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영생) 받은 자의 삶(200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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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누가복음 10:25-37
지난 주간에 6.25 전쟁 때에 한국에 주둔하던 미공군 군목 러쎌 부레이즈델 대령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전쟁 통에 서로 살길을 찾아 헤메는 아비규환 속에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고 버려졌던 고아 1,059명 을 제주도까지 수송기로 후송하는데 직접적으로 공헌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영화화 된 것이 전송가(Battle Hymn)라는 영화로서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단체관람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그때 도움을 받았던 고아들과 관계자들이 광주에 러쎌목사님의 동상을 세운다는 기사가 있어 마음이 흐믓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년전에 일본에서 술에 취해서 지하철 선로위에 떨어진 일본여성을 구하고 자신은 전차에 받혀 죽은 이수현이란 한국유학생의 이야기가 역시 “의인 이수현“이란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청년의 이야기가 일본 열도에 존경과 감동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 외에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살신성인을 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알려지거나 혹은 숨겨져 있는 상태로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도 이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이 들어서인지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여서 안타깝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님께 대하여 버릇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으로 예수님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려는 자세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교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현장에 찾아 왔습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예수를 시험하여...”라는 말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목수 출신이라는 것으로 보아 율법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잘 아나 시험해 보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는 부정적인 내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질문했습니다.
율법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떻게 해야 구원 받습니
까?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율법에 어떻게 기록 되어 있어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말은 어떻
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율법사: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
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구약의 율법은 방대합니다. 조항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이 율법사는 진정 연구를 많이 하고 또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헌 확신이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은 이미 영생을 가진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반 이상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시던 김문섭성도님이 수년전에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영접하고 구원 받으셨는데, 이번에 성경개론 과정을 공부하시면서 성경을 일독하셨답니다. 축하할 일이고 우리 모두가 배워야할 자세입니다. 그러나 한번 통독해가지고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핵심인지 뭔지 한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하기시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이 율법사는 거침없이 하나님 사람, 이웃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반응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율법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인이요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독실한사람인지라, 자기는 이미 영생 곧 구원을 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단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가 말한 것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걸어라. 그러면 살리라. 구원을 확실히 받은 것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영생 곧 구원 받은 자의 증거이다입니다.
이 말씀에 의거하면 믿는 대로 사는 것,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거는 삶이 구원 받은 자의 증거라고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때 율법사가 말합니다.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자기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인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간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정리해 봐야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쓰는 단어들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과 뜻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인간중심인데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쓰신 모든 단어들은 우리는 인간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측면에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단어로 해석하면 인본주의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해서 제가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성경의 단어의 개념정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말씀(로고스): 세상적으로는 말, 원리, 법칙, 규범, 신탁 등을 뜻하는 단어이었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 자신이라고 정의합니다.(요1:1)
선의 개념: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세상적으로 아무리 착한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그것은 악일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선한 자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악한 자인 것입니다.
의의 개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
홍수심판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의 기준을 노아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불가능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오늘날 의롭게 될 우리까지도 염두에 두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3-24)
사랑의 개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축복의 개념: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 이는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는(요1:14)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가족의 개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대답 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3-35)
개념의 차이, 정의의 차이를 무시하고 성경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다가 보니 온갖 이상야릇한 것과 헷갈리고 혼동되는 것들 천지라서 뭐가 뭔지 분간을 못하고 방황하는 것인 현대인의 문제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약 36KM 쯤 되는 거리인데 산길이고 꼬불꼬불하여 인적인 드믈어 강도나 기타 사고들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음직전에 있는 사람을 구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 한 제사장은 그를 피하여 지나가고,
- 한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 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들을 내어 주막주인에게 주며 가로대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합니다. 이웃을 말할 때 먼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겠습니다.
- 지리적인 이웃: 옆집, 한 동네, 지리적인 이유.
- 인간적인 이웃: 친하게 지내는 사람, 같은 학부모관계, 회사원, 동업자, 내
가 보기에 친하고 싶게 생긴 사람, 등등 ... 인간적인 필요
에 의한 이유로 맺은 관계...
