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200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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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9-28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아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내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히되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우리 웹싸이트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클릭하면 쪽지보내기, 메일 보내기, 자기소개... 이런 것이 뜨는데, 대부분 자기소개난이 빈칸 혹은 없음이라고 나타납니다. 왜그럴까요? 자기가 누군지 밝히기 싫거나 아니면 자기가 누군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는 제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받은 무익한 종"이라고 믿기에 그렇게 표헌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너는 누구냐?" 혹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려느냐?"고 물어보십시요. 아마도 분명하게 대답을 하는 자녀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진정 내가 누구인지, 무엇하는 사람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불분명한 그야말로 불확정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을 할 수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삶을 살것인가는 자동적으로 주어집니다.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은 곧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정체성은 곧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기준이며 동시에 그 존재와 사명과 직결됩니다.
정체성의 혼돈은 자기의 앞 길이 보이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며,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데 따라서 그 삶의 내용이 결정된 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침례요한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면서 구주를 만날 준비를 하라고 공개적으로 외쳤습니다. 그의 경고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온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부터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침례요한으로 말미암아 이토록 큰 일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조사단을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자기들의 종교적 권위가 침해를 받고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었을 것입니다. 조사단들이 침례요한을 만나 질문했습니다. " Who are you?, 너는 누구냐?"
요한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나는 누구입니다. 라고 하지 않고 나는 무엇무엇이 아닙니다. 라는 엇박자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는 세상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 등등으로 미루어 생각하는 것을 침례요한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는 그리스도, 엘리야 혹은 그 선지자로 잘못 알려지기 십상입니다. 그의 인기와 명성이 가히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혹시나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할까 봐서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엘리야도 아니다.
- 그 선지자도 아니다.
그는 우선 “아니다”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고, 세상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조사단들은 더욱 헷갈린 나머지 또 다시 질무합니다.
"What do you say about yourself?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 질문이야말고 결정적인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입니다.
그는 거침없이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성경 이사야에 기록 된 바와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I am the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for the Lord. I am the voice."
침례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정의했습다.
소리란 멧세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소리는 사라지되 멧세지는 남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자기의 사명과 한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정체성이 곧 그의 사명과 삶의 내용과 한계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자기의 정체성을 잘 알았으므로 그에 걸맞는 삶을 미련 없이 영위할 수 있습니다. 사명인으로서 그는 광야에 살았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 이렇듯 그의 삶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사명인으로서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 이었고 또 그러므로 사명인의 중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침례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과 비교해서 어떤 사람인가를 확실히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선구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마치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침례요한의 삶과 사명의 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로 부터 지탄 받는 많은 교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그가 누구든 간에 자신의 사명의 범위를 넘는데서 온다. 목회자, 부교역자, 교회 직분자, 등등...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범위를 넘는데 문제와 쟁투의 원인이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 간에 자기의 사명의 범위를 넘는데서 불화가 싹튼다.
사람들은 침례요한을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 등등 으로 생각할 정도인데 정작 침례요한은 나는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일뿐이요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침례요한을 예수님은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요한 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한 사람이요, 또 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명인으로서 그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떠합니까?
정체성이 혼돈 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는 존재인지 헷갈린 나머지 자신을 그럴 듯한 모습으로 적당히 치장하거나 혹은 자신을 철저히 숨기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또 혼돈된 자아가 노출되는 것이 꺼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무리 속에, 사회의 구석에, 큰 교회 속에, .... 스스로를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마가복음 3장에 보면 회당 한편에 있는 한편 손 마른 자를 굳이 공중 앞에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감추고 싶은 불구된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들어내셨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분명히 알고 인정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들어내 놓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할 수가 없고 또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거라사의 광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는 곧 네가 누구냐는 그 정체성을 물으신 것입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습니다." 역시 그 광인은 자기가 누군지 헷갈리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온통 뒤집어 놓으실 때에 마귀는 유대인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네가 누구기에 이런 일을 하는가? 너는 누구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세력도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즉 너는 누구냐?입니다.
여러분,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우리네 삶이 매우 단순했습니다. 농부, 회사원, 군인, 공무원, 교사, 실업자, 등등...그 사람의 차림만 봐도 곧 그가 누구인지 알만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삶의 부분이 여러 모양으로 세분화된 사회를 살면서 오늘날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따라서 천의 얼굴을 가지고 사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직장, 식당, 카페, 교회, 가정, 친구들, ......언제나 다른 얼굴, 다른 모습을 하고 살다보니 인생이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그것이 stress로 나타납니다. 사실 stresss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 바쁘고, 새생활에 적응히기 바쁘고, stress 받을 틈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stress에 시달리다 보니 입만 열면 불평이요, 남을 정죄하는 것이요, 자기주장을 늘어놓는가 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머리에 든 것도 없이 그저 부유한 벌레처럼 사는 것이 현대인의 구겨진 모습이 아닌지 한번 우리 자신과 주위를 둘러봐야합니다.
