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10/1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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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그저께 알곡 장막 모임에서 각 자 돌아가면서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 중 보고싶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 분들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도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어머니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제 아내가 코스코에서 사온 통닭을 먹는데, 아내가 갑자기 요새 튀긴 닭은 값이 많이 비싸졌다는 이야기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끔 닭튀김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가 떠오르면서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지고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적이었지만 너무 보고싶은데 보지못하는 절망감과 공포가지 갖게될 정도로 어머니가 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엄마를 너무 보고싶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행히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이번 주에 애니킴자매님도 한국에 계신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일 동안 울면서 많이 힘드셨던 것을 압니다. 어머니와 이별한다는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고통 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어머니 건강상태가 좀 호전되셔서 감사한 일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는 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귀중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도 가차 없이 빼앗아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야비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 죽음을 멸망 받아야 할 원수라고 말합니다.
불행한 것은 이 죽음이 항상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다고 건강하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저도 결혼한지 딱 2년도 안되서 뇌종양이 생겼고, 이 뇌종양이 커져서 제 눈을 누르기 시작하고 눈이 아파서 아무것도 볼수 없었던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의술이 발달되지 않고 수술하지 못했다면 벌써 죽은지 오래된 생명입니다. 불과 수달 전에 김순영 성도님도 간단한 시술 중에 핏줄이 자꾸만 터져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되서, 73세가 되시기까지 단 한번도 병원에 가보신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셨던 김문섭 성도님께서, 갑자기 심장과 폐에 문제가 있어서 제때 음급치료를 받지 않으셨다면 돌아가실 뻔하셨습니다. 이 것도 사실 우연이라기 보다는 김문섭 성도님이 김순영 성도님이 어떻게 되실까해서 김순영 성도님 입원해 계신 병원에 계속 지켜보시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것도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숙 성도님도 산소 공급기를 빼면 숨을 쉴 수 없는 가운데 생명을 연명하고 계십니다. 이 조그만 교회에서 이미 돌아가신 분 또 돌아가실 뻔했던 분들 다 합치면, 지금 우리 교회식구들보다 숫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해서 질병과 위험과 삶의 문제들과 육신이 연약해지는 것과 죽음의 문제가 우리를 피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과 다른점은 무엇인가? 세상사람들과 같이 우리도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지고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망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편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들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전 4:13)
여기 바울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을 “소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가진 자들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죽음 후의 삶에 대한 소망은 그리스도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도 다 죽음 후의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무신론자들까지도 죽음 후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호주의 한 종교사회학 교수가 무신론자들 50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내세관에 대해서 조사를 했는데, 그중 34명이 이런 형태든 저런 형태든 죽음 후에도 삶이 지속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50명중 16명만이 "죽음은 그 것으로 끝이라고 믿는다"고 답했다고합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자들의 68%가 죽음 후의 삶에 대해서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인간들은 죽음 후의 삶에 관한 소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일반 종교인들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망과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어떻게 다른가? 일반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망은 그냥 추측에 근거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들이 믿는 소망의 근거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추측과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에 관해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3-4)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소망의 근거요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나, 헛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공자나 석가나 마호멧같은 다른 종교창시자들은 그들의 뼈가 담긴 무덤이나 사리탑이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겁내며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이제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 사도뿐 아니라, 이 사도들의 증거를 믿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과 박해와 심지어 순교를 당하며 이 부활의 복음, 소망의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 이 영생의 소망을 갖게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여러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는 산소망에 대해서 말씀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8-9) 6절에 보니까 그들은 여러가지 시련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박해와 궁핍으로 인해 시련을 겪고 있음에도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섬기고 사모하고 예배하는 예수님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이요 다시 오실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벧전 3:15 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여러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삶을 사니까, 세상사람들이 그들이 갖고 있는 소망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에 대해서 물어보는 분이 있습니까?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면 “당신이나 믿으십시요”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ㅁ낳이 강팍해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볼 때, 우리가 마치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가 아니라, 죽은 예수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 소망이나, 감사나 기쁨이 아니라, 낙망과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산다면, 마지 못해 사는 삶을 산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죽은 종교지도자를 섬기는 것 다른 종교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는 자로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산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저는 오늘 이에 대한 대답을 두가지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번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아가야겠습니다.
