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의리 그리고 충성(201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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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마태복음 25:14-30
우리 한국인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정”과 “의리”를 매우 귀중한 덕목으로 여깁니다. 누구누구하고는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다든가 무엇인가를 거절하려고 해도 “의리상” 할 수 없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영어로 번역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한국 사람들 끼리만알고 느낄 수 있는 문화이며 정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고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이기도합니다. 정이 많다, 없다. 의리가 있다, 없다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가늠되기도 하고 또 관계성을 어느 정도까지 맺어야하는가를 판단할 뿐 아니라 또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 될 수 있는가에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도 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누가 정이 있고 없고 의리가 있고 없는 하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는 것으로서 곧 경험적인 것입니다.
저는 그간의 목회생활 가운데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을 보면 느낌으로 대강이라도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역시 시간이 자나고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람이 워낙 변수가 많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 자신이 과연 주님께 정과 의리를 지키는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되자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먼 길을 떠나는 주인과 그 종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사명을 맡기고 잠시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 재림하실 때 과연 제자들이 주인이신 예수님께 얼마나 충성했는가?에 따라 평가를 내리신다는 것이지요.
본문에는 두부류의 종들이 등장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 그것입니다.
* 착하고 충성된 종아, Good and faithful servant: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악하고 게으른 종아, You wicked, lazy servant: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있는 것도 빼앗기고...
두 종은 주인이 맡겨준 것으로 장사해서 배를 남겼고 또 한 종은 주인이 맡겨준 것을 자칫 손해를 끼치면 않될까 하여 땅에 단단히 묻어두었다가 원금 그대로 되돌려준 것 뿐인데, 무엇 때문에 주인은 칭찬하고 대노하는 반응을 하였을까? 그들은 단지 종일 뿐인데 말입니다.
이 문제는 종들의 성품이 착하냐, 악하냐, 충성스러운냐 게으르냐 하는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종들과 주인의 관계성에서 봐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관계성을 맺고 있습니다. 어떤 관계성은 매우 중요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칠만한가 하면 또 다른 관계성은 있으나 마나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관계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냐에 따라서 그 삶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2010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과 종들의 관계성을 살펴 보면서 우리의 영원한 주인 되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을 점검해 보고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돌아보며, 우리 서로의 관계성을 살펴보고 우리 각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주인은 종들에 대해서 잘 압니다.
본문의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 맡겨주고 떠나는 것을 볼 때 주인과 종들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에 대해서 그리고 종들은 주인에 대해서 서로 잘 알 것입니다. 이 관계성을 바탕으로 주인은 종들에게 5섯 달란트, 2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은 종들을 겪어봐서 잘 아는 주인의 판단에 기초한 것입니다.
달란트란 약 6,000데나리온 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이 남성 하루 품삯이었다니 지금으로 말하면 약 80불 x 6,000 = 480,000으로서 약 50만불(half a million Dollar)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세 사람의 종에게 각각 250만불, 100만불, 50만불 씩 나누어준 셈입니다. 큰 돈입니다. 이만한 돈을 나누어 줄때 주인은 그 동안 겪어 본 경험에 근거해서 그 종들의 그릇을 알 고 각각 감당할 만큼 주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가 돌아올 때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종은 맡겨준 것에 배를 남기고 한 종은 맡은 것을 땅에 묻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그 종은 자기의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돈 벌고, 투자하지 않고 얻는 것)
주인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입니다. 주인이 그를 아는 만큼도 그는 주인
에 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 마땅히 내 돈을 이자놀이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서 이자라도 불렸어야한다.