너는 누구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마귀가 묻습니다.
세상이 묻습니다.
입만 열면 온갖 불평을 쏟아놓는 자를 향해서, 너는 누구냐? 네가 과연 누구이기에 불평을 해대느냐?
주위의 모든 사람을 끝없이 정죄하는 자를 향해서, 너는 누구냐? 네가 과연 누구이기에 남을 정죄할 자격이 있느냐? 네가 과연 그렇게 의로운자냐?
너는 누구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사람들과 적당히 섞이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비진리나 거짓에 적당히 타협할 때,
뭔가 비 성경적인 것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려할 때 등등...
주님은 물으신다. 너는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우리 믿음의 선재이신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사람(tent-maker)이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인 아굴라, 부리스길라 부부도 역시 tentmaker)이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너는누구냐?물었다면 무어라고 대답했을까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tent를 왜 만드는가?라고 물으면 "주님을 위해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자 유대인들과 그 제사장들이 이들을 체포해다가 신문하며 복음을 전하기를 금지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선포하며 “우리는 이일에 증인이다.”(행5:32) 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증인이다."라는 정체성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 내 갈 길이 확정됩니다.
무엇은 하고 무엇은 안하고.... 분명하게 보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시간을 통한 정체성의 표현, 내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
물질을 통한 정체성의 표현, 내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
육체를 통한 정체성의 표현, 내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
디스커버리 채널 인터넷판이 보도한 내용입니다.
방향을 알려 줄 지형지물이 없는 곳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원을 그리며 맴돈다는 것입니다.
독일 막스 플랑크 생물 인공두뇌학 연구소 과학자들은 “길 잃은 사람들이 왜 같은 장소에서 뱅뱅 도느냐?”는 대중 과학 TV 프로그램의 문의를 받고 연구에 착수했다.
이들은 처음엔 많은 사람이 상식으로 여기는 문제 자체를 부정확한 것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길을 잃으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똑바로 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들은 이를 검증하기 위해 6명은 독일의 평평한 숲 지대에서, 3명은 튀니지 남부 사하라 사막에서 몇시간동안 한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가는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들은 모두 GPS 수신기를 착용해 연구진이 이들의 경로를 분석할 수 있었다. 실험 결과 많은 사람이 아무리 직선으로 걸으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자기도 모르게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원을 그리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원을 그리며 맴 돈 사람은 흐린 날씨에 숲에서 걷던 4명과 달이 진 뒤 밤중에 사막을 걷던 1명 뿐이고 해나 달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비교적 직선으로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후속 실험으로 15명의 피실험자에게 눈을 가린 채 똑바로 걷도록 했는데 이들은 지름 20m 미만의 놀라울 정도로 작은 원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면서 원을 한 방향으로 돌다 때로 반대 방향으로 돌기도 했다.
이 연구에 대해 미국 럿거스 대학의 랜디 갤리스텔 교수는 “놀랍지 않은 것”이라면서 길을 잃고 숨진 하이커들의 대부분은 처음 길을 잃은 곳으로부터 1마일 이내 거리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는 커런트 바이올로지 최신호에 실렸다.
너는 누구냐?
이 암흑과 같은 죄악 세상에서 인생길을 가는 "너는 누구냐?"
다윗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깜깜한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 인생길에서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어둠의 자리를맴돌고 방황하다가 사라지고 말것입니다.
침례요한,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묘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예수님처럼 부활 할 것을 믿었으므로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멧세지를 전하는 소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향하여 소리 내다가 어느곳에서인지 그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선구자요, 증거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시기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
네 삶을 볼 때 너는 과연 누구냐?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마귀가 묻습니다.
세상이 묻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대답이 다르고,
마귀에게 하는 대답이 다르고,
세상에게 주는 대답이 다른... 여러 얼굴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침례요한과 같이 분명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사명인입니까?
너는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침례요한의 대답입니다.
"나는 성경 이사야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친는 자의 소리로다."