이미 저는 다른 종교창시자들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소망이 산소망인 증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 분의 죽음도 다른 종교창시자들의 죽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요일 4:10)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요 3:1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게하신 것은, 인간들이 간절히 소원하고 애원하고 부르짖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일 4:19)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영생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고 선언합니다. (딛 1:2)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과 일반종교인들의 소망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인간의 소원이나 추측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분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보내신 것입니다. (롬 8:32)
우리가 가진 산소망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사정과 필요를 더 잘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사정과 필요를 더 잘 아실 뿐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우리 자신이 느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란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이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죽음 이후에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소망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 이 말씀을 보면, 이 소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케 해 주시지만, “믿음 안에서"란 조건이 나옵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우리 쪽에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그 전절 로마서 15:12절에 답이 나와있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이새의 뿌리인, 다윗의 후손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와 구세주로 오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시지 않고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요일 4:9-10)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고 믿는만큼 산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은 자꾸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을 자꾸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분명히 선포하셨는데도 (히 8:12)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더욱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원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고 선포하셨음에도 (골 2:13) 우리는 우리의 죄를 부분적으로만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기억하고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죄의 용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지로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나눕니다. 어떤 성도님이 교회 봉사를 좀 쉬었더니, 그 구역을 맡은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 “교회일 등한히 하고 군대간 아들이 무사할 것 같애…”라고 협박을 했다는것 아닙니까? 주일성수 안하면 벌받을까봐 주일 성수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금 잘못하면 벌받지 않을까 두려움에 떱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을 인간적인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더 못한 분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 정도의 수준으로 오해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알아 가야 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서, 그 누구도 그 정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은 저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엄청나니까, 진짜 나를 이토록 사랑할까하는 의심이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과소평가 하며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의 교회식구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도를 더욱 알게 해달라는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는 소망으로 충만하게될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임을 더욱 더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롬 15:13)
두번째로, 우리가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도를 더욱 알아가야할 뿐 아니라, 실지로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해야합니다.
찬송가 539장 “이몸의 소망 무언가” 찬송가 가사를 보면 참된 소망의 삶을 사는 자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세상의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인생의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그리고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에 올지라도, 낙망하거나 절망치 않고 소망 가운데 살려면, 이 몸의 소망은 오직 주예수 뿐이다,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란 고백이 있어야한다는 가사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죽는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히려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저와 여러분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게 사는 것이 돈이요, 내게 사는 것이 건강이요, 내게 사는 것이, 재산이요 사업이요 명예요 한다면, 우리들이 의지하던, 돈이나 건강이나 재산이나 사업이나 명예가 없어질 때 낙망과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내 자식이요, 내 남편이요 내 아내요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하는 분들도 이 땅에서는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의지한다면, 그들이 내 주위에서 사라질 때 절망에 빠지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란 고백, 주님만이 나의 반석이란 고백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란 고백으로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어오는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니가 가진 재산을 의존하든지 예수님을 의존하든지 선택하라는 말씀아닙니까? 마가복음 10:21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산을 다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는 초청은 예수님의 사랑의 초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지속적인 소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년이 믿던 그 재산이 다 없어질 그 때에도 지속적이고 확고한 소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부자청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4:33) 우리 주 예수에게만 소망을 두라는 초청입니다.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재산 뿐 아니라,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마태복음 10:37)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까지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이나 자녀들은 유한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먼저 떠나든지 내가 먼저 떠나든지 해야합니다. 사실은 그들의 이 땅에서의 생명의 기간 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도 유한합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분들도 진정으로 의존하고 소망을 둘 존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눅 14:26) 이들을 실지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부모님이나 배우자나 자녀들은 영원히 의지할 대상이 못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셨습니다. 자기의 자식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알아 보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허락하셨을 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키 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원하신 하나님께 진정한 소망을 두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무너질 일을 당하여도 승리하며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시는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깊은 사랑,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이요 우리들의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질 그 날이 올지라도, 내가 의존하던 모든 것을 잃더라도 낙망치 않고 소망 가운데 사실 수 있습니까? 그럴려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내 모든 재산보다도, 그리고 그 누구보다 심지어 나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들 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기고 더 신뢰할만 하고 더 사랑하고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변치않는 대상이 있어야합니다. 그 분이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성령님을 보내주시므로 지금도 그 동일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달아 알며, 이 예수를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더욱 사랑하므로, 더욱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저께 알곡 장막 모임에서 각 자 돌아가면서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 중 보고싶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 분들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도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어머니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제 아내가 코스코에서 사온 통닭을 먹는데, 아내가 갑자기 요새 튀긴 닭은 값이 많이 비싸졌다는 이야기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끔 닭튀김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가 떠오르면서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지고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적이었지만 너무 보고싶은데 보지못하는 절망감과 공포가지 갖게될 정도로 어머니가 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엄마를 너무 보고싶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행히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이번 주에 애니킴자매님도 한국에 계신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일 동안 울면서 많이 힘드셨던 것을 압니다. 어머니와 이별한다는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고통 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어머니 건강상태가 좀 호전되셔서 감사한 일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는 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귀중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도 가차 없이 빼앗아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야비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 죽음을 멸망 받아야 할 원수라고 말합니다.
