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산다.(20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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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12:24-27
저의 목사님이신 김동명목사님께서 지금 그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셨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에 San Jose로 가서 주님께 가시기 전에 뵈오려고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히9:27)그러므로 누구나 한번은 육신이 죽는 것이지요. 죽으면 이 세상사가 다 그만입니다. 다 놓고 가야하고 아무것도 미련조차 둘 수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합니다.
그분은 6.25사변 직후에 공학박사가 되기 위해서 미국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기로 헌신하여 Texas에 있는 Southwester Baptist Seminary에서 공부하시고 침례교회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의 헌신을 통해서 LA한인침례교회를 비롯하여 미주에 남미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고, 또 그를 통하여 배출된 여러 교역자들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교회와 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았습니다. 지금 미국에 약 700여개의 한인침례교회가 있는데 이 또한 그의 영향력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분이 자기가 살아서 자기의 원하던 대로 공학박사가 되어 한국으로 금의환향하고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고, 유명해져서 일신의 영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대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서 스스로 맺는 이 세상에서의 열매보다 더 귀하고 영원한 것은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맺는 열매입니다. 모든 인생은 그 생의 마지막 Page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가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받는 우리 인생들의 마음을 말씀하실 때 그것을 네가지 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길가, 흙이 얇은 돌밭, 가시떨기 밭,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다른 밭들은 다 열매를 맺을 수 없지만 오직 좋은 땅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지요? 얼마나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흉년이 들어도 30배는 맺고, 평년작이면 60배, 풍작이면 100배를 맺는답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열매는 맺히는 것일까요?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은 그 주조를 보면 두꺼운 겉 껍질이 15%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속 곧 밀가루를 만들 수 있는 부분이 83% 그리고 약 2% 분량이 씨눈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씨눈이 “생명”입니다. 땅에 심기워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이 다 썩어 없어지는 동안에 생명인 씨눈이 자라고 싹이 나서 땅을 뚫고 올라와서 자란 후에 결국은 열매를 맺는 것이지요.
다이아몬드나 황금이나 그 어떤 보석이라도 땅에 심고 백년을 기다린다 해도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단 한 개도 더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아무리 좋고 위대한 것일지라도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밀알을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이 있고 또 그 속에 우리 자아가 있고 그리고 가장 깊은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생명(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죽으라고 하십니다. 육신으로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즉 육적인 죽음이 오기 전에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자아)가 죽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으면 진정한 삶으로 다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으면 살고, 자기를 위하여 살면 죽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이 되심으로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부여 된 그 사명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기를 거부하고 자기 생명을 유지한 예수님을 상상해 보셨나요?그 예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곧 죽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어정쩡한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들의 삶을 서로 바라보면 대부분 우리 껍질 즉 육신의 삶이 우리를 대표합니다. 내가 살아 움직입니다. 나의 버릇, 죄악세상에서 묻은 때국 같은 삶의 모습들과 그리고 우리 자신도 감당이 잘 않되는 우리의 자아로 인하여 나타나는 각자의 모습이 우리를 대표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다 이런 모습들입니다. 육신의 삶과 자아 중심의 삶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면 죽고, 나를 위하여 죽으면 산다.
우리 각자가 과거 죄의 삶과 그로 말미암은 삶의 껍질, 버릇과 타성 그리고 죄성으로 지배 받는 자아를 중심으로 살면 그것 자체가 지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남길 것은 죄악의 찌꺼기들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삶은 우리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그렇고 그런 죄의 열매를 맺는 악순환이 계속 되기 마련입니다. 인류는 아담 이후로 계속해서 이를 되풀이 해 왔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살면 죽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심기워져서 죽고 싹이나고 자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존심, 자아, 자기 목표, 야심, 성질, 죄의 습성, 죄의 소원, .......
이런 껍질과 자아가 죽어야 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 2:20을 읽어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말고 내 삶 속에 나타나서 설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죽은 과거의 “나”라는 유령이 아니면 이미 죽은 귀신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가 저지르는 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고, 열매 없는 것이고, 망하는 것이고, 자신이나 주위 사람이나 모두 죽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
여러분 과거의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 허상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죽이십시오.
여기에서 죽음이란 자기 부인(self denial)을 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회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EH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죽지 아니한 사울과 자신이 철저히 죽은 다윗의 인생의 결과를 극명하게 봤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철저히 살아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목적을 부인하고 자기 중심의 삶을 주장하게 됩니다.
