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 (2009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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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13-17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님께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지금 한국에서는 딸 175cm, 아들 188cm로 키우기를 목표로 세워 놓고 모두가 거의 all in을 하는 풍조라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어떤 초등학생은 키를 키워준다는 영양제를 매일 너댓 가지나 복용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학생은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작은 키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나머지, 학기 초만 되면 위염 약을 먹고 위내시경 검사를 받는 일이 반복된다고 합니다. 학급 반장인 데다 공부도, 달리기도 잘하는 학생이지만 본인은 물론 부모도 딸을 볼 때마다 걱정이 태산이라는 것이지요. 미국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167cm인데 늘 콤플렉스에 시달린 나머지 사지연장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laser로 종아리 뼈를 자르고 지지대를 꽂은 뒤 날마다 그 잘린 뼈 사이를 조금씩 벌려서 키를 늘리는 수술이라고 하는데 그결과 그의 키가 171cm로 커졌지만, 그렇게 많은 비용을 내고 매일 극도의 아픔을 참아가며 겨우 키 4cm를 늘렸다는 생각을 하면 허탈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고 말한다는군요.
그런가하면 한국에서는 성형수술이 대유행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한국 방문 때 성형외과 간판과 광고가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성형수술은 이미 외국에까지 알려져서 일본과 동남아에서 성형을 위한 관광객이 몰려온다는 뉴스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고급차를 즐겨 탄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입니다. 또 값비싼 명품 의류, 장신구, 주류 등등의 소비량이 가히 세계적수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자기 자신만의 문제라기보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볼 때마다 열등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열등의식은 사람을 괴롭히고 결국은 불행에 빠뜨립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또 정반대의 내면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가 정말 뭔 줄 아는 고질병 같은 교만입니다.
인간이 그 삶의 중심을 절대적이고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두지 않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교만과 열등의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아주 이상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잠간뿐, 곧이어 괴로움, 불만과 불행의 감정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인생은 괴롭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판결문을 봅시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없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7-19)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신 종신중노동형 및 사형판결입니다. 종신토록 중노동을 하는 사형수인 인간에게 기쁨과 행복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런 저주 받은 땅에서 스스로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있다고 오늘도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형수가 꿈과 희망이 있고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웃지못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창설하신 에덴에서 기쁨과 감사와 풍성한 삶을 누렸습니다. 최소한 선악과의 계명을 지킬 때까지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간격 없는 교제 가운데 모든 것이 풍성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서, 하나님을 유일한 기준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근심의 대상, 후회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에덴으로부터 추방되고 저주 받은 땅에서 얼굴에 땀을 흘리며 고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주듯이 그로부터 하늘 길은 꽉 닫혔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절대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는 심히 기뻐하시는 당신의 창조의 역사에 결코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가 잠시 실패한 듯 보였을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고로 그 본래의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작정하셨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풍성한 삶을 회복할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사형수들이 종신 중노동으로 괴로워하는 저주의 땅에 말입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이 때에 즉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에 이르신 때, 바로 이 때가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공적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요단강에 침례를 받으러 온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 사실로서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저주의 땅을 향하여 무심한 듯 꽉 막혀 있던 하늘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생을 한탄하며 사는 것이 숙명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하늘이 영광스럽게 열렸습니다. 그야말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열린 것이지요.
-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에게 임하심을 보시고..
비둘기 같이 내리셨다는 말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가시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침례를 받으려고 모인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봤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성령충만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거이며 하나님으로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죄인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내려 임하심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한 것이며 그 안에서 죄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지요.
인간은 죄를 짓고 동산 나무 속에 숨어서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하여 스스로를 가리었습니다. 속사람이 동기가 되어 지은 죄가 잎사귀로 가리어질리 만무하지만 인간은 이때로부터 끊임없이 자기를 옷으로 덮입혔습니다.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를 덧씨웠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여전히 들어날뿐이었습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으로 덧입힘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때까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는데, 인간의 모습을 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심히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회복 될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주스런 죄인의 운명 가운데 태어나서 두려움의 하늘을 쓰고 사는 인생들에게 주신 생명의 소식, 복된 소식, 구원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우고 따라가야 할 점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늘을 여셨으며, 성령을 내리셨으며, 이다지도 예수님을 기뻐하셨는가?를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 모든 의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겠다고 했을 때 침례요한이 극구 말렸습니다. 않됩니다. 제가 감히 .... 제가 침례를 받아야할 텐데, 당신이 받으시겠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옥신각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15절)
모든 의를 이룬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저주와 멸망에 빠진 것을 원상대로 되돌려 놓는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에베소서 1:4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즉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침례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뜻...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죄인과 같은 모습으로 회개의 침례를 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예수님도 침례요한도 순종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 를 이루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께 막혔던 하늘길이 열렸습니다.
