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 5:21-6:1 11/1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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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신 분에게, 우리 대신에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1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으려면,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고후 5: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신 분에게, 우리 대신에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뒤집어 쓰시고, 우리는 대신 예수님의 의를 뒤집어 써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사람이 되게하셨다, 하나님의 의를 나누게하셨다. 하나님의 의를 행하게하셨다 등으로 번역됩니다. (God's righteousness would be produced in us. ISV).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시므로, 죄인인 우리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되었을 뿐 아니라 실지로 의로운 자가 되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두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게 여겨주신 은혜, 이 것을 칭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한 여성이 어린 딸을 태우고 운전하다 교통경찰에게 걸렸습니다. 그녀가 경찰에게 잡힌 이유는, 어린 딸을 이런아이용 안전좌석 (car seat)에 태우지 않고 운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가난해서 어린 딸의 안전좌석을 구입할만한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교통 경찰이 그녀에게 벌금 티겟을 발부하지 않았습니다. 교통법규를 위반했지만 그녀는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용서를 받은 것은 물론 감사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 가난한 여인이 돈이 없어 어린 딸을 위한 car seat을 살 수 없다면, 다음에도 계속 교통위반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동정심 많은 이 경찰이 이 여인을 위해 인근 가게로 가서 자기 돈으로 안전좌석을 구입해 주었습니다. 이 여인은 교통위반죄에서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어린이용 안전좌석을 선물로 받아서 더 이상 교통 위반 죄를 범치 않고 운전할 수 있도록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지 죄의 용서만 받았다면 우리는 과거처럼 또 죄를 범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도 되도록 선물까지 주셨습니다. 무슨 선물일까요? 갈라디아서 3:13-14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므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복을 받게하셨고 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받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더 이상 죄에 지배를 받지 않고 살도록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침례요한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두가지 목적을 선포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세요? 첫째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오셨습니다.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두번째 목적은 무엇입니까? 네복음서 전체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더 이상 죄에 지배받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 의로운 삶을 살도록 성령님을 보내신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런 명령을 하였는가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선교사로서 수 많은 교회를 세웠고 대부분의 교회는 잠간 머물며 사역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는 불과 3주내지 4주밖에는 사역을 안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바울이 1년 6개월이나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사역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 곳을 떠난 이후에, 할례파 유대인들이 그 곳에 들어와서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고후 11:4) 물론 할례파 유대인들도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들의 주장에 많은 고린도 성도들이 넘어가게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나쁜일입니까? 물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자라고 선언합니다.” (갈 5:4) 왜 사도바울이 이런 자들을 저주하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하여 주심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갈 2:21)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되고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것이때문에 이들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로만은 부족하고 선행으로 자기 노력으로 구원 받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와 구원을 부정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역사상 수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을 믿고 또 선행을 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약 500년 전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감사하게도 오늘날 한국교회들은 복음을 올바로 가르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보면 올바른 복음 보다는 변질된 복음을 가르치는 교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크고 놀랍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들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은혜 일 뿐 아니라, 죄를 정복하고 예수님을 닮아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있는 능력의 은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이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셨습니다. 4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완성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4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을 뿐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주시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그의 백성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즉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는 죄가 넘친 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 파벌이 많았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차별했습니다. 성도간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이 전혀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사도바울이 왜 고린도 교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성령님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마치 교통 법규를 어긴 여인을 용서해 줄 뿐 아니라, car seat까지 사주었는데 그 것을 사용하지 않고 애를 그냥 태우고 다니는 것보다 더한 범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여인이 선물로 받은 어린이용 차의자는 그 경찰이 몇십불 들여서 산 것이지만,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님을 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여기며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고린도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고전 3:16)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 것을 잊고 산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각자가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그러므로 가장 귀한 존재란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엄청나고 굉장한 분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럼에도 그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마치 성령님이 우리 안에 안계신 것처럼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켈리포니아 해변가를 달리는 pacifica highway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Santa Barbara를 지나고 San Luis Obispo를 지나 Hearst castle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여러분 중에 방문해보신 분 있으세요? Hearst Castle을 지은 William Randolph Hearst란 분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품 수집광일 것입니다. 제가 읽은 어떤 기사에 의하면 세계 유명예술품의 2/3를 이분이 소장했다고 할 정도로 예술품 수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이분이 어떤 귀한 예술품에 대한 기사를 읽게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발달됬다면 금방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는 상황이 많이 달랐지요. 그래서, 이 분은 그 예술품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내어 구입하려고 한 사람을 외국에 출장을 보냈습니다. 이 분이 외국에 가서 여러 달을 조사 한 뒤에 윌리암 헐스트에게 그 예술품을 결국 찾아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비싸고 귀한 걸작품이 다른데가 아니고, 윌리암 헐스트 자신의 미술품 보관창고에 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귀중한 성령님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잊고 성령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자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William Hearst에 대한 이 기사를 인용한 사람이 그 기사 뒤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백만장자 William Hearst는 자기가 이미 소유한 보물을 얻기 위해 온 세상을 다 뒤졌다. 그러나, 만약, 백만장자 William Hearst 자기가 갖고 있는 예술품 목록을 잘 읽어보았다면, 많은 돈과 시간을 낭비안해도 되었을 것이다.