한다고 책망하는 것을 볼 때 이 종은 주인의 심정을 전혀 개의치 않았습
니다. 그거 불려봤자 내꺼 되나? 하는 심리이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주인의 심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들을 믿고 맡겨준 것 자체가 감사하고 그래서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열심히 충성했습니다. 이렇게 해봐야 결국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 될 터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문제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동안의 정과 사람으로서의 의리와 그리고 그 관계성에 기초한 충성이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열매를 남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악한 종에게는 그동안 주인과 맺었던 모든 관계성이 전혀 의미도 없고 작용도 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정도, 의리도 없는 정말 싹수없는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문제이었습니다. 주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종이 주인에게 관심이 없고 주인의 눈에 나게 되면 그는 존재의미가 없어집니다. 결국 있던 것 까지 빼앗기고 어두에 내어쫓긴 후에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갈며 지옥같은 삶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초한 것입니다. 충성은 고사하고 정도 의리도 배반한 결과입니다.
2,000년 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의리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만, 그들의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맹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요한복음 2:19-22)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11을 보면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 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다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여 세우신 사도들 까지도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0)
정말 정도 의리도 없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며 먹고 마시고 자고 사역하고 운명을 나누었는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마자 모두다 예수를 버렸다고 합니다. 모두다 저만 살겠다고 도망쳐버린 것입니다. 그토록 목숨 걸고 충성을 맹서하던 베드로도 역시 멀찍이서 구경꾼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막상 누군가가 “너도 그편이다.” 하니까 욕을 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들으시는 거리에서 말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얼굴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셧다고 합니다. 정말 최소한의 정도 의리도 다 저버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상념일까요?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이 성령께서 임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고 난 후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드리는 순교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정도 의리도 없이 주님을 배반했던 비겁자들이 순교자가 되는 데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성령님께 맡겨드렸을 때 일어난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각자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각각 우리에게 알맞은 분량을 주신 것입니다. 시간, 물질, 육체의 능력, 기회, 등등 모든 면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하는 정도에 따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잘 아시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은 얼마나 주셨느냐에 있지 않고 과연 우리가 얼마나 남겼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으로 나타납니다.
-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
-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분이신가?
우리는 비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달리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 보다 더욱 충성스러울 수 있고 또 충성해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돌아오셔서 나와 여러분과 자, 회계해 보자 얼마나 남겼는지 따져보자, 하실 때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예수님께 내놓을 열매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과 섭리를 가지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니, 그 전에 우리들은 서로의 관계성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요? 금년으로 제가 목회를 출발한지 꼭 28년이 됩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과 많은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지나간 과거이니 잊어버린것도 있고 잊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믿음생활이란 어디서 어디까지를 보아야하는 것인지, 어떤 한 부분에서는 상처처럼 남아있는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목회를 출발하던 1982년에 저와 아내는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모든 바치고 또 성도들과 가진 것을 다 나누리라고 결단하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돈이건 시간이건 내 자존심이건 내 가정이건 ...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사역을 해보자고 결단하고, 섬기는 종 예수님의 모습으로 자신을 불살르는 자세로 목회생활에 임하여 몸부림치듯 살아왔습니다. 필요하다면 돈도 아낌없이 주고 쓰고, 시간도, 내 몸을 드려 노동하듯 섬기고, 때로는 재 자존심을 그야말로 이 세상의 찌꺼기 취급을 받으면서 까지도 내 던지고 사역에 임해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불가능해 보이던 인생들이 거듭나고 변화되고 지도자가 되고 지금까지도 주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면 함께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동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정, 의리, 나눔, 충성의 맹세... 이 모든 것들이 단 한마디 말실수 혹은 별것도 아닌 한 사건으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경우도 또한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단번에 관계를 끊어버리고 교회를 떠납니다. 온갖 험담과 심지어 악담까지도 서슴치 않습니다. 충성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정과 의리라도 생각한다면 그럴수는 없을텐데.... 세상에서는 결코 그럴수 없는데, 만일 누군가가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 매장되고 말 터인데 왜 교회에서는 그럴 수 있는가 정말 회의가 들때도 있었습니다.
