노라. 마가복음 2:17의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랴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어두음이 지배하던 나의 인생에 빛이 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만났습니다. 그리스도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저의 가정이었기에 기도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몰랐으므로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절규했습니다.
“예수님, 저로서는 않되겠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 내 인생이 여기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그래서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겨드렸습니다.
-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었습니다.
-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열렸습니다. 37년 전, 그 때 그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도 별 쓸모없는 나를 지극히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내 인생을 바쳐드렸는데, 이제는 나이 들고 시들어가는 인생이라서 더욱 쓸모가 없어졌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귀히 여기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내 남은 인생을 주님의 발 앞에 드려 바칩니다.
여러분,
진정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이 없으면 그야말로 어둠을 달려가는 무모한 짓입니다.
-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
- 모레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 결국에는 어떻게 되나?
죽음이란 실재 앞에 당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둠을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 생명의 빛되신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 하나님 없이 인생길을 가면,
-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날마다 그에게 주권을 드리지 않으면,
그것은 곧 어둠속을 헤메는 인생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Texas Killen이란 곳에 Fort Hood 군부대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그곳에서 실로 엄청난 총기사건이 일어난 것을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들었을 줄 압니다. Malik Nidal Hassan이란 Moslem 교도인 군의관 소령이 총기를 난사해서 십수명을 살해하고 30여명에게 부상을 입힌 끔찍한 일입니다. 예상치 못한 총격으로 인하여 숨지거나 다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얼마나 통탄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가 하면 총격을 가한 그도 또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런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또한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 범인이 지금 부상당한 상태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회복되어 재판을 받는다면 종교적인 issue로 비화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또 Florida에서는 수년 전에 직장에서 해고된 전 직원이 자기가 근무하던 사무실에 난입해서 총기를 발사해서 한명이 죽고 또 여럿이 부상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총기사고는 이제는 너무나 빈번하여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처럼 여겨진지 오래입니다.
인간사회에 선과 악의 문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혼돈이 이런 지경으로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이를 거역하여 선앙과를 따먹고 곧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일먼저 생각한 것이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려야한다라고 생각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가리려고 말입니다. 아담은 스스로 정죄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들 대에 와서는 가인이 아벨을 정죄하고 때려죽이고,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소년을 죽이고 ..... 서로 정죄하며 살육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즉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는 존재가 선악을 알게 되자 이것은 곧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선악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악의 기준이 자기가 되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세상이 곧 죽음이고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다시 말해서 너는 선악을 알 필요가 없다. 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살아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내가 옳다, 너는 그르다 입니다.
그래서 지옥처럼 되어버린 세대를 하나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때 오직 노아만 구원 받았는데, 그 기준이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창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될 때 그 곳은 곧 지옥이 됩니다.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세계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기준이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 이 율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기본인데 이를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기 시작하자 이 율법으로 자신의 삶을 다스리기보다 남을 정죄하는 흉기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율법에 의하면 너는 이러저러하게 나쁘고,
- 율법에 의하면 너는 돌을 맞아야하고,
- 율법에 의하면 .....을 계속하다가, ....
그러다가 결국 율법에 의하여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율법의 노예가 된 자들이 저지른 만행입니다.
이런 죄악세상, 지옥으로 변해버린 세상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심판으로도 율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죄, 선악을 앎으로 말미암아 저지르는 무참한 죄를 스스로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 에덴 동산의 아담에게는 선악과의 계명이 절대적인 죽고 사는 기준이듯이,
- 노아에게 하나님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의 기준이신 것처럼..
-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이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인 기준임을 선
포하셨습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지금부터 2000년 전 예수님 앞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간음 중에 잡혔는고로 그 죄와 수치가 적나라하게 들어난 모습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 뿐 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를 돌로 처 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모두들 손에 돌을 들고 이런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정죄하며 살기가 등등했을 듯합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주위에는 늘 가장 의로워 보이는 사람들만 가득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이를 주동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남을 정죄하는데 이용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을 죄인들인데 다만 사람들에게 들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이 가진 선과 악의 잣대입니다. 들어난 악과 자기 의로 포장 된 감추인 악이 들어난 악을 무자비하게 정죄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런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을 조명해야합니다.
