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200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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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누가복음 5:1-11
Barack Obama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시상식에서 한 연설에서 말하기를 “마하트마.간디, 마틴.루터.킹과 같은 비폭력저항운동을 존중하지만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요지입니다. 히틀러나 알카에다의 만행을 비폭력으로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이론입니다.
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으로 지켜지는 평화... 즉 평화를 위해서는 싸워야한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않 되는 것 같기도 하여 좀 헷갈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죄악 세상의 한계입니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선하 것도 되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들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완전한 절대 진리라는 것은 없이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며, 또 인간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해석하고 논리를 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돌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데 이것이 곧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물질세계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오직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기초하여 사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차원은 이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삶과 다르고 또 반드시 달라야합니다. 이 세상도 자기 자신도 아닌 예수님을 따라서 동행하며 예수님을 닮아 가려고하는 그런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차원이 다른 삶“이라고 하면 돈이 많고 적음, 지식의 두께, 힘과 권력의 높낮이 혹은 사고나 취미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종류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차원이 다른 삶“이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로 사는가,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인생을 투자하는가 하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삶을 말합니다. 너무나 거창한 것 같지만 실은 간단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가?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가?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같이 자기를 위해서 물고기를 잡아 죽이던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인이 되는 변화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다시금 점검해 보기를 바랍니다.
시몬의 인생은 예수님께서 그의 배에 오르심으로 삶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시몬의 배와 또 다른 배가 있었는데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의 배이었던 듯합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봤지만 허사이었습니다. 텅 빈 배의 허전함을 안고 지금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1) 지금 시몬의 배는 비어 있습니다.
만일 고기가 가득 넘쳤다면 예수님께서 들어가실 수도 없고 설령 들어가신다 해도 못 들어오시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고기가 없는 빈 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실패,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절망도 축복의 근거입니다. 역설적으로 시몬의 배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몬의 배가 비어있다는 것 곧 밤새 물고기를 하나도 못 잡은 실패가 곧 예수님을 모시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출발하는 놀라운 축복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으로인가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자기 중심, 교만, 죄, 자기만족, 자기 충만, 물질적인 성공, 소위 목회성공, 등등 예수님 아닌 것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속에 무엇이 차고 넘쳐있는가 하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본인이 알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령님께서 가장 잘 아십니다.
- 저와 여러분의 심령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무엇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장막은 어떻습니까?
- 그리고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지배하실 수 있도록, 그의 말씀으로 채울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회개입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자신을 조명해 보고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2)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텅 비어 있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더니 땅에서 조금 띠게 하시고 배에서 앉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방금 전 시몬은 밤새도록 수고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된 허탈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피곤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것이 그의 직업인데 아무 수확이 없이 피곤한 아침, 허전한 파장을 맞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런 착잡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남의 배에 와서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하고 짜증낼만한 일이 아닐까요? 그야말로 말씀이 밥 먹여 주나? 어떤 분이 불평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처럼 만날 말씀, 말씀만 하나? 시몬이야말로 신경질을 낼 만하지 않습니까?
이런 시몬의 형편을 예수님이 모르실 리가 없지요.
- 너 지금 심신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
- 너는 지금 물고기가 배에 차고 넘쳤으면 좋겠지..
- 네게는 돈벌이가 중요니까 말이다.
- 집에서 너를 기다리는 식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깝지...
- 그래서 눈물이 나려고 하지...
- 그런데 정작 내일의 희망 또한 막연한 것이 너를 더욱 고달프게 하겠지....
시몬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야속하리만큼 엉뚱한 모습으로 시몬의 배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계속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등등 아니겠습니까?
물고기 잡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은 땅에 운집한 군중들보다도 실은 시몬 들으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시몬에게 필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때 베드로도 가장 주의 깊게 그 말씀을 경청했을 것입니다.
- 이분이 왜 하필 내 배에 와서 이런 말씀을 하는가?
- 이분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
말씀을 다하신 후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몬은 이 호수가가 자신의 삶의 터전이요 여기서 잔뼈가 굵은 어부입니다. 나름대로 고기잡이에는 일가견과 경험과 소신과 오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알려진 대로 목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시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사는 분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시몬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정말 당치않은 헛소리입니다. 순종하기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간에 듣고 알던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봤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에 책임을 지시는 분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막 1:27)고 놀라워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의 차원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맡겨드렸습니다. 시험해 본 것이 아니라 내 맡겼다는 말입니다. 시험해 보는지 아닌지는 예수님께서 아십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단번에 그물이 찢어지게 잡혀서 요한과 야고보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게 웬 일입니까? 두 배에 나누어 실었는데도 둘 다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을 주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를 연발하는 ... 이것이 일반적인 소위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기적을 이루신 예수님의 심정과 그 계획을 헤아리기 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 곧 자기가 원하는 것들에 더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이 장면에서 시몬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축복이다. 축복이다. 덩실 덩실 춤이라고 추고 예수님,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베드로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님 무릎 아래 털썩 엎드려 졌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까 5절에서는 “선생이여“라고 했는데, 이는 단지 Mr 혹은 아무개씨 정도 되는 인간적인 호칭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여,(Lord)라고 부릅니다.
