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200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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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역대상 19:1-19
빠리의 루불 박물관에 한국인 관광단이 들어왔는데, 어떤 아이가 조각품을 손으로 만져봤답니다. 아이의 호기심 때문에 그랬겠지요. 그이를 본 관리직원이 와서 아이에게 손을 대면 안 된다고 했답니다. 그때 그 아이의 엄마가 한국말로 “저의들도 남의 나라 것을 훔쳐다 놓은 주제에 무슨....” 하고 투덜대러라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읽는 순간 저는 그 아이가 자라면 어떤 사람이 될까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과 사람답게 잘 기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삶의 태도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이 남을 배려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조금은 씁쓸합니다. 공공장소에서 cell phone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큰소리로 오래 떠든다든지, 공원, 식당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마구 뛰놀게 놔둔 다든지, 화장실 사용을 지저분하게 한다든지,... 수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본일입니다. 대로변에 있는 어떤 회사건물 앞에서 노조인듯한 사람들이 빨간 머리띠를 띠고 확성기로 고성을 질러가며 데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건물에는 해당회사 말고도 다른 회사들도 많이 있을 터이고 또 수많은 행인들이 있는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자기 좋은 대로, 자기 편한 대로, 원하는대로, 주장대로 하는 습성이 배어 있는 듯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대개 오해를 잘한다는 것입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적, 감정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결국은 큰 문제로 발전합니다.
성경을 보면 죄인의 역사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과 보호의 심정으로 주셨는데 그들은 제한과 차별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먹어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동산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려는 사랑을 가지고 오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벌주실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을 거절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오해했고, 또 자가기 동생을 죽인 그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벌주시는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가룟유다는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렸고 멸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은 벌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죄의 결과 속에 태어난 우리들도 오해를 잘합니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심각한 교훈을 받아야하겠습니다.
1.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
이스라엘의 이웃나라 암몬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전에 나하스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정처 없이 헤멜 때 나하스가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던지 혹은 먹을 것을 주었던지 뭔가 다윗이 잊지못할 은혜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잠간 방랑생활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 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언제가 만나면 꼭 보답을 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수년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산에서 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이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닫는대로 찾아볼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생각하고 나하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저 했습니다. 그래서 조문사절을 보냈는데,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오해를 합니다. 이제 왕이 바뀌고 자리를 잡으려하는 때 곧 혼란한 틈을 타서 다윗이 암몬를 치려한다는 것이지요. 오해도 이런 오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해는 곧 잘못된 행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다윗이 보낸 사절단에게 망신을 주고 모욕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다윗을 모욕한 것입니다.
"암몬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밉게 한줄 안지라." (6)
암몬왕 하눈이 자기의 한짓 때문에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나름대로 방편을 세웁니다. 오해는 계속적인 오해를 낳고 또 그 쪽으로 계속 발전하게 마련입니다. 사신에게 모욕을 주어 보냈으니 상대국가가 가만 있을리 없을 테니까 무슨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강박과념에서 그는 아람을 금으로 매수해서 군사동맹을 맺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암몬은 남쪽에서 아람은 북쪽에서 포위 공격하므로 단 번에 끝장을 내자는 전략이 섰습니다.
이스라엘과 다윗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하기 이를데 없는 일입니다. 선의로 조문사절을 보냈는데, 오해하여 악의로 모욕을 주어 갚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전쟁까지 하자는 것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할 말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처구니없이 오해를 받고 또 그로 인하여 계속적인 불이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오해하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결국 오해에서 비롯하여 원수처럼 되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죄인의 속성과 그로 비롯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관계성에서 오해가 없는지 늘 살펴야하고 마귀가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하며 서로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교제해야합니다. 누가 나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나가 누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이 되고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오해의 소지가 있게 마련입니다. 암몬왕 처럼 인간적인 생각, 방백들의 말로 판단하면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매사를 판단해야합니다. 아니면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것이 되어서 결국은 오해를 낳게 됩니다. 오해를 근거로 한 모든 행동은 결국은 자기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오해로 비롯된 전쟁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대상 20장에 보면 암몬은 결국 요압장군에 의해서 철저히 멸망하고 오해를 한 장본인인 왕은 죽임을 당했으며 그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선의를 오해한 처절한 결과입니다.