미국에 한국교회가 4천개가 넘답니다. 이곳 남가주에만도 1,200개 이상이 된다는군요. 교회가 많다 보니 선택도 쉬워서 여기서 삐치면 저리가고 저기가 마음에 안들면 또 다른 곳으로 가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
그러나 여러분,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마귀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마귀가 틈을 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나와 주위를 이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보고 비웃습니다. “저것들 천국, 하나님, 구원, 축복,... 어쩌구 하며 떠벌리기 전에, 먼저 인간부터 되라.” 고 말입니다. “나는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저렇게 살지는 않습니다.“라는 소리를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듣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한번쯤 정직하게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 친구, 성도, 동역자, 교역자에게 정과 의리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이 과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정과 의리를 지킬 수 있을까?를 정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보이는 사람의 관계에 충성할 수 없는 사람이 과연 보이지 않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을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3절)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작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곧 주인과의 관계성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성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곧 충성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충성하는 종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 자기 자신보다 주인의 심정을 생각한다.
- 자기 자신보다 주인에게 더 민감하다.(sensitive)
여러분,
주님을 향한 우리의 정, 의리 그리고 충성은 어디에 있으며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헤이라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인자가 자기의 영광으로 올 때 그 보좌에 앉아 심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분명하고 엄격하게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른 편에 있는 양과 같은 무리들에게 칭찬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마25:34-39)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바 된 한 영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비록 작은 자처럼 보이지만 주님께는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는 귀한 영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2010120”이란 표어를 정해놨습니다.
2010년 8월 첫 주일, 즉 우리 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예배모임까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영혼이 120명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거의 100명에 가까운 줄 압니다. 이제 남은 7개월 동안 약 20여명을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면 이 목표가 달성됩니다. 전세계 60억의 인구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숫자이며 목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기도로 준비하고 우리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정해 놓고 섬기며 기도하고 인도해서 주님 앞에 데려 옵시다. 이번 1월 31일 주일까지 우리 각자가 인도하여야할 한 영혼의 이름을 제출하고 함께 도전해 봅시다. 우리들은 물론 우리 주님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하시고 맡겨 주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마 25:21)
우리 한국인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정”과 “의리”를 매우 귀중한 덕목으로 여깁니다. 누구누구하고는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다든가 무엇인가를 거절하려고 해도 “의리상” 할 수 없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영어로 번역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한국 사람들 끼리만알고 느낄 수 있는 문화이며 정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이고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이기도합니다. 정이 많다, 없다. 의리가 있다, 없다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가늠되기도 하고 또 관계성을 어느 정도까지 맺어야하는가를 판단할 뿐 아니라 또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 될 수 있는가에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도 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누가 정이 있고 없고 의리가 있고 없는 하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는 것으로서 곧 경험적인 것입니다.
저는 그간의 목회생활 가운데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을 보면 느낌으로 대강이라도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역시 시간이 자나고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람이 워낙 변수가 많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 자신이 과연 주님께 정과 의리를 지키는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되자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먼 길을 떠나는 주인과 그 종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사명을 맡기고 잠시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 재림하실 때 과연 제자들이 주인이신 예수님께 얼마나 충성했는가?에 따라 평가를 내리신다는 것이지요.
본문에는 두부류의 종들이 등장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 그것입니다.
* 착하고 충성된 종아, Good and faithful servant: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악하고 게으른 종아, You wicked, lazy servant: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있는 것도 빼앗기고...
두 종은 주인이 맡겨준 것으로 장사해서 배를 남겼고 또 한 종은 주인이 맡겨준 것을 자칫 손해를 끼치면 않될까 하여 땅에 단단히 묻어두었다가 원금 그대로 되돌려준 것 뿐인데, 무엇 때문에 주인은 칭찬하고 대노하는 반응을 하였을까? 그들은 단지 종일 뿐인데 말입니다.