본래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으로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부터 일어난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고 있었습니다.(행 1:22-23) 그러나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자기의 배에 들어오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그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때까지는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뿐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어떠한 죄인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한 시몬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온 이사야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이상 중에(비디오처럼) 만국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봤습니다. 이는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의 환상으로라도 본 이사야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깨달은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공통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빛 되신 주님 앞에 자신의 누추한 죄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 자기방어논리, 자기주장은 간데 없고 온통 누더기 같은 죄만 남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됩니다. 여기 시몬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계셨어도 시몬이 자기중심을 고집한 나머지 그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앞에 자기의 인생을 드리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가까이 모시고 있었지만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뻔했습니다. 자기중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이라는 왕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친히 세우실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져서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자기중심적인 삶 곧 자기에게 좋게 보이는대로 살다가 처참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죄인의 자기 중심은 곧 죄 그자체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위에 인생의 배가 텅 비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온갖 잡스러운 것으로 가득하여 예수님을 못 들어오시게 막고 있는 강팍한 영혼들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 자신 밖에는 아무도 그 자기중심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내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 나는 주님을 감당한 수 없습니다.
- 나를 떠나소서. 고백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10하)
그 과정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하는 아픈 단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 우리가 처음 구원 받았을 때를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계속해서 그러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임하면 결코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되던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든 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심령에는 교만과 자기중심이 슬그머니 그 머리를 들고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저의 목자이신 김동명목사님께서 평생 강조하시던 것이 “탕자의 심정“입니다. 어쨋거나 ”나는 아버지께 돌아와 은혜 받은 탕자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분은 그것을 그리스도 군사의 차려 자세라고 했습니다. 군인의 모든 행동은 ”차렸” 으로 시작하듯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또한 차렸 자세 즉 탕자의 심정으로 부터 늘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말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의 아픈 경험을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이미 구원 받은 우리도 훈련의 과정, 자기부인의 단계가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그렇고 그런 인간적인 차원에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어떤 기사에 누구라면 다 알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처음에는 천주교인이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나중에는 불교에 귀의해서 지금은 어떤 암자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신학교를 나와서 전도사임명을 받고 전국을 다니며 간증 및 설교를 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지요. 영적으로 이토록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과연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지 이 시간 한 해를 마감하면서 또 2000년 전에 죄인들 가운데 태어나신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이 분명이 집고 넘어가야할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가 자기 방식과 경험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서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여 앞으로도 물고기 잡을 때마다 “주여 어디로 던지리이까“ 하고 물으며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삶을 계속한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가 물고기를 얼마나 많이, 어떤 방법으로 잡느냐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고기를 잡아 자기의 배를 불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던 자가. 이제는 사람을 낚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몸을 던지는 차원. 이것이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알게 하시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주시려는 차원의 삶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은 진정 자기를 포기하는 아픈 고백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시몬이 주님 앞에 엎드러지듯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자기부인을 거쳐야만 새로운 차원의 삶이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솔개의 선택이란 글을 internet에서 읽었습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새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솔개가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솔개에게서 발톱, 날개, 부리에 문제가 생기면 끝장이다.
이 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재활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사는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 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과정을 시작한다.
1.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2.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3. 그 후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누리게 되는 것이다.
솔개의 삶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스러운 재탄생 과정을 생략하고는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참으로 정교하고도 신비합니다. 이러한 솔개의 삶도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하물며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신 인간,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할까를 생각해 보니 온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솔개가 그대로 도태하는가?
다시 창공을 마음껏 비상하는가?
선택은 솔개의 몫이듯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삶은 거저 주어지지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나를 떠나소서.” 하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과정이 없이는 새로운 차원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기를 많이 잡아내다 팔고 좋아하는 시몬은 모습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는 다시 빈 배로 돌아와서 끝도 없고 의미도 없는 반복을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향한 탕자의 심정입니다.
무서워 말라, 네가 이제 사람을 취하리라.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그들은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영원한 가치를 향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고......