자기가 죽지 아니한 자는 그 인생목표도 , 가치관도, 신앙의 내용도, 헌신도, 모두 자기중심적입니다. 육신대로 헌신하고, 나름대로 믿고, 세상적으로 소망을 가지고, 욕심대로 기도합니다. 자기가 살아 있으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
이와 같이 예수님은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선과 악, 누가 더 의롭고 덜 의로운 수준의 삶을 떠나서 탐심으로 대표되는 자신이 죽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기 생각, 곧 군대장관의 생각, 문둥이의 생각, 죄인의 생각이 살아있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권력 있고, 돈 많고, 명성이 있는 문둥이로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죽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었더니, 살았습니다.
(2)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주님께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손에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올려드리는 헌신이야말로 자기를 부인하는 결정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5)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forsake 즉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나의 생명, 나라는 존재는 예수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실 때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생명을 포기하고 부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마치 어떤 소년이 이미 죽은 자기 어머니의 시신과 석달 동안 함께 살았다는 엽기적인 신문기사와 방불합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아, 나의 옛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 삶의 모양이 아주 괴상망칙하고 심히 볼 상 사납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주로 모셨으면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인데 이는 단지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닮아가는 것은 말합니다. 주인을 따르지 않는 종의 삶은 불편할 뿐 아니라 그 말로는 비참합니다.
우리 앞서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
한 알이 밀알이 땅 속에 묻히고 죽듯이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떨어져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 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28)
이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이것이 육신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하는지 잘 아셨고, 그대로 행동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이미 맺으셨으며, 지금도 맺고 계시고, 앞으로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맺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때에 여기 존재합니까?
이렇게 살다가 이런 모습으로 죽어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힘들게 열심히 삽니까?
저는 심히 부족하기 짝이 없는 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큰 것을 깨닫고 이 몸 바쳐 복의 근원이 되어야겠다는 믿음이 저를 지배하였으므로 미련 없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기를 자원했습니다. 성경 즉 복음을 전하는 사명인으로 사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라고 믿어졌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영혼을 섬기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평신도 성경선생, 사역자로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김동명목사님이 강하게 권하셔서 1981년 12월13일에 갑자기 전도사 임명을 받고 약 한 달 후에 군부대가 있는 Monterey라는 소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그 4개월 후인 1982년 6월 8일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는 말씀을 믿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가 순종했을 뿐입니다. 열매는 주님께서 친히 맺으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목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섬기는 예수님의 종들이라면 모두 있는 그곳에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내가 원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목적에 쓰임 받고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명인 입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이때에 여기 왔습니까?
저의 목사님이신 김동명목사님께서 지금 그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셨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에 San Jose로 가서 주님께 가시기 전에 뵈오려고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히9:27)그러므로 누구나 한번은 육신이 죽는 것이지요. 죽으면 이 세상사가 다 그만입니다. 다 놓고 가야하고 아무것도 미련조차 둘 수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합니다.
그분은 6.25사변 직후에 공학박사가 되기 위해서 미국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기로 헌신하여 Texas에 있는 Southwester Baptist Seminary에서 공부하시고 침례교회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의 헌신을 통해서 LA한인침례교회를 비롯하여 미주에 남미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고, 또 그를 통하여 배출된 여러 교역자들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교회와 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았습니다. 지금 미국에 약 700여개의 한인침례교회가 있는데 이 또한 그의 영향력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분이 자기가 살아서 자기의 원하던 대로 공학박사가 되어 한국으로 금의환향하고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고, 유명해져서 일신의 영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대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서 스스로 맺는 이 세상에서의 열매보다 더 귀하고 영원한 것은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맺는 열매입니다. 모든 인생은 그 생의 마지막 Page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가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받는 우리 인생들의 마음을 말씀하실 때 그것을 네가지 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길가, 흙이 얇은 돌밭, 가시떨기 밭,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다른 밭들은 다 열매를 맺을 수 없지만 오직 좋은 땅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지요? 얼마나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흉년이 들어도 30배는 맺고, 평년작이면 60배, 풍작이면 100배를 맺는답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열매는 맺히는 것일까요?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은 그 주조를 보면 두꺼운 겉 껍질이 15%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속 곧 밀가루를 만들 수 있는 부분이 83% 그리고 약 2% 분량이 씨눈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씨눈이 “생명”입니다. 땅에 심기워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이 다 썩어 없어지는 동안에 생명인 씨눈이 자라고 싹이 나서 땅을 뚫고 올라와서 자란 후에 결국은 열매를 맺는 것이지요.