-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내 사랑받는 자녀로서 또 그 기뻐하는 대상으로 회복 될
수 있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15:10-12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헤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
여러분,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피조의 세계에 사는 인생들의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쁨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창세 때에 심히 기뻐하시던 하나님과 함께 에덴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
본래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뻐하시는 바 된 존재”이었는데 죄로 일그러지고 망가진 삶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께 근심과 후회의 대상이 되었다고 이미 언급한 바있습니다.
선악과 하나 먹은 것이 무에 그리 죽고 사는 것인가?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곧 하나님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훼손을 초래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죄인들은 스스로 지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누더기일 뿐입니다. 더구나 죄인들은 자기의 외형적인 모습 뿐 아니라 그 내면, 곧 영혼에 누더기를 씌웠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나머지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죄를 인정할 수는 더더구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벌거 벗기운 몸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참혹하게 피 흘리시며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세상의 단 한 분이십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들에게 친히 모범이 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삶인지,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인지 친히 role model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보면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리는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세상을 보고, 자기를 보고, 남을 보고, 비교하고, 스스로 점수를 매기면서 열등의식과 교만 사이를 방황하는 불쌍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를 쓴 분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period. 인간은 하나님 앞에 더도 덜도 아닙니다. 죄인, 곧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심판의 대상이었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엡 1:4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자, 하나님의 모든 의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변화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네 말을 주장하지 말고,
죄인의 타성을 포기하고,
저주의 사슬을 십자가로 끊어버리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님께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지금 한국에서는 딸 175cm, 아들 188cm로 키우기를 목표로 세워 놓고 모두가 거의 all in을 하는 풍조라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어떤 초등학생은 키를 키워준다는 영양제를 매일 너댓 가지나 복용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학생은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작은 키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나머지, 학기 초만 되면 위염 약을 먹고 위내시경 검사를 받는 일이 반복된다고 합니다. 학급 반장인 데다 공부도, 달리기도 잘하는 학생이지만 본인은 물론 부모도 딸을 볼 때마다 걱정이 태산이라는 것이지요. 미국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167cm인데 늘 콤플렉스에 시달린 나머지 사지연장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laser로 종아리 뼈를 자르고 지지대를 꽂은 뒤 날마다 그 잘린 뼈 사이를 조금씩 벌려서 키를 늘리는 수술이라고 하는데 그결과 그의 키가 171cm로 커졌지만, 그렇게 많은 비용을 내고 매일 극도의 아픔을 참아가며 겨우 키 4cm를 늘렸다는 생각을 하면 허탈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고 말한다는군요.
그런가하면 한국에서는 성형수술이 대유행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한국 방문 때 성형외과 간판과 광고가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성형수술은 이미 외국에까지 알려져서 일본과 동남아에서 성형을 위한 관광객이 몰려온다는 뉴스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고급차를 즐겨 탄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일입니다. 또 값비싼 명품 의류, 장신구, 주류 등등의 소비량이 가히 세계적수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자기 자신만의 문제라기보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볼 때마다 열등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열등의식은 사람을 괴롭히고 결국은 불행에 빠뜨립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또 정반대의 내면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가 정말 뭔 줄 아는 고질병 같은 교만입니다.