그리고 친히 당신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Barack Obama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시상식에서 한 연설에서 말하기를 “마하트마.간디, 마틴.루터.킹과 같은 비폭력저항운동을 존중하지만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요지입니다. 히틀러나 알카에다의 만행을 비폭력으로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이론입니다.
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으로 지켜지는 평화... 즉 평화를 위해서는 싸워야한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않 되는 것 같기도 하여 좀 헷갈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죄악 세상의 한계입니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선하 것도 되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들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완전한 절대 진리라는 것은 없이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며, 또 인간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해석하고 논리를 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돌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데 이것이 곧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물질세계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오직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기초하여 사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차원은 이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삶과 다르고 또 반드시 달라야합니다. 이 세상도 자기 자신도 아닌 예수님을 따라서 동행하며 예수님을 닮아 가려고하는 그런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차원이 다른 삶“이라고 하면 돈이 많고 적음, 지식의 두께, 힘과 권력의 높낮이 혹은 사고나 취미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종류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차원이 다른 삶“이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로 사는가,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인생을 투자하는가 하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삶을 말합니다. 너무나 거창한 것 같지만 실은 간단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가?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가?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같이 자기를 위해서 물고기를 잡아 죽이던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인이 되는 변화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다시금 점검해 보기를 바랍니다.
시몬의 인생은 예수님께서 그의 배에 오르심으로 삶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시몬의 배와 또 다른 배가 있었는데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의 배이었던 듯합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봤지만 허사이었습니다. 텅 빈 배의 허전함을 안고 지금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1) 지금 시몬의 배는 비어 있습니다.
만일 고기가 가득 넘쳤다면 예수님께서 들어가실 수도 없고 설령 들어가신다 해도 못 들어오시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고기가 없는 빈 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실패,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절망도 축복의 근거입니다. 역설적으로 시몬의 배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몬의 배가 비어있다는 것 곧 밤새 물고기를 하나도 못 잡은 실패가 곧 예수님을 모시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출발하는 놀라운 축복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으로인가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자기 중심, 교만, 죄, 자기만족, 자기 충만, 물질적인 성공, 소위 목회성공, 등등 예수님 아닌 것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속에 무엇이 차고 넘쳐있는가 하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본인이 알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령님께서 가장 잘 아십니다.
- 저와 여러분의 심령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무엇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장막은 어떻습니까?
- 그리고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지배하실 수 있도록, 그의 말씀으로 채울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회개입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자신을 조명해 보고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2)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텅 비어 있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더니 땅에서 조금 띠게 하시고 배에서 앉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방금 전 시몬은 밤새도록 수고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된 허탈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피곤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것이 그의 직업인데 아무 수확이 없이 피곤한 아침, 허전한 파장을 맞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런 착잡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남의 배에 와서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하고 짜증낼만한 일이 아닐까요? 그야말로 말씀이 밥 먹여 주나? 어떤 분이 불평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처럼 만날 말씀, 말씀만 하나? 시몬이야말로 신경질을 낼 만하지 않습니까?
이런 시몬의 형편을 예수님이 모르실 리가 없지요.
- 너 지금 심신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
- 너는 지금 물고기가 배에 차고 넘쳤으면 좋겠지..
- 네게는 돈벌이가 중요니까 말이다.
- 집에서 너를 기다리는 식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깝지...
- 그래서 눈물이 나려고 하지...
- 그런데 정작 내일의 희망 또한 막연한 것이 너를 더욱 고달프게 하겠지....
시몬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야속하리만큼 엉뚱한 모습으로 시몬의 배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계속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등등 아니겠습니까?
물고기 잡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은 땅에 운집한 군중들보다도 실은 시몬 들으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시몬에게 필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때 베드로도 가장 주의 깊게 그 말씀을 경청했을 것입니다.
- 이분이 왜 하필 내 배에 와서 이런 말씀을 하는가?
- 이분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
말씀을 다하신 후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몬은 이 호수가가 자신의 삶의 터전이요 여기서 잔뼈가 굵은 어부입니다. 나름대로 고기잡이에는 일가견과 경험과 소신과 오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알려진 대로 목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시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사는 분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시몬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정말 당치않은 헛소리입니다. 순종하기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간에 듣고 알던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봤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에 책임을 지시는 분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막 1:27)고 놀라워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의 차원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맡겨드렸습니다. 시험해 본 것이 아니라 내 맡겼다는 말입니다. 시험해 보는지 아닌지는 예수님께서 아십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단번에 그물이 찢어지게 잡혀서 요한과 야고보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게 웬 일입니까? 두 배에 나누어 실었는데도 둘 다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을 주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를 연발하는 ... 이것이 일반적인 소위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기적을 이루신 예수님의 심정과 그 계획을 헤아리기 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 곧 자기가 원하는 것들에 더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이 장면에서 시몬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축복이다. 축복이다. 덩실 덩실 춤이라고 추고 예수님,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베드로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님 무릎 아래 털썩 엎드려 졌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까 5절에서는 “선생이여“라고 했는데, 이는 단지 Mr 혹은 아무개씨 정도 되는 인간적인 호칭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여,(Lord)라고 부릅니다.
