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들을 때 결단하라" 히브리서 5:12-14 8/25/2019 > 주일 설교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church2.jpg
주일 설교

 

"설교를 들을 때 결단하라" 히브리서 5:12-14 8/25/2019

페이지 정보

본문

"설교를 들을 때 결단하라"    히브리서 5:12-14  8/25/2019

지난 화요일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어떤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모임을 통해서 기도해야겠다는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이 끝나고, 나가는데 교회당 출구에 이런 싸인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기로 결단하는 분들은 이 신청서에 사인해 주십시요”란 글이었습니다.  그 싸인을 보는 순간, 제 마음 속에 강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임에 참여해서 기도해야할 필요를 느끼면서도, 막상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하겠다는 결단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려던 중 그 사인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결단하도록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싸인을 보고 결정을 해야하나 마나 머뭇 머뭇하는 사이에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짧은 내용의 꿈이지만, 저의 신앙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꿈이었습니다. 수 많은 감동과 도전을 받으면서도, 구체적인 결단 없이 그냥 흐지부지, 어영부영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게되었습니다.  마음의 부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 꿈이었습니다.

지금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살이 동안 수 많은 일을 경험하였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이 결단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된 것, 결혼한 것, 우리들이 갖고 있는 직업, 미국으로 오게된것,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우리들의 신앙의 성장도 결단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한국을 다녀오고픈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40년 동안 한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한국을 방문하면 친구 친척가운데 전도할 대상도 많기 때문에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 아니라, 꼭 방문을 해야함에도 방문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내년이면 저희가 결혼한지 30주년도 되고해서 한국을 방문하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게될 것입니다.  여행하는데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단하지 않으면 여행도 못합니다.

물론 결단이 전부라는 말은 아닙니다.  막상 결단을 했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년초마다 새로운 결단을 하지만, 아예 잊어먹는 결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작심 3일이라고  3일이 지나면 아예 무엇을 결단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결단해봤자 소용없다고, 결단 자체를 과소평가하게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결단을 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신앙이 꼭 성장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에 결단이 없으면 결코 신앙성장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는 것, 큐티하는 것, 전도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이 결단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특별히 결단에 대해서 이야기하게된 동기는 지난 화요일에 결단에 대한  꿈을 꾼 것이 계기가되긴 하였지만, 또 한가지 결정적 이유는, 앞으로 여러분들이 새로 오실 목사님을 모시고 계속 설교를 들을 때, 결단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꼭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에 박헌준 목사님이 오셔서 우리 모두가 많은 감동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특별히 은혜가 되고 도전이 되는 설교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계속 반복되는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다는 말씀에 우리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설교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그 것 때문에 여러분이 지난 한 주동안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받은 감동으로 인해 여러분의 생각이나 행동이 삶의 방향이 가치관이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 사랑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끝났습니까? 아니면, 그 설교 참 은혜로왔다란 기억만 남아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아무리 은혜롭고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심지어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소원까지 가지더라도, 구체적으로 결단하지 않으면 변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청빙위원회에서 담임 목사님을 가장 중요한 기준이 설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설교가 절대적이라할만큼 중요한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설교가 목회자 청빙의 가장 중요한 선택조건입니다.  일반성도들도 교회를 정할 때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교회를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전도할 때도  “우리 교회 목사가 설교가 좋다"라고 전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실지로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단지 말을 잘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묵상하고 이해하고, 설교자의 영성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심정을 읽을 줄 알아야 영향력있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헌신과 지식과 기술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은혜가 넘치는 설교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억도 못하고 결단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은혜롭고 감동적인 설교가, 단지 듣고 기분이 좋았던 설교로 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즈음 성도들은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서 수 많은 설교를 읽거나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설교가 홍수같이 넘쳐 흐르다 보니까, 성도들이 설교를 심각하게 생각치 않고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회개하고 변화되려는 생각 보다는, 설교를 듣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성도들이 많은 것같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보다는 목사의 말씀으로 들으니까 그 말씀의 적용을 생각하기 보다는 설교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해서 좋았다 나빳다 혹은 잘한다 못한다로 평가하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어떤 목사님 설교 듣고 나는 이렇게 회개했다 이렇게 결단했다라고 들어본 경우는 드뭅니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려는 자세로 설교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태도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뿐 만이 아닙니다.  약 2600년전 하나님께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에스겔의 설교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서 33:30-32)  "너 사람아, 네 민족의 자손 모두가 담 밑이나 집 문간에서 네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어서 가서, 주님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 하면서, 31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너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다. 32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2600년전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고” 설교를 들으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전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고 31절과 32절에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설교자의 말을 재미있게는 듣지만 전혀 복종하려는 마음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도전하면서 질문하고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좀 더 도전적이고 감동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를 구하는 것이, 진정 그 설교말씀을 듣고 복종하려는 마음 자세때문입니까? 아니면,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에게서 느끼는 감동과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계속적인 실천으로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니라 (trained by constant practice)” (히브리서 5:12-14)