이 문제는 종들의 성품이 착하냐, 악하냐, 충성스러운냐 게으르냐 하는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종들과 주인의 관계성에서 봐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관계성을 맺고 있습니다. 어떤 관계성은 매우 중요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칠만한가 하면 또 다른 관계성은 있으나 마나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관계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냐에 따라서 그 삶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2010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과 종들의 관계성을 살펴 보면서 우리의 영원한 주인 되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을 점검해 보고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돌아보며, 우리 서로의 관계성을 살펴보고 우리 각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주인은 종들에 대해서 잘 압니다.
본문의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 맡겨주고 떠나는 것을 볼 때 주인과 종들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에 대해서 그리고 종들은 주인에 대해서 서로 잘 알 것입니다. 이 관계성을 바탕으로 주인은 종들에게 5섯 달란트, 2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은 종들을 겪어봐서 잘 아는 주인의 판단에 기초한 것입니다.
달란트란 약 6,000데나리온 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이 남성 하루 품삯이었다니 지금으로 말하면 약 80불 x 6,000 = 480,000으로서 약 50만불(half a million Dollar)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세 사람의 종에게 각각 250만불, 100만불, 50만불 씩 나누어준 셈입니다. 큰 돈입니다. 이만한 돈을 나누어 줄때 주인은 그 동안 겪어 본 경험에 근거해서 그 종들의 그릇을 알 고 각각 감당할 만큼 주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가 돌아올 때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종은 맡겨준 것에 배를 남기고 한 종은 맡은 것을 땅에 묻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그 종은 자기의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돈 벌고, 투자하지 않고 얻는 것)
주인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입니다. 주인이 그를 아는 만큼도 그는 주인
에 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 마땅히 내 돈을 이자놀이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서 이자라도 불렸어야한다.
한다고 책망하는 것을 볼 때 이 종은 주인의 심정을 전혀 개의치 않았습
니다. 그거 불려봤자 내꺼 되나? 하는 심리이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주인의 심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들을 믿고 맡겨준 것 자체가 감사하고 그래서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열심히 충성했습니다. 이렇게 해봐야 결국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 될 터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문제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동안의 정과 사람으로서의 의리와 그리고 그 관계성에 기초한 충성이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열매를 남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악한 종에게는 그동안 주인과 맺었던 모든 관계성이 전혀 의미도 없고 작용도 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정도, 의리도 없는 정말 싹수없는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문제이었습니다. 주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종이 주인에게 관심이 없고 주인의 눈에 나게 되면 그는 존재의미가 없어집니다. 결국 있던 것 까지 빼앗기고 어두에 내어쫓긴 후에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갈며 지옥같은 삶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초한 것입니다. 충성은 고사하고 정도 의리도 배반한 결과입니다.
2,000년 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의리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만, 그들의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맹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요한복음 2:19-22)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11을 보면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 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다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여 세우신 사도들 까지도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0)
정말 정도 의리도 없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며 먹고 마시고 자고 사역하고 운명을 나누었는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마자 모두다 예수를 버렸다고 합니다. 모두다 저만 살겠다고 도망쳐버린 것입니다. 그토록 목숨 걸고 충성을 맹서하던 베드로도 역시 멀찍이서 구경꾼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막상 누군가가 “너도 그편이다.” 하니까 욕을 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들으시는 거리에서 말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얼굴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셧다고 합니다. 정말 최소한의 정도 의리도 다 저버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상념일까요?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이 성령께서 임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고 난 후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드리는 순교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정도 의리도 없이 주님을 배반했던 비겁자들이 순교자가 되는 데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성령님께 맡겨드렸을 때 일어난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각자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각각 우리에게 알맞은 분량을 주신 것입니다. 시간, 물질, 육체의 능력, 기회, 등등 모든 면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하는 정도에 따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잘 아시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은 얼마나 주셨느냐에 있지 않고 과연 우리가 얼마나 남겼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으로 나타납니다.
-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
-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분이신가?