다이아몬드나 황금이나 그 어떤 보석이라도 땅에 심고 백년을 기다린다 해도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단 한 개도 더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아무리 좋고 위대한 것일지라도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밀알을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이 있고 또 그 속에 우리 자아가 있고 그리고 가장 깊은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생명(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죽으라고 하십니다. 육신으로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즉 육적인 죽음이 오기 전에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자아)가 죽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으면 진정한 삶으로 다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으면 살고, 자기를 위하여 살면 죽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이 되심으로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부여 된 그 사명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기를 거부하고 자기 생명을 유지한 예수님을 상상해 보셨나요?그 예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곧 죽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어정쩡한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들의 삶을 서로 바라보면 대부분 우리 껍질 즉 육신의 삶이 우리를 대표합니다. 내가 살아 움직입니다. 나의 버릇, 죄악세상에서 묻은 때국 같은 삶의 모습들과 그리고 우리 자신도 감당이 잘 않되는 우리의 자아로 인하여 나타나는 각자의 모습이 우리를 대표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다 이런 모습들입니다. 육신의 삶과 자아 중심의 삶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면 죽고, 나를 위하여 죽으면 산다.
우리 각자가 과거 죄의 삶과 그로 말미암은 삶의 껍질, 버릇과 타성 그리고 죄성으로 지배 받는 자아를 중심으로 살면 그것 자체가 지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남길 것은 죄악의 찌꺼기들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삶은 우리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그렇고 그런 죄의 열매를 맺는 악순환이 계속 되기 마련입니다. 인류는 아담 이후로 계속해서 이를 되풀이 해 왔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살면 죽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심기워져서 죽고 싹이나고 자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존심, 자아, 자기 목표, 야심, 성질, 죄의 습성, 죄의 소원, .......
이런 껍질과 자아가 죽어야 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 2:20을 읽어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말고 내 삶 속에 나타나서 설치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죽은 과거의 “나”라는 유령이 아니면 이미 죽은 귀신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가 저지르는 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고, 열매 없는 것이고, 망하는 것이고, 자신이나 주위 사람이나 모두 죽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
여러분 과거의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 허상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죽이십시오.
여기에서 죽음이란 자기 부인(self denial)을 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회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EH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죽지 아니한 사울과 자신이 철저히 죽은 다윗의 인생의 결과를 극명하게 봤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철저히 살아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목적을 부인하고 자기 중심의 삶을 주장하게 됩니다.
자기가 죽지 아니한 자는 그 인생목표도 , 가치관도, 신앙의 내용도, 헌신도, 모두 자기중심적입니다. 육신대로 헌신하고, 나름대로 믿고, 세상적으로 소망을 가지고, 욕심대로 기도합니다. 자기가 살아 있으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
이와 같이 예수님은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선과 악, 누가 더 의롭고 덜 의로운 수준의 삶을 떠나서 탐심으로 대표되는 자신이 죽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기 생각, 곧 군대장관의 생각, 문둥이의 생각, 죄인의 생각이 살아있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권력 있고, 돈 많고, 명성이 있는 문둥이로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죽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었더니, 살았습니다.
(2)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주님께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손에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올려드리는 헌신이야말로 자기를 부인하는 결정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5)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forsake 즉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나의 생명, 나라는 존재는 예수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실 때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생명을 포기하고 부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마치 어떤 소년이 이미 죽은 자기 어머니의 시신과 석달 동안 함께 살았다는 엽기적인 신문기사와 방불합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아, 나의 옛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 삶의 모양이 아주 괴상망칙하고 심히 볼 상 사납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주로 모셨으면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인데 이는 단지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닮아가는 것은 말합니다. 주인을 따르지 않는 종의 삶은 불편할 뿐 아니라 그 말로는 비참합니다.
우리 앞서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
한 알이 밀알이 땅 속에 묻히고 죽듯이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떨어져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 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28)
이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이것이 육신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하는지 잘 아셨고, 그대로 행동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이미 맺으셨으며, 지금도 맺고 계시고, 앞으로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맺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때에 여기 존재합니까?
이렇게 살다가 이런 모습으로 죽어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힘들게 열심히 삽니까?
저는 심히 부족하기 짝이 없는 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큰 것을 깨닫고 이 몸 바쳐 복의 근원이 되어야겠다는 믿음이 저를 지배하였으므로 미련 없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기를 자원했습니다. 성경 즉 복음을 전하는 사명인으로 사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라고 믿어졌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영혼을 섬기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평신도 성경선생, 사역자로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김동명목사님이 강하게 권하셔서 1981년 12월13일에 갑자기 전도사 임명을 받고 약 한 달 후에 군부대가 있는 Monterey라는 소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그 4개월 후인 1982년 6월 8일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는 말씀을 믿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제가 순종했을 뿐입니다. 열매는 주님께서 친히 맺으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목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섬기는 예수님의 종들이라면 모두 있는 그곳에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내가 원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목적에 쓰임 받고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명인 입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이때에 여기 왔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