- 성경적인 이웃: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이유. 즉 여기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기 위한 이유,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 하신 그런 이유로 맺어진 관계성으로서의 이웃을 뜻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사실 예루살렘과 여리고 등등 유대 땅을 다니는 것 조차도 불편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만난 사람이 자기민족을 멸시하는 유대인이던 누구이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인가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 이니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
마치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 주위에 고난에 처한 사람 등등..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이런 이웃들을 또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 율법사가 주고받은 말을 들으면 조금 헷갈립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를 뭇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내 주위에 내가 도와야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네가 어떤 이웃이 되어야하는가?를 말씀하신다는 말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면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위대한 명령)
너는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는가?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를 물으십니다.
예수님과 이 율법사의 대화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율법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 곧 구원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 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어떻게 해석하
느냐?)
율법사: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
이다.
예수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사: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님: 선한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 주신 후,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이요. 이를 실천하는 것이 영생 곧 구원을 받은 자의 삶이다. 그 증거이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엡 2:8-10)
우리는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동시에 가르쳐 주시는 셈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곧 믿는대로 사는 삶이 수반되는 믿음이야말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의도라고 믿어집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강도 같은 마귀에게 매여 죽도록 고생하고 벌거 벗기우고 결국은 영원한 지옥을 형벌을 선고 받고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주시고 살려주시고 지금도 도와주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할까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이니라. 증거니라. 내가 네게 해준 것 같이 그렇게 살아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삶이 따르지 않는 소위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가 차고 넘치는 것이 지금 이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혈안이 되어 이해득실을 따지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은 세상에서, 자신의 감정과 위신을 지키려고 목숨을 거는 사회풍토에서, 교회마저도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휘돌리는 것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자기중심적입니다. 제 하고 싶은 대로 마구 나대는 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이토록 모질고 악한 인생길에서 영적으로나 육적 혹은 물질적인 이유로 지치고 상한 채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피하여 지나가는 소위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 한구석에서 죄로 말미암아 쓸어져 죽어가던 우리들을 살리시려고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되라. 고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난 주간에 6.25 전쟁 때에 한국에 주둔하던 미공군 군목 러쎌 부레이즈델 대령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전쟁 통에 서로 살길을 찾아 헤메는 아비규환 속에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고 버려졌던 고아 1,059명 을 제주도까지 수송기로 후송하는데 직접적으로 공헌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영화화 된 것이 전송가(Battle Hymn)라는 영화로서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단체관람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그때 도움을 받았던 고아들과 관계자들이 광주에 러쎌목사님의 동상을 세운다는 기사가 있어 마음이 흐믓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년전에 일본에서 술에 취해서 지하철 선로위에 떨어진 일본여성을 구하고 자신은 전차에 받혀 죽은 이수현이란 한국유학생의 이야기가 역시 “의인 이수현“이란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청년의 이야기가 일본 열도에 존경과 감동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 외에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살신성인을 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알려지거나 혹은 숨겨져 있는 상태로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도 이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이 들어서인지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여서 안타깝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님께 대하여 버릇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으로 예수님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려는 자세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교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현장에 찾아 왔습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예수를 시험하여...”라는 말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목수 출신이라는 것으로 보아 율법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잘 아나 시험해 보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는 부정적인 내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질문했습니다.
율법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떻게 해야 구원 받습니
까?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율법에 어떻게 기록 되어 있어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말은 어떻
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율법사: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
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구약의 율법은 방대합니다. 조항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이 율법사는 진정 연구를 많이 하고 또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헌 확신이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은 이미 영생을 가진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반 이상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시던 김문섭성도님이 수년전에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영접하고 구원 받으셨는데, 이번에 성경개론 과정을 공부하시면서 성경을 일독하셨답니다. 축하할 일이고 우리 모두가 배워야할 자세입니다. 그러나 한번 통독해가지고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핵심인지 뭔지 한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하기시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이 율법사는 거침없이 하나님 사람, 이웃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반응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율법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인이요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독실한사람인지라, 자기는 이미 영생 곧 구원을 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단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가 말한 것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걸어라. 그러면 살리라. 구원을 확실히 받은 것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영생 곧 구원 받은 자의 증거이다입니다.