2. 하나님의 성읍을 위한 전쟁
전쟁에 임하는 사람들은 그 전쟁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따라서 전쟁수행능력이 달라집니다. 70년대 월남전쟁의 패배원인을 전쟁의 이유에 대한 불신에서 찾습니다. 즉 군인들이 내가 왜,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하는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나약해집니다. 목숨을 걸 필요가 없어집니다. 당연히 전우애도 상실되게 마련입니다. 결국 미군은 견디다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지금 이락이나 아프가니스탄에 가 있는 미군들이 점점 전쟁의 목적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듭니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아람과 기타 동맹한 왕들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 주위에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은 홀로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전쟁에 임하는 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그저 자기나라 이익을 위해서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싸움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읍(13절)을 지키는 영적 전쟁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쟁을 어떻게 치루어야하는지 서로 알았습니다.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서로 간에 목숨을 건 동역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읍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운명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두 장군 요압과 아비새가 군대를 둘로 나눠서 요압은 아람군대를, 아비새는 암몬 군대를 맞아 싸우기로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람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요압은 이스라엘 뺀 자 중에서 또 빼어, 그야말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아람을 대적합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12절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제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
그들은 운명공동체이었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목숨을 건 동역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하나님의 성읍을 지켜 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신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암몬과 아람에게 포위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형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어떤 마귀의 도전과 위협에도 우리 주님의 교회를 지켜내고 주님의 백성들을 보호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하나가 무너지는 것은 곧 우리 몸이 불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이며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도와야합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저는 어제 토요일에 아내와 함께 김종숙성도님을 병원으로 방문했습니다. 병실이 환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 주일에 양목사님과 Youth group이 방문하여 아름답게 장식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실 문과 두면의 벽과 화장실 문과 할 수 있는 곳은 모두 사랑과 격려와 기도를 담은 포스터와 그림, 그리고 성구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영원한 가족"이라는 글귀가 눈에 확 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가족이며 운명공동체입니다. 창립부터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도전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도전해야할 목표가 이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보니 김종숙성도님의 얼굴도 환하고 또 힘차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호흡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호흡기 담당의사를 불러서 물어봤습니다. 그는 인공호흡기를 stop시키고 김종숙성도님이 스스로 호홉하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진전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영원한 가족, 영원한 운명공동체입니다.
둘쨰는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 봐도 어디 한군데 도움을 얻을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기의 힘과 능력을 믿었다면, 막연히 잘되겠지 하는 요행수를 바랬다면 그들은 철저히 패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 요압은 이 전쟁이 하나님의 성읍과 백성을 지켜내는 것이라는 확신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담대히 하자 !
이런 각오로 아람사람을 향하여 달려 나갈 때 그 큰 군대가 도망하고 또 그들을 믿던 암몬 군대도 덩달아 도망하였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이스라엘백성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바라보는 요압과 아비새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시시 때때로 영적 싸움에 처하게 됩니다. 소위 시험과 문제에 부디치기도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오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원수 마귀가 우리의 연약한 점을 파고들어서 우리를 와해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무너뜨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나 혹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문제 뿐아니라 공동체로서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성읍,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한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는 운명공동체로서 서로 목숨을 맡겨놓고 동역해야합니다.
이는 우리 개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에게 우리자신을 맡겨드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전진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요압이 외칩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13) 담대하라, 담대히 하자 !!!!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실 것을 믿고 나가는 자는 능력이 있습니다. 큰 군대에 맞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즉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에 대해서 많은 혼동과 다툼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 하나님의 뜻을 이미 선포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구요?
