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200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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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주일빌립보서 3:10-14
앞으로 약 3주간 후에 저희 아들 이삭이 결혼을 합니다. 그는 이제 우리의 품을 떠나 새로운 가정으로서 출발을 하게 됩니다. 저와 아내는 그동안 모아둔 사진들을 정리하며 이삭의 앨범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저 자신도 지난 65년의 삶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며 감회에 젖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나는 것은 나의 과거는 하나의 기록으로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과 결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이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뻔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이었습니다.
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2009년 한해를 돌아보며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를 해는 시점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그런데 매년 이때가 되면 거의 반복되는 일이 있습니다.
- 좀 더 잘 할 것을 부족했었다는 한해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
- 새해에는 좀 더 계획적으로 더 의미 있게 살아야지 하는 새로운 결단
이것들을 반복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또 막연하나마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는 그런 반복을 거듭해 온 것이 지나온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런 반복 현상은 분명한 인생의 목표, 이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의 노력 이 두 가지가 원인이 되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 목숨을 걸만한 분명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가?
- 그리고 이를 위한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가?
Robert Park이란 젊은 청년이 지금 북한으로 걸어들어 갔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스스로 몸을 던졌습니다. 작은 일에 일히 일비 하며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우리들을 심히 부끄럽게 하며 우리를 심각하게 돌아보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목숨을 걸만한 목표라고 확신했기에 그리했을 것입니다. 그 형제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라톤경주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 분명한 인생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라톤 경주자와 같이 계속 달려가는 것이 그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1. 바울의 인생목표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12)입니다.
그는 본래 자기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믿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을 심각하게 핍박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신조를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행동주의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다마스커스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 가는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앞에 쓸어졌습니다. 예수라는 청년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사형집행이 되었으므로 죽은 것이 확실한데, 다시 살아서 바울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붙들린바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이다.”라는 것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사도행전 9: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바울 자신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비교하면 모두다 배설물 수준이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자신의 인생목적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바울을 창조하신 분이므로 바울보다도 바울의 인생을 더 잘 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바울을 귀한 그릇으로 쓰시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진정한 인생의 목적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잡힌 자이다.“
Chruch Leaders/ 행복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자기 확신이나 체계가 없습니다. 주관도 소신도, 삶의 원칙이나 목적, 방향도 없이 막연하고 모호하게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들어볼 기회도, 스스로 찾아보고 세워볼 기회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평생 추구해야 할 삶의 철학에 대한 깊은 대화나 훈련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가치가 빠진 자리에는 대신 물질과 성공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적이 됩니다. 성공을 전제한다면 정직이나 신실, 믿음과 같은 본질적 가치는 외면해도 괜찮다는 면죄부가 주어집니다. 정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자신의 생명과 삶에 대해서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책임져 본 일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훈련도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眞)인가를 분별해 낼 시선과 안목도 없습니다. 그저 즉각적인 만족과 성공을 보장해 줄 것 같으면 이단종교, 건강치 못한 사상, 사기, 사채, 인신매매 등 어떤 것에라도 자신을 속수무책으로 내어줄 수 있는 위험한 영적 무정부(anomie)상태입니다.
안타깝고 두렵게도 요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무정부 상태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시인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혼의 주인이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내면에는 아무 생각이나 느낌 또는 어떤 영적 혼란이나 악한 귀신의 세력도 마구 들어와 수탈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황무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그저 한 순간에 구원받기 전의 죄의 체질이 모두 바뀌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건한 의인이 되었다고 착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존재를 바꾸지만 우리의 죄의 체질을 바꾸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심령과 삶에서의 인격적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을 통해서만 주인(主人)되신 예수(말씀)와 성령이 우리를 가득 채우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 인격 속에 바른 진리체계로 가득 채워진 사람이나 교회는 어떤 부정적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자신의 삶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더 이상의 영적 수탈과 혼란으로부터 스스로와 이웃을 지켜내려는 치열한 각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부모를 통해서 창조하셨습니다.
바울을 붙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붙드셨습니다.
요한복음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손에 붙들리운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그 형벌인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투자하셨습니다. 그 고귀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대속하신 은혜를 깨닫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값을 치르고 사신바 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고, 우리는 그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를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붙잡으셨는지, 이 세상에서 제멋대로 죄짓다가 멸망할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붙잡아 주셨는지를 말합니다. 우리도 어떤 물건을 돈 주고 살 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님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붙드셨을 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예수님께 잡힌바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며,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며 한해를 결산하고 마무리해야하겠습니다.