우리들 자신의 대답이어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광야 길에서 주님께서 주신 위대한 사명에 순종해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소리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아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내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히되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우리 웹싸이트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클릭하면 쪽지보내기, 메일 보내기, 자기소개... 이런 것이 뜨는데, 대부분 자기소개난이 빈칸 혹은 없음이라고 나타납니다. 왜그럴까요? 자기가 누군지 밝히기 싫거나 아니면 자기가 누군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는 제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받은 무익한 종"이라고 믿기에 그렇게 표헌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너는 누구냐?" 혹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려느냐?"고 물어보십시요. 아마도 분명하게 대답을 하는 자녀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진정 내가 누구인지, 무엇하는 사람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불분명한 그야말로 불확정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을 할 수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삶을 살것인가는 자동적으로 주어집니다.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은 곧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정체성은 곧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기준이며 동시에 그 존재와 사명과 직결됩니다.
정체성의 혼돈은 자기의 앞 길이 보이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며,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데 따라서 그 삶의 내용이 결정된 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침례요한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면서 구주를 만날 준비를 하라고 공개적으로 외쳤습니다. 그의 경고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온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부터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침례요한으로 말미암아 이토록 큰 일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조사단을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자기들의 종교적 권위가 침해를 받고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었을 것입니다. 조사단들이 침례요한을 만나 질문했습니다. " Who are you?, 너는 누구냐?"
요한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나는 누구입니다. 라고 하지 않고 나는 무엇무엇이 아닙니다. 라는 엇박자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는 세상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 등등으로 미루어 생각하는 것을 침례요한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는 그리스도, 엘리야 혹은 그 선지자로 잘못 알려지기 십상입니다. 그의 인기와 명성이 가히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혹시나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할까 봐서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엘리야도 아니다.
- 그 선지자도 아니다.
그는 우선 “아니다”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고, 세상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조사단들은 더욱 헷갈린 나머지 또 다시 질무합니다.
"What do you say about yourself?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 질문이야말고 결정적인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입니다.
그는 거침없이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성경 이사야에 기록 된 바와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I am the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for the Lord. I am the voice."
침례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정의했습다.
소리란 멧세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소리는 사라지되 멧세지는 남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자기의 사명과 한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정체성이 곧 그의 사명과 삶의 내용과 한계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자기의 정체성을 잘 알았으므로 그에 걸맞는 삶을 미련 없이 영위할 수 있습니다. 사명인으로서 그는 광야에 살았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 이렇듯 그의 삶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사명인으로서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 이었고 또 그러므로 사명인의 중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침례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과 비교해서 어떤 사람인가를 확실히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선구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마치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침례요한의 삶과 사명의 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로 부터 지탄 받는 많은 교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그가 누구든 간에 자신의 사명의 범위를 넘는데서 온다. 목회자, 부교역자, 교회 직분자, 등등...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범위를 넘는데 문제와 쟁투의 원인이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 간에 자기의 사명의 범위를 넘는데서 불화가 싹튼다.
사람들은 침례요한을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 등등 으로 생각할 정도인데 정작 침례요한은 나는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일뿐이요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침례요한을 예수님은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요한 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한 사람이요, 또 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명인으로서 그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떠합니까?
정체성이 혼돈 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는 존재인지 헷갈린 나머지 자신을 그럴 듯한 모습으로 적당히 치장하거나 혹은 자신을 철저히 숨기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또 혼돈된 자아가 노출되는 것이 꺼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무리 속에, 사회의 구석에, 큰 교회 속에, .... 스스로를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마가복음 3장에 보면 회당 한편에 있는 한편 손 마른 자를 굳이 공중 앞에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감추고 싶은 불구된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들어내셨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분명히 알고 인정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들어내 놓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할 수가 없고 또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거라사의 광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는 곧 네가 누구냐는 그 정체성을 물으신 것입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습니다." 역시 그 광인은 자기가 누군지 헷갈리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온통 뒤집어 놓으실 때에 마귀는 유대인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네가 누구기에 이런 일을 하는가? 너는 누구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세력도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즉 너는 누구냐?입니다.
여러분,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우리네 삶이 매우 단순했습니다. 농부, 회사원, 군인, 공무원, 교사, 실업자, 등등...그 사람의 차림만 봐도 곧 그가 누구인지 알만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삶의 부분이 여러 모양으로 세분화된 사회를 살면서 오늘날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따라서 천의 얼굴을 가지고 사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직장, 식당, 카페, 교회, 가정, 친구들, ......언제나 다른 얼굴, 다른 모습을 하고 살다보니 인생이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그것이 stress로 나타납니다. 사실 stresss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 바쁘고, 새생활에 적응히기 바쁘고, stress 받을 틈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stress에 시달리다 보니 입만 열면 불평이요, 남을 정죄하는 것이요, 자기주장을 늘어놓는가 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머리에 든 것도 없이 그저 부유한 벌레처럼 사는 것이 현대인의 구겨진 모습이 아닌지 한번 우리 자신과 주위를 둘러봐야합니다.
