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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11:23-25 10/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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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11:23-25    10/6/2019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  (고전 11:23-25)

월남전쟁때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명된 젊은 장교가 월남으로 파병되어 소수의 병력을 인도하게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장교로서 임무를 잘 수행해서 자신이 이끌었던 부하들을 적의공격으로부터 잘 보호할 수 있었다고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에 적의 공격을 받게되었는데, 사신의 부하 중에 한명이 심하게 다친채로 뒤에 쳐져서 생명의 위험을 받게되었고,  이 젊은 장교는 자신들의 다른 부하들과 함께 진지에서 혼자 쳐져서 고통가운데 신음하는 이 병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병사를 구하러간다면 성공한다 하더라도 분명 구하러간사람역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젊은 장교는 목숨을 걸고 자신이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서 죽어가는 그 병사를 향해 기어갔습니다. 그 장교는 그 죽어가던 병사를 구하였지만, 본인은 그 과정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구조받아 살아난 병사가 미국에 돌아오게 된 후, 이 전사한 젊은 장교의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에 부근에 있게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된 그 부모님이 자기 아들이 대신 목숨을 바치므로 살려준 이 젊은 병사에 대해서 알기를 원해서, 이를 자신의 저녁식사에 초청을 했습니다.  이 초청된 젊은 병사가 자신을 살려준 장교의 부모님 댁에 도착했을 때, 술에 취한 채로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젊은 장교에 대한 감사의 자세는 전혀 없었고 기분을 언짢게 하는 농담만하였습니다.  목숨을 잃은 자식을 생각하며 이 부모님들은 이 젊은 병사의 방문이 의미있는 만남의 시간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의 수고는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 젊은 병사가 떠나고 젊은 장교의 아버지가 문을 닫을 때, 그 어머니는 주저 앉아 울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저렇게 은혜를 모르는 놈을 위해 우리의 귀한 아들이 죽어야했다니.

이런 인간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분개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은혜를 잊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인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10명을 고쳐주셨지만 그 들 중에 오직 한명만 예수님께 다시 와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들이 특별히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이것이 보편적인 우리 인간들의 속성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여러 성도님들에게 “내 아내가 한번도 내게 따듯한 밥을 해 준적이 없다”고 불평했다가 그 이후로 여러분들에게 완전히 찍힌 것을 압니다.  은혜를 잘 모른다고 지금도 두고 두고 여러분들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아도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물론, 제 경우는 조금 지나친 것이었지만, 그러나  부부간에도 서로의 은혜를 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성도들 간에도 친구들 간에도 이런 일이 종 종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같습니다.
 
실지로 성경은 인간들의 모습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롬 1:21)  그리고 말세에 사람들의 특징을 “감사치 아니한다”라고 규정합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치 아니한 것은 한 특정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첫조상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속되는 문제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과 목적과 계획을 가지시고 아담과 이브를 위해 위해 아름다운 피조물들과,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마음 것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자유와 환경을 만들어 주셨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십계명 중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매 주 7일째 되는 날, 안식하며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위하여 6일동안 세상을 지으신 그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씀아닙니까? 그리고, 또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또 한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들로  출애굽의 구원역사를 평생 기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 살게되든지,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또, 애굽으로부터 저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하라는 뜻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뿐아니라, 유월절을 철저히 지키므로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또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오순절을 그리고 광야에서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초막절을 기념하게하셨습니다. 사무엘이나 히스기야와 요시야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사들이나 모든 왕들이나 국민들이 애굽으로부터 저희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핵심 메시지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고, 출애굽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소홀히 여겼고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기억해야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잘 지키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에 의하면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고전 11:23-25)  주님의 만찬을 드는 목적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주실 자신의 몸과 피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은 선물들, 즉 죄 용서 받음과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령님을 받았음과,  영원한 상속과 영생을 받았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희생이 있을 수 없고, 이보다 더 고귀한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보다 더 귀한 구원이 있을 수 없고, 이보다 더 귀하고 놀라운 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문제는, 이 귀한 은혜를, 이 복들을 항상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기를 소원하고 결단합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겠다고 결심을 하기도합니다. 그런데 직장생활과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하면서 현실에 부딪히면 세상이 더 커 보이고 세상이 더 중요해 보이고 멋있게 보이고 능력있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도 그렇게 영향력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믿음도 무능력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것이 반복되는 전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심지어는 구원의 감격도 죄의 용서 받은 확신까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죄용서의 기쁨보다는 죄에 대한 기억으로, 죄의식으로 시달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벧후 1:9)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었다가 잊어버리고, 죄의 용서받지 못한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기억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양식 큐티 책에 소개된 간단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엄마 사랑해요!”라는 글자를 새긴 명판을 만들어서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이 어머니는 힘들 때나 사람들의 괜한 비난과 험담으로 속병을 앓을 때, “엄마 사랑해요"라는 글귀를 박은 명판을 들여다보면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라는 명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죄의식에 시달리는 나를 향하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었다"라는 말씀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만찬을 들면서 나와 여러분의 죄의 용서를 위해 죽으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해야하는가? 수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할지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명령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해야함을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첫번째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즉,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예배는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뜻이고,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서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음의 구절들도 한번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요한복음 4:23)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가지게 해주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고전 1:9)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읍니다.” (롬 4:25-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전 5:10)