우리는 비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달리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 보다 더욱 충성스러울 수 있고 또 충성해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돌아오셔서 나와 여러분과 자, 회계해 보자 얼마나 남겼는지 따져보자, 하실 때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예수님께 내놓을 열매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과 섭리를 가지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니, 그 전에 우리들은 서로의 관계성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요? 금년으로 제가 목회를 출발한지 꼭 28년이 됩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과 많은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지나간 과거이니 잊어버린것도 있고 잊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믿음생활이란 어디서 어디까지를 보아야하는 것인지, 어떤 한 부분에서는 상처처럼 남아있는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목회를 출발하던 1982년에 저와 아내는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모든 바치고 또 성도들과 가진 것을 다 나누리라고 결단하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돈이건 시간이건 내 자존심이건 내 가정이건 ...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사역을 해보자고 결단하고, 섬기는 종 예수님의 모습으로 자신을 불살르는 자세로 목회생활에 임하여 몸부림치듯 살아왔습니다. 필요하다면 돈도 아낌없이 주고 쓰고, 시간도, 내 몸을 드려 노동하듯 섬기고, 때로는 재 자존심을 그야말로 이 세상의 찌꺼기 취급을 받으면서 까지도 내 던지고 사역에 임해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불가능해 보이던 인생들이 거듭나고 변화되고 지도자가 되고 지금까지도 주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면 함께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동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정, 의리, 나눔, 충성의 맹세... 이 모든 것들이 단 한마디 말실수 혹은 별것도 아닌 한 사건으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경우도 또한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단번에 관계를 끊어버리고 교회를 떠납니다. 온갖 험담과 심지어 악담까지도 서슴치 않습니다. 충성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정과 의리라도 생각한다면 그럴수는 없을텐데.... 세상에서는 결코 그럴수 없는데, 만일 누군가가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 매장되고 말 터인데 왜 교회에서는 그럴 수 있는가 정말 회의가 들때도 있었습니다.
미국에 한국교회가 4천개가 넘답니다. 이곳 남가주에만도 1,200개 이상이 된다는군요. 교회가 많다 보니 선택도 쉬워서 여기서 삐치면 저리가고 저기가 마음에 안들면 또 다른 곳으로 가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
그러나 여러분,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마귀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마귀가 틈을 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나와 주위를 이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보고 비웃습니다. “저것들 천국, 하나님, 구원, 축복,... 어쩌구 하며 떠벌리기 전에, 먼저 인간부터 되라.” 고 말입니다. “나는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저렇게 살지는 않습니다.“라는 소리를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듣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한번쯤 정직하게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 친구, 성도, 동역자, 교역자에게 정과 의리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이 과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정과 의리를 지킬 수 있을까?를 정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보이는 사람의 관계에 충성할 수 없는 사람이 과연 보이지 않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을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3절)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작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곧 주인과의 관계성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성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곧 충성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충성하는 종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 자기 자신보다 주인의 심정을 생각한다.
- 자기 자신보다 주인에게 더 민감하다.(sensitive)
여러분,
주님을 향한 우리의 정, 의리 그리고 충성은 어디에 있으며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헤이라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인자가 자기의 영광으로 올 때 그 보좌에 앉아 심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분명하고 엄격하게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른 편에 있는 양과 같은 무리들에게 칭찬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마25:34-39)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바 된 한 영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비록 작은 자처럼 보이지만 주님께는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는 귀한 영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2010120”이란 표어를 정해놨습니다.
2010년 8월 첫 주일, 즉 우리 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예배모임까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영혼이 120명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거의 100명에 가까운 줄 압니다. 이제 남은 7개월 동안 약 20여명을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면 이 목표가 달성됩니다. 전세계 60억의 인구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숫자이며 목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기도로 준비하고 우리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정해 놓고 섬기며 기도하고 인도해서 주님 앞에 데려 옵시다. 이번 1월 31일 주일까지 우리 각자가 인도하여야할 한 영혼의 이름을 제출하고 함께 도전해 봅시다. 우리들은 물론 우리 주님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하시고 맡겨 주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마 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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