-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율법에 기초하여 사람을 정죄하려는 군중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람들이 하나 둘씩 손에 있는 돌을 내려 놓고 다 가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까지도 모두 가버리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모두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오늘날에 비해서 조금은 더 양심적이고 순수했던 듯 합니다. 요사이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를 상상해 봤습니다. 법대로 하자, 소송을 하자 고 목청을 높이지 않았을까요?
마음 아픈 일이지만 지난 주간에 보도된 동양선교교회의 사건을 예로 보자면 과연 그럴 법도 합니다. 모두가 법대로 하자고 들고 일어난 끝에 교회는 상처를 입고, 결국 예수님은 또다시 곤욕을 치르신 결과가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법대로 하자고 외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입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지금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경고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각자는 마음속에 과연 몇 개나 되는 정죄의 돌을 쥐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 놔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께 돌팔매를 던지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들고 설치든 사람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이제 그녀를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일 자격과 권리가 있으신 예수님만이 그녀를 마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무슨 말씀인가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이 장면에 예수님이 계셨기에 그녀는 살 소망이 있었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죽음의 암흑에서 생명의 빛을 본 것입니다. 살길이 열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소망이 됩니다. 생명의 빛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여기 등장하는 모든 자들은 다 어둠 속을 가는 인생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돌을 들고 설치는 군중들....간음 중에 잡힌 여인 할 것 없이 캄캄한 인생의 어둠 속을 방황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과연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에 하나님께 간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 물질세계의 어두움 즉 어두운 가운데 등불이 꺼지면 깜깜하고 답답합니다.
그것이 촛불이든, flash이든, 형광등이든 불을 켜면 됩니다.
- 지식의 어두움, 또한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 무지하면 깜깜합니다. 보는 사람도 그 자신도 서로 암중모색,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시사,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지리, 역사.....그것이 무엇이든 무지하면 아두운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공부하고 배우면 됩니다.
- 영적인 어두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 하나님, 영혼, 천국, 죽음, 그 후의 세계 .... 모두 어둡습니다. 깜깜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천국은 이렇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 등등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봅니다.
- 천국으로 가는 길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빛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생명의 빛이십니다.
여기 이 여인, 죽음에 직면한 가령한 여인은 진정한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새로운 인생이 열렸던 것처럼 저 자신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1972년 11월 지금부터 37년 전 간음 중에 잡힌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서 있던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나 자신이 스스로 용서할 수 없던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짙은 어두움으로 갈 바를 모르던 길 잃어버린 나를, 없어져도 이 세상에 별 영향이 없던 나를, 살아 있대도 별 유익이 되지 못하는 이름도 존재가치도 없는 나를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왔다. 너 같은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왔노라. 마가복음 2:17의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랴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어두음이 지배하던 나의 인생에 빛이 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만났습니다. 그리스도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저의 가정이었기에 기도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몰랐으므로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절규했습니다.
“예수님, 저로서는 않되겠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 내 인생이 여기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그래서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겨드렸습니다.
-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었습니다.
-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열렸습니다. 37년 전, 그 때 그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도 별 쓸모없는 나를 지극히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내 인생을 바쳐드렸는데, 이제는 나이 들고 시들어가는 인생이라서 더욱 쓸모가 없어졌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귀히 여기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내 남은 인생을 주님의 발 앞에 드려 바칩니다.
여러분,
진정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이 없으면 그야말로 어둠을 달려가는 무모한 짓입니다.
-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
- 모레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 결국에는 어떻게 되나?
죽음이란 실재 앞에 당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둠을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 생명의 빛되신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 하나님 없이 인생길을 가면,
-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날마다 그에게 주권을 드리지 않으면,
그것은 곧 어둠속을 헤메는 인생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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