인간이 그 삶의 중심을 절대적이고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두지 않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교만과 열등의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아주 이상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잠간뿐, 곧이어 괴로움, 불만과 불행의 감정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인생은 괴롭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판결문을 봅시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없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7-19)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신 종신중노동형 및 사형판결입니다. 종신토록 중노동을 하는 사형수인 인간에게 기쁨과 행복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런 저주 받은 땅에서 스스로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있다고 오늘도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형수가 꿈과 희망이 있고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웃지못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창설하신 에덴에서 기쁨과 감사와 풍성한 삶을 누렸습니다. 최소한 선악과의 계명을 지킬 때까지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간격 없는 교제 가운데 모든 것이 풍성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서, 하나님을 유일한 기준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근심의 대상, 후회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에덴으로부터 추방되고 저주 받은 땅에서 얼굴에 땀을 흘리며 고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주듯이 그로부터 하늘 길은 꽉 닫혔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절대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는 심히 기뻐하시는 당신의 창조의 역사에 결코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가 잠시 실패한 듯 보였을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고로 그 본래의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작정하셨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풍성한 삶을 회복할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사형수들이 종신 중노동으로 괴로워하는 저주의 땅에 말입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이 때에 즉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에 이르신 때, 바로 이 때가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공적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요단강에 침례를 받으러 온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 사실로서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저주의 땅을 향하여 무심한 듯 꽉 막혀 있던 하늘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생을 한탄하며 사는 것이 숙명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하늘이 영광스럽게 열렸습니다. 그야말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열린 것이지요.
-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에게 임하심을 보시고..
비둘기 같이 내리셨다는 말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가시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침례를 받으려고 모인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봤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성령충만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거이며 하나님으로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죄인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내려 임하심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한 것이며 그 안에서 죄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지요.
인간은 죄를 짓고 동산 나무 속에 숨어서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하여 스스로를 가리었습니다. 속사람이 동기가 되어 지은 죄가 잎사귀로 가리어질리 만무하지만 인간은 이때로부터 끊임없이 자기를 옷으로 덮입혔습니다.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를 덧씨웠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여전히 들어날뿐이었습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으로 덧입힘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때까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는데, 인간의 모습을 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심히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회복 될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주스런 죄인의 운명 가운데 태어나서 두려움의 하늘을 쓰고 사는 인생들에게 주신 생명의 소식, 복된 소식, 구원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우고 따라가야 할 점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늘을 여셨으며, 성령을 내리셨으며, 이다지도 예수님을 기뻐하셨는가?를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 모든 의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겠다고 했을 때 침례요한이 극구 말렸습니다. 않됩니다. 제가 감히 .... 제가 침례를 받아야할 텐데, 당신이 받으시겠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옥신각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15절)
모든 의를 이룬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저주와 멸망에 빠진 것을 원상대로 되돌려 놓는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에베소서 1:4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즉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침례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뜻...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죄인과 같은 모습으로 회개의 침례를 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예수님도 침례요한도 순종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 를 이루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께 막혔던 하늘길이 열렸습니다.
-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내 사랑받는 자녀로서 또 그 기뻐하는 대상으로 회복 될
수 있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15:10-12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헤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
여러분,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피조의 세계에 사는 인생들의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쁨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창세 때에 심히 기뻐하시던 하나님과 함께 에덴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
본래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뻐하시는 바 된 존재”이었는데 죄로 일그러지고 망가진 삶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께 근심과 후회의 대상이 되었다고 이미 언급한 바있습니다.
선악과 하나 먹은 것이 무에 그리 죽고 사는 것인가?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곧 하나님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훼손을 초래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죄인들은 스스로 지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누더기일 뿐입니다. 더구나 죄인들은 자기의 외형적인 모습 뿐 아니라 그 내면, 곧 영혼에 누더기를 씌웠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나머지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죄를 인정할 수는 더더구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벌거 벗기운 몸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참혹하게 피 흘리시며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세상의 단 한 분이십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들에게 친히 모범이 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삶인지,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인지 친히 role model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보면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리는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세상을 보고, 자기를 보고, 남을 보고, 비교하고, 스스로 점수를 매기면서 열등의식과 교만 사이를 방황하는 불쌍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를 쓴 분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period. 인간은 하나님 앞에 더도 덜도 아닙니다. 죄인, 곧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심판의 대상이었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엡 1:4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자, 하나님의 모든 의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변화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네 말을 주장하지 말고,
죄인의 타성을 포기하고,
저주의 사슬을 십자가로 끊어버리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