이 말씀에 의거하면 믿는 대로 사는 것,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거는 삶이 구원 받은 자의 증거라고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때 율법사가 말합니다.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자기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인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간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정리해 봐야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쓰는 단어들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과 뜻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인간중심인데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쓰신 모든 단어들은 우리는 인간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측면에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단어로 해석하면 인본주의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해서 제가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성경의 단어의 개념정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말씀(로고스): 세상적으로는 말, 원리, 법칙, 규범, 신탁 등을 뜻하는 단어이었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 자신이라고 정의합니다.(요1:1)
선의 개념: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세상적으로 아무리 착한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그것은 악일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선한 자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악한 자인 것입니다.
의의 개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
홍수심판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의 기준을 노아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불가능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오늘날 의롭게 될 우리까지도 염두에 두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3-24)
사랑의 개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축복의 개념: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 이는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는(요1:14)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가족의 개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대답 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3-35)
개념의 차이, 정의의 차이를 무시하고 성경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다가 보니 온갖 이상야릇한 것과 헷갈리고 혼동되는 것들 천지라서 뭐가 뭔지 분간을 못하고 방황하는 것인 현대인의 문제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약 36KM 쯤 되는 거리인데 산길이고 꼬불꼬불하여 인적인 드믈어 강도나 기타 사고들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음직전에 있는 사람을 구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 한 제사장은 그를 피하여 지나가고,
- 한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 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들을 내어 주막주인에게 주며 가로대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합니다. 이웃을 말할 때 먼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겠습니다.
- 지리적인 이웃: 옆집, 한 동네, 지리적인 이유.
- 인간적인 이웃: 친하게 지내는 사람, 같은 학부모관계, 회사원, 동업자, 내
가 보기에 친하고 싶게 생긴 사람, 등등 ... 인간적인 필요
에 의한 이유로 맺은 관계...
- 성경적인 이웃: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이유. 즉 여기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기 위한 이유,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 하신 그런 이유로 맺어진 관계성으로서의 이웃을 뜻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사실 예루살렘과 여리고 등등 유대 땅을 다니는 것 조차도 불편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만난 사람이 자기민족을 멸시하는 유대인이던 누구이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인가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 이니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
마치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 주위에 고난에 처한 사람 등등..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이런 이웃들을 또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이 율법사가 주고받은 말을 들으면 조금 헷갈립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를 뭇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내 주위에 내가 도와야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네가 어떤 이웃이 되어야하는가?를 말씀하신다는 말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면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위대한 명령)
너는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는가?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를 물으십니다.
예수님과 이 율법사의 대화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율법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 곧 구원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 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어떻게 해석하
느냐?)
율법사: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
이다.
예수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사: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님: 선한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 주신 후,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이요. 이를 실천하는 것이 영생 곧 구원을 받은 자의 삶이다. 그 증거이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엡 2:8-10)
우리는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동시에 가르쳐 주시는 셈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곧 믿는대로 사는 삶이 수반되는 믿음이야말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의도라고 믿어집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강도 같은 마귀에게 매여 죽도록 고생하고 벌거 벗기우고 결국은 영원한 지옥을 형벌을 선고 받고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주시고 살려주시고 지금도 도와주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할까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이니라. 증거니라. 내가 네게 해준 것 같이 그렇게 살아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삶이 따르지 않는 소위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가 차고 넘치는 것이 지금 이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혈안이 되어 이해득실을 따지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은 세상에서, 자신의 감정과 위신을 지키려고 목숨을 거는 사회풍토에서, 교회마저도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휘돌리는 것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자기중심적입니다. 제 하고 싶은 대로 마구 나대는 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이토록 모질고 악한 인생길에서 영적으로나 육적 혹은 물질적인 이유로 지치고 상한 채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피하여 지나가는 소위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 한구석에서 죄로 말미암아 쓸어져 죽어가던 우리들을 살리시려고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되라. 고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