불행한 것은 이 죽음이 항상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다고 건강하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저도 결혼한지 딱 2년도 안되서 뇌종양이 생겼고, 이 뇌종양이 커져서 제 눈을 누르기 시작하고 눈이 아파서 아무것도 볼수 없었던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의술이 발달되지 않고 수술하지 못했다면 벌써 죽은지 오래된 생명입니다. 불과 수달 전에 김순영 성도님도 간단한 시술 중에 핏줄이 자꾸만 터져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되서, 73세가 되시기까지 단 한번도 병원에 가보신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셨던 김문섭 성도님께서, 갑자기 심장과 폐에 문제가 있어서 제때 음급치료를 받지 않으셨다면 돌아가실 뻔하셨습니다. 이 것도 사실 우연이라기 보다는 김문섭 성도님이 김순영 성도님이 어떻게 되실까해서 김순영 성도님 입원해 계신 병원에 계속 지켜보시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것도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숙 성도님도 산소 공급기를 빼면 숨을 쉴 수 없는 가운데 생명을 연명하고 계십니다. 이 조그만 교회에서 이미 돌아가신 분 또 돌아가실 뻔했던 분들 다 합치면, 지금 우리 교회식구들보다 숫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해서 질병과 위험과 삶의 문제들과 육신이 연약해지는 것과 죽음의 문제가 우리를 피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과 다른점은 무엇인가? 세상사람들과 같이 우리도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지고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망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편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들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전 4:13)
여기 바울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을 “소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가진 자들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죽음 후의 삶에 대한 소망은 그리스도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도 다 죽음 후의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무신론자들까지도 죽음 후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호주의 한 종교사회학 교수가 무신론자들 50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내세관에 대해서 조사를 했는데, 그중 34명이 이런 형태든 저런 형태든 죽음 후에도 삶이 지속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50명중 16명만이 "죽음은 그 것으로 끝이라고 믿는다"고 답했다고합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자들의 68%가 죽음 후의 삶에 대해서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인간들은 죽음 후의 삶에 관한 소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일반 종교인들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망과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어떻게 다른가? 일반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망은 그냥 추측에 근거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들이 믿는 소망의 근거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추측과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에 관해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3-4)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소망의 근거요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나, 헛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공자나 석가나 마호멧같은 다른 종교창시자들은 그들의 뼈가 담긴 무덤이나 사리탑이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겁내며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이제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 사도뿐 아니라, 이 사도들의 증거를 믿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과 박해와 심지어 순교를 당하며 이 부활의 복음, 소망의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 이 영생의 소망을 갖게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여러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는 산소망에 대해서 말씀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8-9) 6절에 보니까 그들은 여러가지 시련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박해와 궁핍으로 인해 시련을 겪고 있음에도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섬기고 사모하고 예배하는 예수님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이요 다시 오실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벧전 3:15 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여러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그들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삶을 사니까, 세상사람들이 그들이 갖고 있는 소망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에 대해서 물어보는 분이 있습니까?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면 “당신이나 믿으십시요”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ㅁ낳이 강팍해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볼 때, 우리가 마치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가 아니라, 죽은 예수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 소망이나, 감사나 기쁨이 아니라, 낙망과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산다면, 마지 못해 사는 삶을 산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죽은 종교지도자를 섬기는 것 다른 종교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는 자로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산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저는 오늘 이에 대한 대답을 두가지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번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아가야겠습니다.