방금 읽은 말씀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이 모두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가서 제사장의 도움으로 제물을 드리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로마서 1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합당한, 진정한) 예배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하고 완전한 대속제물이 되어주셨기때문에, 이제는 과거처럼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죽은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갈 필요도 없고 제사장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시고 성전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받은 자로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리는 예배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그리스도교가 모든 종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들이 믿는 신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배는 우리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됩니다.   
David Platt이란 미국 목사님이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다고 불교사원에 들르게되어 절 밖에 앉아 있다가 그 불교사원이 위치한 동네의 불교 지도자와 회교 (이스람교)지도자와 함께 대화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 지도자와 회교지도자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모든 종교가  형식적인면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할지 몰라도 결국 본질적인 문제 있어서는 모든 종교가 같다는데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그에게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David Platt목사가 대답합니다. “내가 듣기론 여러분 두 분  다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이든 최종진리든) 산정상에 계신 분이요. 이 길로 오르던 저길로 어르던 결국 그 정상에 이르러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곳에 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냐?  그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맞습니다. 당신이 우리가 하는 말을 잘 이해했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제가 한가지 묻겠습니다. 만약 이 산 꼭대기에 계신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산에서 내려오셔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셨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이 정상에 이르는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우리에게 오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잠간 생각하더니 그 것 참 좋네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했다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산꼭때기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산꼭때기에 이를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그 어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노력이나 헌신으로 하나님께 이를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입니다.  (요 3:16)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경건치 않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는 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주시므로, 우리는 놀라운 용서와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때문이라고 요한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자로서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된 의무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면 할 수록 우리는 좀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처럼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고전 2:2)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란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2.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성도간의 사랑을 위해서

신약성경 내에 20개가 넘는 서신서가 있지만, 주님의 만찬에 대해 언급된 서신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만 주님의 만찬을 드는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가?  고린도 교회야 말로 주님의 만찬을 들긴 들지만 잘못 들기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주님의 만찬을 들면서도. 부자들은 가난한 형제 자매들을 멸시하며 성도들 간의 심한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주님의 만찬을 들 때,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든다면 이런 문제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될 뿐 아니라, 다른 성도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아담과 이브의 범죄 이후, 상대방이 베푼 은혜는 잊고 잘못한 것은 잘 기억하는, 자기 잘한 것은 기억하고 자기가 못한 것은 잊어버리는 자기 중심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 속성이 하루 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면서도, 누가 실수하거나 약점이 드러나면 그것을 지적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의 특성이 아닌가요?  부부간에도 분명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면서도 대화가 잘 안되고 다투게 되기 쉬운 것도 자신의 단점을 못보고 상대방의 단점이나 실수를 잘보는 우리들의 성향때문이 아닌가요?

어제.. 김문섭 성도님을 문병하는라 병원에 갔는데, 저희 앞에 등에 침례교인이라 쓴 티셔츠를 입은  70대 중반 쯤 된 노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병을 마치고 파킹랏을 향해 가는데 제가 어떻게 갔겠습니까?  제 아내는 제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저는 전속력을 다하여 췰체어로 날라가고 있는데 어디서 목사님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빨리 가느라 첫번째 부르시는 소리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두번째인지 세번쨰인지 부르는 소리에 알아들었습니다. 노목자님 부부가 문병오셨다가 저를 보고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 한인 노인 부부들이 서로 거리를 두고 걷는 그 모습을 제자신도 똑같이 재현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본것입니다.  사실 저는 제 아내와 많이 다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소리지를 때도 있고, 부드러운 대화 즐겁고 유쾌한 대화를 잘 못합니다. 아마도 그 것은 상대방에게 감사 보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성향이 아직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감사보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습관이 있는가?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왕에게서 600억불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불과 만불을 빚진 동료를 윽박지르고 용서 못한 것이 알려지게 되고 결국 왕의 분노를 사서 감옥에 갖히는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고도, 남을 쉽게 용서 못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600억불을 탕감 받은 자란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그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쉽게 다른 사람의 만불 빚이던 백만불 빚이던 쉽게  빚도 탕감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은혜의 가치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나의 아내를 다른 형제 자매를 좀더 은혜롭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도바울이 이런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600억불 탕감받은 자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들도 마땅히 600억불 탕감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처럼 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누구도 세상적인 잣대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한 형제 한형제를 예수께서 그 한사람을 위해 죽으신 귀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로 보았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바울처럼,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란 고백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일 3:16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고 믿고 묵상하고 기억한다면 나도 사랑을 알게되고, 형제 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만한 사랑을 하게된다는 것 아닙니까?


이제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율법의 의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믿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드는데,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란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 뿐 아니라, 날마다의 삶에서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예배자가 되고 또,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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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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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11:23-25    10/6/2019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해야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명령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첫번 째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합당한, 진정한) 예배니라” (롬 1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받은 자로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 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로서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된 의무는 그리스도의 은혜
와 사랑으로 내 심령을 채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면 할 수록 좀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다. 바울처럼 “나는 여러 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고전 2:2)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란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될 것이다.

두번 째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성도간의 사랑을 위해서이다.
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만 주님의 만찬을 드는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가?  이들은 주님의 만찬을 들면서도. 부자들은 가난한 형제 자매들을 멸시하며 성도들 간의 심한 분열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이 주님의 만찬을 들 때,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만찬에 참여한다면, 이런 문제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될 뿐 아니라, 다른 성도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자들은 “그 누구도 세상적인 잣대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대하지 않는다.”  한 형제 한 형제 를 예수께서 그 한사람을 위해 죽으신 귀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된다. (요일 3:16)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 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고 믿고 묵상하고 기억한다면 나도 사랑을 알게되 고, 형제 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만한 사랑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율법의 의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 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믿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큰 은혜를 받은 자란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의 삶에서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예배자 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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