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1-3 10/2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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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1-3 10/20/2019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지난 주에 한국의 법무부 장관이었던 분이 그와 그의 가족의 범죄 혐의 때문에 결국 물러났습니다. 또, 지금부터 2년 반전에는 한국의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지금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두사람의 경우 다 나라가 혼란 스러울 정도로 국민들이 크게 문제 삼았던 사건입니다. 만약, 일반 사람들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범죄에 따른 형량을 그들이 받는 것으로 끝나고, 백성들은 그 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직접 선택한 대통령이나,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장관의 경우는 일반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한 책임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문제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 4장 1절에 보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특별한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렀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나 장관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이에 따른 특별한 권한과 또한 의무가 따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이에 따른 특별한 권한과 의무가 주어지게됩니다. 에베소서 전체에 이런 부르심에 따른 특권과 의무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예가 너무 많으니까 1장에서 나온 것들만 잠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1:5-6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6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1:11-12,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13-14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실 때는 대통령이나 장관과는 비교될 수 없는 특권과 목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과 목적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삶을 살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 말씀은 어떻게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와 교회는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므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 교회가 성령님 안에서 하나됨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사랑으로 서로 잘 용납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교회가 되도록”꼭 기도합니다. 성도들이 “복음증거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을 갖게 해달라고도 항상 기도하지만, 그러나, 그 기도보다 항상 먼저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교회가 되게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증거 너무나도 중요한 사명이고 우리가 꼭 감당해야할 사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에 우선권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약성경에 보니까, 교회 사역을 언급하기 전에 항상 교회의 하나됨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4:3절의 하나된 관계성에 관한 말씀도, (4:11,12 )교회 사역의 직분자들,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회자와 교사와 그들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기 전에 교회의 하나됨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소위 은사장으로 알려져있는 장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와 사역에 대해서 주로 설명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러나, 은사와 사역을 말하기 전에 이렇게 언급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지, 그리스인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고, 모두 한 성령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고전 12:13-14) 여러 지체들이 한몸을 이루는 교회의 관계가 은사사용과 사역의 전제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2장에도, 교회의 각 지체들이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면하는 일, 나누어 주는 일등 (12:11) 교회의 여러 사역을 말하기 전에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belong to each other) 사실을 먼저 밝히므로 (롬 12:5) 교회의 모든 은사와 사역들이 먼저 교회가 한몸이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은사나, 사역들에 앞서, 교회의 한몸된 관계가 전제됨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것은 성도들의 은사나 사역보다 성도들간의 사랑의 관계성이 더 중요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천사의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를 알며 수 많은 성경의 지식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쓸 때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풀고 희생의 삶을 사는 것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믿음, 지식, 은사보다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그 어떤 사역보다도 선행보다도 다른 지체와의 사랑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게 되면서, 다음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며 주님께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생각은 “앞으로 무슨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고 설교해야하고 인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란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 사역하는 것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어쩌면 남을 가르키고, 다스리고 남에게 설교하려고 하는 자는 많은데, 섬기고 사랑하는 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높임을 받으려는 자는 많은데 사랑하고 섬기려는 자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지난 주에 중앙일보에 실린 교회를 찾는 어떤 분의 다음과 같은 광고내용을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LA에 위치한 교회 중에서 서로 형제, 자매하며 호칭을 쓰는 교회를 아시면 이곳에 답장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광고를 읽으면서, 호칭에 상관 없이 스스럼 없는 진정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분의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이던 교회 밖이던 이런 진정한 교제를 그리워하는 분, 외로운 분들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진정한 교제를 나누며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친구들을 찾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교회 안이던 밖이던 이런 분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좀 전에 제가 읽어드린 이 광고를 읽은 분 중에 한분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싥었습니다. “질문 하시는 분 심정 이해 합니다만 한국 교포교회 에서 찾으시긴 거의 불가능 할겁니다. 호칭에 목매는 분들이 많아서…” 왜 한국교회는 그렇게 목사될라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한국교회는 교회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사랑의 관계보다는 직분과 사역을 더 앞세우는 교회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닙니까?