본래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으로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부터 일어난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고 있었습니다.(행 1:22-23) 그러나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자기의 배에 들어오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그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때까지는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뿐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어떠한 죄인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한 시몬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온 이사야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이상 중에(비디오처럼) 만국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봤습니다. 이는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의 환상으로라도 본 이사야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깨달은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공통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빛 되신 주님 앞에 자신의 누추한 죄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 자기방어논리, 자기주장은 간데 없고 온통 누더기 같은 죄만 남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됩니다. 여기 시몬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계셨어도 시몬이 자기중심을 고집한 나머지 그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앞에 자기의 인생을 드리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가까이 모시고 있었지만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뻔했습니다. 자기중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이라는 왕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친히 세우실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져서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자기중심적인 삶 곧 자기에게 좋게 보이는대로 살다가 처참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죄인의 자기 중심은 곧 죄 그자체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위에 인생의 배가 텅 비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온갖 잡스러운 것으로 가득하여 예수님을 못 들어오시게 막고 있는 강팍한 영혼들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 자신 밖에는 아무도 그 자기중심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내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 나는 주님을 감당한 수 없습니다.
- 나를 떠나소서. 고백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10하)
그 과정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하는 아픈 단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 우리가 처음 구원 받았을 때를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계속해서 그러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임하면 결코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되던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든 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심령에는 교만과 자기중심이 슬그머니 그 머리를 들고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저의 목자이신 김동명목사님께서 평생 강조하시던 것이 “탕자의 심정“입니다. 어쨋거나 ”나는 아버지께 돌아와 은혜 받은 탕자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분은 그것을 그리스도 군사의 차려 자세라고 했습니다. 군인의 모든 행동은 ”차렸” 으로 시작하듯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또한 차렸 자세 즉 탕자의 심정으로 부터 늘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말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의 아픈 경험을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이미 구원 받은 우리도 훈련의 과정, 자기부인의 단계가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그렇고 그런 인간적인 차원에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어떤 기사에 누구라면 다 알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처음에는 천주교인이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나중에는 불교에 귀의해서 지금은 어떤 암자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신학교를 나와서 전도사임명을 받고 전국을 다니며 간증 및 설교를 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지요. 영적으로 이토록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과연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지 이 시간 한 해를 마감하면서 또 2000년 전에 죄인들 가운데 태어나신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이 분명이 집고 넘어가야할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가 자기 방식과 경험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서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여 앞으로도 물고기 잡을 때마다 “주여 어디로 던지리이까“ 하고 물으며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삶을 계속한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가 물고기를 얼마나 많이, 어떤 방법으로 잡느냐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고기를 잡아 자기의 배를 불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던 자가. 이제는 사람을 낚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몸을 던지는 차원. 이것이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알게 하시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주시려는 차원의 삶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은 진정 자기를 포기하는 아픈 고백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시몬이 주님 앞에 엎드러지듯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자기부인을 거쳐야만 새로운 차원의 삶이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솔개의 선택이란 글을 internet에서 읽었습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새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솔개가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솔개에게서 발톱, 날개, 부리에 문제가 생기면 끝장이다.
이 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재활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사는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 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과정을 시작한다.
1.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2.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3. 그 후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누리게 되는 것이다.
솔개의 삶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스러운 재탄생 과정을 생략하고는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참으로 정교하고도 신비합니다. 이러한 솔개의 삶도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하물며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신 인간,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할까를 생각해 보니 온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솔개가 그대로 도태하는가?
다시 창공을 마음껏 비상하는가?
선택은 솔개의 몫이듯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삶은 거저 주어지지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나를 떠나소서.” 하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과정이 없이는 새로운 차원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기를 많이 잡아내다 팔고 좋아하는 시몬은 모습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는 다시 빈 배로 돌아와서 끝도 없고 의미도 없는 반복을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향한 탕자의 심정입니다.
무서워 말라, 네가 이제 사람을 취하리라.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그들은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영원한 가치를 향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고......
그리고 친히 당신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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