이미 저는 다른 종교창시자들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소망이 산소망인 증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 분의 죽음도 다른 종교창시자들의 죽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요일 4:10)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요 3:1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게하신 것은, 인간들이 간절히 소원하고 애원하고 부르짖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일 4:19)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영생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고 선언합니다. (딛 1:2)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과 일반종교인들의 소망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인간의 소원이나 추측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분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도 아끼시지 않고 보내신 것입니다. (롬 8:32)
우리가 가진 산소망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사정과 필요를 더 잘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사정과 필요를 더 잘 아실 뿐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우리 자신이 느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란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이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죽음 이후에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소망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 이 말씀을 보면, 이 소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케 해 주시지만, “믿음 안에서"란 조건이 나옵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우리 쪽에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그 전절 로마서 15:12절에 답이 나와있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이새의 뿌리인, 다윗의 후손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와 구세주로 오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시지 않고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요일 4:9-10)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고 믿는만큼 산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은 자꾸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을 자꾸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분명히 선포하셨는데도 (히 8:12)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더욱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원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고 선포하셨음에도 (골 2:13) 우리는 우리의 죄를 부분적으로만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기억하고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죄의 용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지로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나눕니다. 어떤 성도님이 교회 봉사를 좀 쉬었더니, 그 구역을 맡은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 “교회일 등한히 하고 군대간 아들이 무사할 것 같애…”라고 협박을 했다는것 아닙니까? 주일성수 안하면 벌받을까봐 주일 성수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금 잘못하면 벌받지 않을까 두려움에 떱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을 인간적인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더 못한 분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 정도의 수준으로 오해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알아 가야 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서, 그 누구도 그 정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은 저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엄청나니까, 진짜 나를 이토록 사랑할까하는 의심이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과소평가 하며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의 교회식구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도를 더욱 알게 해달라는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는 소망으로 충만하게될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임을 더욱 더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롬 15:13)
두번째로, 우리가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도를 더욱 알아가야할 뿐 아니라, 실지로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해야합니다.
찬송가 539장 “이몸의 소망 무언가” 찬송가 가사를 보면 참된 소망의 삶을 사는 자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세상의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인생의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그리고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에 올지라도, 낙망하거나 절망치 않고 소망 가운데 살려면, 이 몸의 소망은 오직 주예수 뿐이다,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란 고백이 있어야한다는 가사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요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죽는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히려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저와 여러분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게 사는 것이 돈이요, 내게 사는 것이 건강이요, 내게 사는 것이, 재산이요 사업이요 명예요 한다면, 우리들이 의지하던, 돈이나 건강이나 재산이나 사업이나 명예가 없어질 때 낙망과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내 자식이요, 내 남편이요 내 아내요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하는 분들도 이 땅에서는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의지한다면, 그들이 내 주위에서 사라질 때 절망에 빠지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란 고백, 주님만이 나의 반석이란 고백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란 고백으로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어오는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니가 가진 재산을 의존하든지 예수님을 의존하든지 선택하라는 말씀아닙니까? 마가복음 10:21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산을 다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는 초청은 예수님의 사랑의 초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지속적인 소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년이 믿던 그 재산이 다 없어질 그 때에도 지속적이고 확고한 소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부자청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4:33) 우리 주 예수에게만 소망을 두라는 초청입니다.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재산 뿐 아니라,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마태복음 10:37)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까지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이나 자녀들은 유한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먼저 떠나든지 내가 먼저 떠나든지 해야합니다. 사실은 그들의 이 땅에서의 생명의 기간 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도 유한합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분들도 진정으로 의존하고 소망을 둘 존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눅 14:26) 이들을 실지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부모님이나 배우자나 자녀들은 영원히 의지할 대상이 못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셨습니다. 자기의 자식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알아 보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허락하셨을 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키 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원하신 하나님께 진정한 소망을 두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무너질 일을 당하여도 승리하며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시는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깊은 사랑,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이요 우리들의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질 그 날이 올지라도, 내가 의존하던 모든 것을 잃더라도 낙망치 않고 소망 가운데 사실 수 있습니까? 그럴려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내 모든 재산보다도, 그리고 그 누구보다 심지어 나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들 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기고 더 신뢰할만 하고 더 사랑하고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변치않는 대상이 있어야합니다. 그 분이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성령님을 보내주시므로 지금도 그 동일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달아 알며, 이 예수를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더욱 사랑하므로, 더욱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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