물론 이 것이 한국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국내로 철수하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선교사들 간의 갈등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들이 주님을 향한 헌신도 있고, 은사나 지식도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성에 있어서 실패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한국 선교사들은 미국 선교사들처럼 선교사들 간의 갈등때문에 철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의 선교사들은 아예 팀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을 일으킬 일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하면 문제가 많으니까 혼자 신앙생활하겠다하는 수준과 비슷한 것입니다. 협력해서 선교사역을 안하니까 아예 서로 타툴일도 없다는 것은 실지로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여러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됨을 지킬 때에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 각 자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혼자만 집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 다른 성도와의 갈등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다른 지체들을, 그들이 문제점이 많은 지체라 할지라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어떤 영어성경은 “모든 노력을 다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사항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야합니다. 모든 노력을 다해야합니다. 의도적인 결단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심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면서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 겸손과 온유란 말씀이 나오는데, 겸손이란 말을 킹제임스 성경은 lowliness로 번역하였습니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면, 온유란-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말할 수 있는데, 갈라디아서 6:1절에 보면 온유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온유란 문제점이 있는 형제 자매를 대할 때 가져야할 마음의 태도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 자신을 살펴보라고 말씀합니다. 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과 흠은 노력을 안해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자신의 모습은 잘 못보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보이는데, 내 눈에 있는 들보는 잘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는 생각지 못하면서 다른 형제 자매의 잘못을 비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께 충고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게 지금 불신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이 용서하라 그래도 용서 못하겠다고 하는 분, 사랑해라 그래도 사랑 못하겠다고 하는 분 자신의 판단력이 하나님보다 더 판단력이 올바르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6:3, 4에보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오히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말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되지 못했으면서 된 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나나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롬 12:3) 자기를 과대평가하다보니까 (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마십시요.” 자신을 과대 평가하다보니까, 자신을 의롭고 공정하고 객관적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생겼을 때 자신에게서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문제점을 찾게되고 서롭게 노엽게 하고 갈등이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삶과 반대의 삶이 5:25절에 대조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5:25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면 또한 성령님의 인도함대로 살아야합니다.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마십시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려면,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막상 내 자신을 철저히 부인치 못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성령님을 따르기 보다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로 갈등까지 갖게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방금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의 열매에 관한 장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므로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도함을 받기 위한 조건을 갈라디어서 5:13에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5:18-22)
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면서
20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면서
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면서
22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자는 찬양과 감사와 서로에게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 순종이 그리스도에게 순종이라 그러지 않고, 서로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이나 서로 순종하라는 말씀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서로 먼저 존경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참을 수 있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할 수 있고 결국 성령님께서 하나되심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에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1절에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면서 “ 말씀한 뒤에 막바로 “22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권고내지 명령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처럼 가장 가까와야할 사이가 서로에게 겸손치 못하고 온유치 못하고 인내치 못하고 용납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옛날에 어떤 낱말에 대해서 설명하면 상대방이 그 설명이 어떤 낱말을 뜻하는지 맞추는 TV게임에서, 할아버지가 “당신과 나사이" 그러니까, 할머니가 “평생 원수”라고 대답했던 것 여러분들 다 아시지요. 평생원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든 부부들을 연상합니다. 실지로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갈 수록, 자신의 단점보다는 상대방의 단점을 보는 자기 중심성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방을 점 점 더 답답해 합니다. “분명 자기라면 이 정도는 알텐데, 이정도는 할텐데” 상대방은 내가 점 점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하고 그리고, 나를 점 점 이해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럴 때 대답은 남편은 무조건 적으로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교회가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러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내뜻대로 살겠다는 선언일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순종하지 않더라도 남편은 무조건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이 사랑치 않더라도 아내는 무조건 순종하면 그 것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올바른 행위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 간에 그리고 서로 교회 지체로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함으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르고 성령님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됨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온유에 대해서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겸손이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라면, 온유란 타인에 대한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며 상대방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온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1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죄에 빠진 상대방을 잡아주되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주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마음자세가 온유하지 않다면 나는 상대방을 바로 잡아줄 준비가 안되있다는 말씀입니다. 온유함이 없다면, 내가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을 돕기보다 싸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온유함이 없다면 불평이나 비난으로 혹은 무시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고도 오히려 관계가 더 소원해 지고 심지어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온유한 마음 없는 부인의 충고는 잔소리로 듣거나 바가지 긁는 것으로 남편들은 듣기 쉽습니다.