2. 오직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달리기 경기를 하는 경주자에 비유해서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설명합니다. 바울시대에도 지금의 올림픽과 같은 달리기 경기가 있었습니다. 경주자는 푯대 곧 goal in 지점을 보고 달리지만 실은 그 뒤에 올 상급이 최종 목표입니다.
- 경주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 경주자는 오직 푯대만 바라보고 달립니다.
- 그 최종목표는 그 뒤에 올 상급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곧 마라톤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먼저 취해야할 자세는 "One thing I do"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일이건 간에 과거사에 발목을 잡혀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 과거는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성입니다.
- 과거에 붙들려 있으면 앞에 있는 푯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 과거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술책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 바울에게는 앞에 있는 푯대가 보입니다.
그 푯대 너머에 있는 상급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외교계에 종사한 한 퇴직 외교관은 미국과 한국을 이렇게 비교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과거를 기준으로 뭉치고 미국인은 미래를 중심으로 뭉친다."
즉 한국인은 고향, 家門, 학교 등 과거의 출신을 重視하여 인맥을 형성하는데 미국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미래의 主題를 가지고 사람을 모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특히 과거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과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성공한 것, 실패한 것, 승리한 것, 좌절당한 것, 정의로웠던 것, 비겁한 죄, 허물, 사랑, 미움, .....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이 뒤에 있는 것이 우리의 덜미를 잡고 있는한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고 설사 보인다고 해도 달려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볼 때 저와 여러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과연 어떤 모습, 어떤 성적을 매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것들은 우리뒤에 있는 것입니다.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잊어버려야할 대상입니다. 과거라는 시간성과 더불어 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끝날에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1월 3일 새해 첫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40일간의 기도의 장정을 시작합니다. 영적, 심적, 육체적, 치유 그리고 관계성의 회복 및 우리 교회와 각자에게 주신 비전과 꿈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이룰 위해서 우리에서 전제되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 나를 붙드신 예수님은 내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자.
- 이를 위해서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자.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라고 내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우리는 주님께 붙들리운 자 즉 주님의 포로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를 위하여 달려가야합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 우리의 영원한 목표가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힘주시고 도우시고 함께 달려가 주실 것입니다.
과거의 죄와 쓰라린 실패, 그리고 그로 인한 두려움에 빠져서 무기력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라.
앞으로 약 3주간 후에 저희 아들 이삭이 결혼을 합니다. 그는 이제 우리의 품을 떠나 새로운 가정으로서 출발을 하게 됩니다. 저와 아내는 그동안 모아둔 사진들을 정리하며 이삭의 앨범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저 자신도 지난 65년의 삶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며 감회에 젖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나는 것은 나의 과거는 하나의 기록으로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과 결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이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뻔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이었습니다.
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2009년 한해를 돌아보며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를 해는 시점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그런데 매년 이때가 되면 거의 반복되는 일이 있습니다.
- 좀 더 잘 할 것을 부족했었다는 한해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
- 새해에는 좀 더 계획적으로 더 의미 있게 살아야지 하는 새로운 결단
이것들을 반복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또 막연하나마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는 그런 반복을 거듭해 온 것이 지나온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런 반복 현상은 분명한 인생의 목표, 이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의 노력 이 두 가지가 원인이 되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 목숨을 걸만한 분명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가?
- 그리고 이를 위한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가?
Robert Park이란 젊은 청년이 지금 북한으로 걸어들어 갔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스스로 몸을 던졌습니다. 작은 일에 일히 일비 하며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우리들을 심히 부끄럽게 하며 우리를 심각하게 돌아보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목숨을 걸만한 목표라고 확신했기에 그리했을 것입니다. 그 형제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라톤경주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 분명한 인생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라톤 경주자와 같이 계속 달려가는 것이 그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1. 바울의 인생목표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12)입니다.