너는 누구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마귀가 묻습니다.
세상이 묻습니다.
입만 열면 온갖 불평을 쏟아놓는 자를 향해서, 너는 누구냐? 네가 과연 누구이기에 불평을 해대느냐?
주위의 모든 사람을 끝없이 정죄하는 자를 향해서, 너는 누구냐? 네가 과연 누구이기에 남을 정죄할 자격이 있느냐? 네가 과연 그렇게 의로운자냐?
너는 누구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사람들과 적당히 섞이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비진리나 거짓에 적당히 타협할 때,
뭔가 비 성경적인 것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려할 때 등등...
주님은 물으신다. 너는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우리 믿음의 선재이신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사람(tent-maker)이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인 아굴라, 부리스길라 부부도 역시 tentmaker)이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너는누구냐?물었다면 무어라고 대답했을까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tent를 왜 만드는가?라고 물으면 "주님을 위해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자 유대인들과 그 제사장들이 이들을 체포해다가 신문하며 복음을 전하기를 금지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선포하며 “우리는 이일에 증인이다.”(행5:32) 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증인이다."라는 정체성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 내 갈 길이 확정됩니다.
무엇은 하고 무엇은 안하고.... 분명하게 보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시간을 통한 정체성의 표현, 내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
물질을 통한 정체성의 표현, 내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
육체를 통한 정체성의 표현, 내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
디스커버리 채널 인터넷판이 보도한 내용입니다.
방향을 알려 줄 지형지물이 없는 곳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원을 그리며 맴돈다는 것입니다.
독일 막스 플랑크 생물 인공두뇌학 연구소 과학자들은 “길 잃은 사람들이 왜 같은 장소에서 뱅뱅 도느냐?”는 대중 과학 TV 프로그램의 문의를 받고 연구에 착수했다.
이들은 처음엔 많은 사람이 상식으로 여기는 문제 자체를 부정확한 것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길을 잃으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똑바로 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들은 이를 검증하기 위해 6명은 독일의 평평한 숲 지대에서, 3명은 튀니지 남부 사하라 사막에서 몇시간동안 한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가는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들은 모두 GPS 수신기를 착용해 연구진이 이들의 경로를 분석할 수 있었다. 실험 결과 많은 사람이 아무리 직선으로 걸으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자기도 모르게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원을 그리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원을 그리며 맴 돈 사람은 흐린 날씨에 숲에서 걷던 4명과 달이 진 뒤 밤중에 사막을 걷던 1명 뿐이고 해나 달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비교적 직선으로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후속 실험으로 15명의 피실험자에게 눈을 가린 채 똑바로 걷도록 했는데 이들은 지름 20m 미만의 놀라울 정도로 작은 원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면서 원을 한 방향으로 돌다 때로 반대 방향으로 돌기도 했다.
이 연구에 대해 미국 럿거스 대학의 랜디 갤리스텔 교수는 “놀랍지 않은 것”이라면서 길을 잃고 숨진 하이커들의 대부분은 처음 길을 잃은 곳으로부터 1마일 이내 거리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는 커런트 바이올로지 최신호에 실렸다.
너는 누구냐?
이 암흑과 같은 죄악 세상에서 인생길을 가는 "너는 누구냐?"
다윗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깜깜한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 인생길에서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어둠의 자리를맴돌고 방황하다가 사라지고 말것입니다.
침례요한,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묘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예수님처럼 부활 할 것을 믿었으므로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멧세지를 전하는 소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향하여 소리 내다가 어느곳에서인지 그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선구자요, 증거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시기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
네 삶을 볼 때 너는 과연 누구냐?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마귀가 묻습니다.
세상이 묻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대답이 다르고,
마귀에게 하는 대답이 다르고,
세상에게 주는 대답이 다른... 여러 얼굴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침례요한과 같이 분명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사명인입니까?
너는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침례요한의 대답입니다.
"나는 성경 이사야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친는 자의 소리로다."
우리들 자신의 대답이어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광야 길에서 주님께서 주신 위대한 사명에 순종해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