신앙생활을 오래했으므로, 남을 가르쳐야할 선생이 되었어야할 처지인데도, 계속 가르침만 받아야하는, 그것도 그것도 좀 더 성숙한 자들에 해당하는 가르침은 소화할 능력이 없어 신앙의 초보에 대해서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했던 이들의 모습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이 성숙하려면, “계속적인 실천으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계속적인 실천이 없이 훈련을 받지 못하므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할 수도 없는 어린애와 같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느냐, 얼마나 감동적인 설교를 듣느냐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 속에 계속적인 실천으로 훈련을 받느냐입니다. 단지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주 와서 설교를 듣는 것 외에 신앙의 성장을 위해 실천하므로 훈련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8월 17일 남전도회 교제 및 기도 모임 중, 박명근 형제님이 삶 가운데 조그만 결정 하나가 얼마나 영적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은혜로운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오랫동안 변화 없는 삶을 반복해서 살다가, 어느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큐티로 시작하자"란 결단을 하게되었습니다. 이 작은 결단이 그의 삶이 변화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오랫동안 수 많은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브리성도들도 수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이들은 남을 가리킬 수도 없었고 계속 애기처럼 젖을 받아먹어야만 하는 어린 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도 만약 계속적인 실천으로 훈련 받는 일이 없다면, 평생 엄마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여주듯, 평생 누가 먹여 주어야만 받아먹는 어린 아이에 머물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 목사가 하는 일은 마치 우유가 가득들은 젖병들을 가지고 와서 성도들에게 마시라고 하나씩 나누어주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오늘 우유가 맛이 있었다고 칭찬을 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우유가 맛이 없다고 인상을 찌부립니다.  이런 우유를 마시느니 차라리 눈을 감고 자면서 쉬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한 주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다가 딱 한번 와서 먹는 젖마저 제대로 먹지 않은 것을 보고, 설교자는 마음 아파하며 다음 번에는 좀 더 맛있는 우유를 가져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고 박수를 친 자나, 인상을 쓰거나 졸면서 설교를 들은 자나  실천에 대한 결단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모두 다 삶의 변화도 없고, 성장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10년 20 년 30년을 했어도, 평생 복음 증거 한번 못하고 죽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아예,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대상이 단 한 사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원수를 용서해 본적도 없는 성도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죽어도 용서 못하겠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성도도 있고, 평생 회개다운 회개 한 번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다운 사랑 한 번 못하고 죽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아무런 인생의 도전이나 목적없이 그냥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건 정말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식의 삶을 살다가 죽으라고 우리를 위해 피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삶을 살라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식의 삶을 살고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사가 주는 젖에만 의존하는 애기가 아니라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남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선생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삶을 살려면 항상, 특별히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회개나 결단하도록 노력해야할 줄압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려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한다”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설교하셨던 박헌준 목사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가능성은 제로이다”  사랑의 실천이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라는 것이 그 분의 결론이었습니다.  물론, 다 “아멘”하셨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감동을 받고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결단을 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은혜롭게 그 말씀을 들었다 하더라도 헛들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이란 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삶을 고치지 않은 채, 계속 듣기만 하는 것은 단지 설교를 즐기는 일입니다. 신자가 은혜를 받고도 삶이 그 말씀에 부응하지 않으면, 말씀의 미각은 곧 상실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면 안되겠다'는 자극이 오면, 구체적으로 결단해야합니다. 게을렀던 것을 회개했다면, 무엇이 게을렀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 구체적인 작정을 해야합니다." 