그는 본래 자기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믿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을 심각하게 핍박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신조를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행동주의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다마스커스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 가는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앞에 쓸어졌습니다. 예수라는 청년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사형집행이 되었으므로 죽은 것이 확실한데, 다시 살아서 바울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붙들린바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이다.”라는 것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사도행전 9: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바울 자신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비교하면 모두다 배설물 수준이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자신의 인생목적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바울을 창조하신 분이므로 바울보다도 바울의 인생을 더 잘 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바울을 귀한 그릇으로 쓰시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진정한 인생의 목적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잡힌 자이다.“
Chruch Leaders/ 행복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자기 확신이나 체계가 없습니다. 주관도 소신도, 삶의 원칙이나 목적, 방향도 없이 막연하고 모호하게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들어볼 기회도, 스스로 찾아보고 세워볼 기회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평생 추구해야 할 삶의 철학에 대한 깊은 대화나 훈련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가치가 빠진 자리에는 대신 물질과 성공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적이 됩니다. 성공을 전제한다면 정직이나 신실, 믿음과 같은 본질적 가치는 외면해도 괜찮다는 면죄부가 주어집니다. 정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자신의 생명과 삶에 대해서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책임져 본 일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훈련도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眞)인가를 분별해 낼 시선과 안목도 없습니다. 그저 즉각적인 만족과 성공을 보장해 줄 것 같으면 이단종교, 건강치 못한 사상, 사기, 사채, 인신매매 등 어떤 것에라도 자신을 속수무책으로 내어줄 수 있는 위험한 영적 무정부(anomie)상태입니다.
안타깝고 두렵게도 요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무정부 상태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시인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혼의 주인이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내면에는 아무 생각이나 느낌 또는 어떤 영적 혼란이나 악한 귀신의 세력도 마구 들어와 수탈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황무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그저 한 순간에 구원받기 전의 죄의 체질이 모두 바뀌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건한 의인이 되었다고 착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존재를 바꾸지만 우리의 죄의 체질을 바꾸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심령과 삶에서의 인격적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을 통해서만 주인(主人)되신 예수(말씀)와 성령이 우리를 가득 채우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 인격 속에 바른 진리체계로 가득 채워진 사람이나 교회는 어떤 부정적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자신의 삶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더 이상의 영적 수탈과 혼란으로부터 스스로와 이웃을 지켜내려는 치열한 각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부모를 통해서 창조하셨습니다.
바울을 붙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붙드셨습니다.
요한복음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손에 붙들리운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그 형벌인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투자하셨습니다. 그 고귀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대속하신 은혜를 깨닫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값을 치르고 사신바 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고, 우리는 그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를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붙잡으셨는지, 이 세상에서 제멋대로 죄짓다가 멸망할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붙잡아 주셨는지를 말합니다. 우리도 어떤 물건을 돈 주고 살 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님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붙드셨을 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예수님께 잡힌바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며,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며 한해를 결산하고 마무리해야하겠습니다.
2. 오직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달리기 경기를 하는 경주자에 비유해서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설명합니다. 바울시대에도 지금의 올림픽과 같은 달리기 경기가 있었습니다. 경주자는 푯대 곧 goal in 지점을 보고 달리지만 실은 그 뒤에 올 상급이 최종 목표입니다.
- 경주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 경주자는 오직 푯대만 바라보고 달립니다.
- 그 최종목표는 그 뒤에 올 상급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곧 마라톤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먼저 취해야할 자세는 "One thing I do"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에 대해서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일이건 간에 과거사에 발목을 잡혀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 과거는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성입니다.
- 과거에 붙들려 있으면 앞에 있는 푯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 과거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술책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 바울에게는 앞에 있는 푯대가 보입니다.
그 푯대 너머에 있는 상급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외교계에 종사한 한 퇴직 외교관은 미국과 한국을 이렇게 비교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과거를 기준으로 뭉치고 미국인은 미래를 중심으로 뭉친다."
즉 한국인은 고향, 家門, 학교 등 과거의 출신을 重視하여 인맥을 형성하는데 미국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미래의 主題를 가지고 사람을 모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특히 과거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과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성공한 것, 실패한 것, 승리한 것, 좌절당한 것, 정의로웠던 것, 비겁한 죄, 허물, 사랑, 미움, .....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이 뒤에 있는 것이 우리의 덜미를 잡고 있는한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고 설사 보인다고 해도 달려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볼 때 저와 여러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과연 어떤 모습, 어떤 성적을 매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것들은 우리뒤에 있는 것입니다.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잊어버려야할 대상입니다. 과거라는 시간성과 더불어 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끝날에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1월 3일 새해 첫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40일간의 기도의 장정을 시작합니다. 영적, 심적, 육체적, 치유 그리고 관계성의 회복 및 우리 교회와 각자에게 주신 비전과 꿈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이룰 위해서 우리에서 전제되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 나를 붙드신 예수님은 내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자.
- 이를 위해서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자.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라고 내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우리는 주님께 붙들리운 자 즉 주님의 포로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를 위하여 달려가야합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 우리의 영원한 목표가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힘주시고 도우시고 함께 달려가 주실 것입니다.
과거의 죄와 쓰라린 실패, 그리고 그로 인한 두려움에 빠져서 무기력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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