그러면 나를 반대하거나, 미워하거나, 내게 못되게 구는 사람과 어떻게 하나님됨을 지킬 수 있을까?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내가 보기에 못됬거나 모자란 사람과 어떻게 하나됨을 지킬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사랑으로 서로에게 순종하므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의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겸손과 온유함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순종하며 범죄한 자인 것을 알며, 자신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려고 하고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믿는 자들은 쉽게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받으시고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것처럼, 다른 지체들에 대해 오래 참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겸손과 온유함으로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교회를 잘 지켜나가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론 부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내용은 John Piper목사님의 설교에서 배운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https://www.desiringgod.org/messages/maintain-the-unity-of-the-spirit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지난 주에 한국의 법무부 장관이었던 분이 그와 그의 가족의 범죄 혐의 때문에 결국 물러났습니다. 또, 지금부터 2년 반전에는 한국의 박근혜 전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지금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두사람의 경우 다 나라가 혼란 스러울 정도로 국민들이 크게 문제 삼았던 사건입니다. 만약, 일반 사람들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범죄에 따른 형량을 그들이 받는 것으로 끝나고, 백성들은 그 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직접 선택한 대통령이나,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장관의 경우는 일반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한 책임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문제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 4장 1절에 보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특별한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렀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나 장관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이에 따른 특별한 권한과 또한 의무가 따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이에 따른 특별한 권한과 의무가 주어지게됩니다. 에베소서 전체에 이런 부르심에 따른 특권과 의무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예가 너무 많으니까 1장에서 나온 것들만 잠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1:5-6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6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1:11-12,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13-14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실 때는 대통령이나 장관과는 비교될 수 없는 특권과 목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과 목적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삶을 살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 말씀은 어떻게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와 교회는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므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 교회가 성령님 안에서 하나됨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사랑으로 서로 잘 용납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교회가 되도록”꼭 기도합니다. 성도들이 “복음증거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을 갖게 해달라고도 항상 기도하지만, 그러나, 그 기도보다 항상 먼저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교회가 되게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증거 너무나도 중요한 사명이고 우리가 꼭 감당해야할 사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에 우선권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약성경에 보니까, 교회 사역을 언급하기 전에 항상 교회의 하나됨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4:3절의 하나된 관계성에 관한 말씀도, (4:11,12 )교회 사역의 직분자들,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회자와 교사와 그들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기 전에 교회의 하나됨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소위 은사장으로 알려져있는 장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와 사역에 대해서 주로 설명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러나, 은사와 사역을 말하기 전에 이렇게 언급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지, 그리스인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고, 모두 한 성령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고전 12:13-14) 여러 지체들이 한몸을 이루는 교회의 관계가 은사사용과 사역의 전제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2장에도, 교회의 각 지체들이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면하는 일, 나누어 주는 일등 (12:11) 교회의 여러 사역을 말하기 전에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belong to each other) 사실을 먼저 밝히므로 (롬 12:5) 교회의 모든 은사와 사역들이 먼저 교회가 한몸이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은사나, 사역들에 앞서, 교회의 한몸된 관계가 전제됨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것은 성도들의 은사나 사역보다 성도들간의 사랑의 관계성이 더 중요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천사의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를 알며 수 많은 성경의 지식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쓸 때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풀고 희생의 삶을 사는 것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믿음, 지식, 은사보다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그 어떤 사역보다도 선행보다도 다른 지체와의 사랑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게 되면서, 다음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며 주님께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생각은 “앞으로 무슨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고 설교해야하고 인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란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 사역하는 것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어쩌면 남을 가르키고, 다스리고 남에게 설교하려고 하는 자는 많은데, 섬기고 사랑하는 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높임을 받으려는 자는 많은데 사랑하고 섬기려는 자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지난 주에 중앙일보에 실린 교회를 찾는 어떤 분의 다음과 같은 광고내용을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LA에 위치한 교회 중에서 서로 형제, 자매하며 호칭을 쓰는 교회를 아시면 이곳에 답장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광고를 읽으면서, 호칭에 상관 없이 스스럼 없는 진정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분의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이던 교회 밖이던 이런 진정한 교제를 그리워하는 분, 외로운 분들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진정한 교제를 나누며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친구들을 찾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교회 안이던 밖이던 이런 분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좀 전에 제가 읽어드린 이 광고를 읽은 분 중에 한분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싥었습니다. “질문 하시는 분 심정 이해 합니다만 한국 교포교회 에서 찾으시긴 거의 불가능 할겁니다. 호칭에 목매는 분들이 많아서…” 왜 한국교회는 그렇게 목사될라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한국교회는 교회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사랑의 관계보다는 직분과 사역을 더 앞세우는 교회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닙니까?