박명근 형제님이 구체적으로 결단했을 때에 변화를 경험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적은 것이라도 결단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재미가 하나도 없는 설교, 원고를 읽는 정도의 설교를 듣더라도, 여러분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면 기억해야 할 진리라고 생각하면, 게으르게 수동적인 자세로 가만히 듣고 있지만 마십시요.  적극적으로 들으십시요.  그리고, 중요한 말씀은 기록하며 들으십시요. 그리고, 한가지라도 결단하십시요.  그것이 설교를 평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듣는 귀한자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많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도 망했습니다.  그들이, 그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과 생각으로는 동의했는지 모르고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으므로 멸망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마음과 생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감동받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차라리 감동이 없더라도, 적은 것 한가지라도 결단해야합니다. 회개해야합니다.    이 것이 설교를 단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로 듣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저도 설교자로서 제가 나누는 설교에 대해서 한가지씩 결단한 것을 결심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설교를 들을 때 한가지씩이라도 결단하겠다는 자세로 설교를 들으므로 실질적인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박천민님의 댓글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주 안에서 만족하라” (9/1/19)  디모데전서 6:6-10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하게 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사는 삶은, 돈을 의존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으로 하나님과 멀어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병행될 수 없다. 부요케 되고저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전쟁 중에는 식사만 제대로 할 수 있어도 만족할 수 있었고,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이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밥 새끼만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만족하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이 현재 소유한 것으로 만족할 줄 모른다면 추구하는 부를 가진다고 해서 만족하게될까?  전도서 기자는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고 고백한다. (전 5:10)

반면,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준다” 만족할 줄 아는 경건 자체가 큰 재산이라는 뜻이다. 부대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은 부자처럼 만족할 줄 안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포하셨다. (요 6:35)  주님께서 친히 인간의 배고픔과 갈증을 채워주시고 참 만족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그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거하게 하셨다.

바울은 이 예수님때문에 아무 것도 없을 때, 굶주릴 때, 궁핍 할 때도 만족하는 것을 배웠다. 물론, 바울도 자신이 앓던 병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님께 3번이나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간구하였을 때,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 안에서 자족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주의 은혜가 그가 필요한 전부다라는 것을 배운 것이다.

주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족할 물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물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그에게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 분에 대한 갈증이 있는가?  마지막 어려운 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된다. 하나님보다는 하나님과는 상관 없는 것에서 만족을 구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갈증으로 욕망으로 가득차 있어서, 주안에서가 아니라, 주 밖에서 만족을 찾는 시대를 말한다. 이 것이 혹시 이미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격렬한 영적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싸움은 주 안에서 만족을 구하는가 아니면 주님 밖에서 만족을 구하는가의 싸움이다.  은이나 금으로가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주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만족 못하고  주님 밖에서 만족을 구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희생을 헛되이 여기는 것이다.  날마다 그 분 앞에 나아가서 그 분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 분의 사랑이 내게 필요한 전부입니다란 고백으로 예배하는 삶이 있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부해지려는 유혹과 돈을 사랑하려는 탐심으로부터의 자유를 배우고 경험하며 주안에서 자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Total 310건 2 페이지
주일 설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95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24 12-29
294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20 12-08
293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52 12-01
292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39 11-27
291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94 11-10
290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56 11-04
289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415 10-23
288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92 10-13
287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728 10-06
286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228 09-29
285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15 09-25
284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056 09-19
283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48 09-02
열람중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05 08-26
281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15 08-01

검색


사이트 정보

회사명 : 회사명 / 대표 : 대표자명
주소 : OO도 OO시 OO구 OO동 123-45
사업자 등록번호 : 123-45-67890
전화 : 02-123-4567 팩스 : 02-123-4568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 OO구 - 123호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정보책임자명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048
어제
1,278
최대
13,037
전체
2,138,206
Copyright © 소유하신 도메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