저는 성경이 바로 이 예술 작품 목록과 같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실지로 성경을 보면 우리가 소유한 놀라운 보물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갖게된 새로운 정체성과 지위와 특권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이 놀라운 정체성과 특권을 잊고 살다보니까 이런 놀라운 보물을 소유했음에도 한숨 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님께서 성경의 저자로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소유한 이런 놀라운 보물들을 알려주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경을 멀리하면, 이런 모든 특권과 복들을 잊게되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게되지 않을까요? 사도바울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낡아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런가? 깨지기 쉬운 질그릇같은 우리 속에 이 보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으려면,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확인하고 믿어야할 줄 압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고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삶을 살려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2005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마리의 양이 절벽으로 뛰어내리자 그 뒤에 있던 1,500 마리나 되는 양들이 뒤따라 뛰어내려 그 중 약 3분의 1인 500마리의 양이 죽었다고합니다. 이 양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양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양같은 존재들입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는대로 쫓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4:12) 내가 보기에 푸른 풀밭으로 향한다 생각할지라도 결국 멸망의 길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근시안적입니다, 한치 앞길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이, 저와 여러분은 나를 따르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목자로 모시고 따라가는 주님의 양이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우리는 어디로 강할지를 모르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실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기 전에는 무엇이 인생의 목표이며, 무엇인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 왜 이 세상에 살아야하는지 확실히 모른채 그저 닥치는 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이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보장이기도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저의 사임 후의 계획이 무엇이냐고 걱정하면서 물어봅니다. 제 나름대로 계획을 가질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해주실 뿐 아니라, 나의 미래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따르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
이 목자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나와 같은)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16:7) 이 보혜사가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뒤에는, 계시록에 기록된대로 7교회에게 “귀있는 자는 성령님께서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고 똑같은 말씀을 반복해서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내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다 예수님의 것이란 말씀입니다)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6:15)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 주시고 (15:26) 이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켜주시고 (14:26)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때문에 그렇습니다. ( 요한복음 16:13) 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전 2;10)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죽으신 이유가 바로 성령님을 따라 살므로 그리스도를 닮아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3-4절을 다시 읽습니다.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이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셨습니다. 4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완성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속하여 주시는 은혜뿐 아니라, 성령님을 따라 살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는 삶을 살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교통위반에서 용서받고 딸을 위한 car seat (안전좌석)까지 선물받은 이 가난한 여인은 “난 평생 감사하며 살 거예요.… 그리고 여유가 생기는 대로 바로 보답할 거예요.”라고 고백했다고합니다. 이 여인이 교통경찰로부터 용서받고 car seat을 선물받았다고 해서 평생 감사하며 살고 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과 구원의 정체성과 특권과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요?
물론 이 하나님의 은혜에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을 귀하게 여기고 성령님이 쓰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할 줄 압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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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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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 5:21-6:1 11/10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죄인임에도 의롭게 여겨주신 은혜 (칭의)와 실지로 성령님을 보내시므로 의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은혜 (성화)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고,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셨다” (갈 3:13-14)
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들이는 것은? 첫째로, 유대 할례파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부족하고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을 받겠다는 율법적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하여 주심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갈 2:21)
두번째로, 성령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육신이 연약하므로, (모세의) 율법이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셨습니다. 4 그것은, 육신 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완성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로마서 8:3,4) 성령님을 따라 살며 죄를 극복하고 율법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주셨건만, 성령님을 인식조차 못하므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성화되기 보다는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과 전혀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William Hearst 자신의 예술품 목록을 보면서, 자신이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찾지 못했던 것을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도 성경을 멀리하면, 내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는조차 모르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고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한다.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뒤에는, 소아시아 지역의 7교회들에게 각 각 “귀있는 자는 성령님께서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임을 의미한다.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 주시고 (15:26) 모든 것을 가르켜주시고 (14:26)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요 (요 16:13)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고전 2;10)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귀하게 여기고 성령님이 쓰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할 줄 압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