물론 이 것이 한국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국내로 철수하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선교사들 간의 갈등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들이 주님을 향한 헌신도 있고, 은사나 지식도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성에 있어서 실패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한국 선교사들은 미국 선교사들처럼 선교사들 간의 갈등때문에 철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의 선교사들은 아예 팀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을 일으킬 일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하면 문제가 많으니까 혼자 신앙생활하겠다하는 수준과 비슷한 것입니다. 협력해서 선교사역을 안하니까 아예 서로 타툴일도 없다는 것은 실지로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여러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됨을 지킬 때에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 각 자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혼자만 집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 다른 성도와의 갈등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다른 지체들을, 그들이 문제점이 많은 지체라 할지라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어떤 영어성경은 “모든 노력을 다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사항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야합니다. 모든 노력을 다해야합니다. 의도적인 결단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심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면서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 겸손과 온유란 말씀이 나오는데, 겸손이란 말을 킹제임스 성경은 lowliness로 번역하였습니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면, 온유란-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말할 수 있는데, 갈라디아서 6:1절에 보면 온유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온유란 문제점이 있는 형제 자매를 대할 때 가져야할 마음의 태도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우리 자신을 살펴보라고 말씀합니다. 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과 흠은 노력을 안해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자신의 모습은 잘 못보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보이는데, 내 눈에 있는 들보는 잘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는 생각지 못하면서 다른 형제 자매의 잘못을 비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께 충고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게 지금 불신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이 용서하라 그래도 용서 못하겠다고 하는 분, 사랑해라 그래도 사랑 못하겠다고 하는 분 자신의 판단력이 하나님보다 더 판단력이 올바르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6:3, 4에보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오히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말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되지 못했으면서 된 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나나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롬 12:3) 자기를 과대평가하다보니까 (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마십시요.” 자신을 과대 평가하다보니까, 자신을 의롭고 공정하고 객관적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생겼을 때 자신에게서 아니라 상대방에게서 문제점을 찾게되고 서롭게 노엽게 하고 갈등이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삶과 반대의 삶이 5:25절에 대조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5:25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면 또한 성령님의 인도함대로 살아야합니다.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마십시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려면,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막상 내 자신을 철저히 부인치 못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성령님을 따르기 보다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로 갈등까지 갖게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방금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의 열매에 관한 장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므로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도함을 받기 위한 조건을 갈라디어서 5:13에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5:18-22)
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면서
20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면서
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면서
22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자는 찬양과 감사와 서로에게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 순종이 그리스도에게 순종이라 그러지 않고, 서로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이나 서로 순종하라는 말씀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서로 먼저 존경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참을 수 있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할 수 있고 결국 성령님께서 하나되심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에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1절에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면서 “ 말씀한 뒤에 막바로 “22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권고내지 명령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처럼 가장 가까와야할 사이가 서로에게 겸손치 못하고 온유치 못하고 인내치 못하고 용납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옛날에 어떤 낱말에 대해서 설명하면 상대방이 그 설명이 어떤 낱말을 뜻하는지 맞추는 TV게임에서, 할아버지가 “당신과 나사이" 그러니까, 할머니가 “평생 원수”라고 대답했던 것 여러분들 다 아시지요. 평생원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든 부부들을 연상합니다. 실지로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갈 수록, 자신의 단점보다는 상대방의 단점을 보는 자기 중심성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방을 점 점 더 답답해 합니다. “분명 자기라면 이 정도는 알텐데, 이정도는 할텐데” 상대방은 내가 점 점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하고 그리고, 나를 점 점 이해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럴 때 대답은 남편은 무조건 적으로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교회가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러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내뜻대로 살겠다는 선언일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순종하지 않더라도 남편은 무조건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이 사랑치 않더라도 아내는 무조건 순종하면 그 것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올바른 행위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 간에 그리고 서로 교회 지체로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함으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르고 성령님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됨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온유에 대해서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겸손이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라면, 온유란 타인에 대한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며 상대방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온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1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죄에 빠진 상대방을 잡아주되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주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마음자세가 온유하지 않다면 나는 상대방을 바로 잡아줄 준비가 안되있다는 말씀입니다. 온유함이 없다면, 내가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을 돕기보다 싸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온유함이 없다면 불평이나 비난으로 혹은 무시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고도 오히려 관계가 더 소원해 지고 심지어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온유한 마음 없는 부인의 충고는 잔소리로 듣거나 바가지 긁는 것으로 남편들은 듣기 쉽습니다.
그러면 나를 반대하거나, 미워하거나, 내게 못되게 구는 사람과 어떻게 하나님됨을 지킬 수 있을까?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내가 보기에 못됬거나 모자란 사람과 어떻게 하나됨을 지킬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사랑으로 서로에게 순종하므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의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겸손과 온유함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순종하며 범죄한 자인 것을 알며, 자신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려고 하고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믿는 자들은 쉽게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받으시고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것처럼, 다른 지체들에 대해 오래 참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겸손과 온유함으로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교회를 잘 지켜나가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론 부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내용은 John Piper목사님의 설교에서 배운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https://www.desiringgod.org/messages/maintain-the-unity-of-the-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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