어느 날인가 어떤 바리새인의 율법사가 예수님께서 질문했습니다. 계명 중에 무엇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하도 방대해서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인지 헷갈립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에 목숨을 거는것, 이것이 모든 성경말씀에 연결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먼저 우리는 가장 큰 계명이라고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위대한 명령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헛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려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일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우리 각자가 이루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3b)
담대합시다. 담대히 합시다.
빠리의 루불 박물관에 한국인 관광단이 들어왔는데, 어떤 아이가 조각품을 손으로 만져봤답니다. 아이의 호기심 때문에 그랬겠지요. 그이를 본 관리직원이 와서 아이에게 손을 대면 안 된다고 했답니다. 그때 그 아이의 엄마가 한국말로 “저의들도 남의 나라 것을 훔쳐다 놓은 주제에 무슨....” 하고 투덜대러라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읽는 순간 저는 그 아이가 자라면 어떤 사람이 될까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과 사람답게 잘 기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삶의 태도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이 남을 배려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조금은 씁쓸합니다. 공공장소에서 cell phone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큰소리로 오래 떠든다든지, 공원, 식당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마구 뛰놀게 놔둔 다든지, 화장실 사용을 지저분하게 한다든지,... 수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본일입니다. 대로변에 있는 어떤 회사건물 앞에서 노조인듯한 사람들이 빨간 머리띠를 띠고 확성기로 고성을 질러가며 데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건물에는 해당회사 말고도 다른 회사들도 많이 있을 터이고 또 수많은 행인들이 있는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자기 좋은 대로, 자기 편한 대로, 원하는대로, 주장대로 하는 습성이 배어 있는 듯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대개 오해를 잘한다는 것입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적, 감정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결국은 큰 문제로 발전합니다.
성경을 보면 죄인의 역사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과 보호의 심정으로 주셨는데 그들은 제한과 차별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먹어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동산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려는 사랑을 가지고 오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벌주실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을 거절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오해했고, 또 자가기 동생을 죽인 그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벌주시는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가룟유다는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렸고 멸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은 벌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죄의 결과 속에 태어난 우리들도 오해를 잘합니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심각한 교훈을 받아야하겠습니다.
1.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
이스라엘의 이웃나라 암몬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전에 나하스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정처 없이 헤멜 때 나하스가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던지 혹은 먹을 것을 주었던지 뭔가 다윗이 잊지못할 은혜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잠간 방랑생활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 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언제가 만나면 꼭 보답을 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수년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산에서 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이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닫는대로 찾아볼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생각하고 나하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저 했습니다. 그래서 조문사절을 보냈는데,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오해를 합니다. 이제 왕이 바뀌고 자리를 잡으려하는 때 곧 혼란한 틈을 타서 다윗이 암몬를 치려한다는 것이지요. 오해도 이런 오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해는 곧 잘못된 행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다윗이 보낸 사절단에게 망신을 주고 모욕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다윗을 모욕한 것입니다.
"암몬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밉게 한줄 안지라." (6)
암몬왕 하눈이 자기의 한짓 때문에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나름대로 방편을 세웁니다. 오해는 계속적인 오해를 낳고 또 그 쪽으로 계속 발전하게 마련입니다. 사신에게 모욕을 주어 보냈으니 상대국가가 가만 있을리 없을 테니까 무슨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강박과념에서 그는 아람을 금으로 매수해서 군사동맹을 맺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암몬은 남쪽에서 아람은 북쪽에서 포위 공격하므로 단 번에 끝장을 내자는 전략이 섰습니다.
이스라엘과 다윗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하기 이를데 없는 일입니다. 선의로 조문사절을 보냈는데, 오해하여 악의로 모욕을 주어 갚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전쟁까지 하자는 것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할 말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처구니없이 오해를 받고 또 그로 인하여 계속적인 불이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오해하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결국 오해에서 비롯하여 원수처럼 되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죄인의 속성과 그로 비롯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관계성에서 오해가 없는지 늘 살펴야하고 마귀가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하며 서로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교제해야합니다. 누가 나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나가 누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이 되고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오해의 소지가 있게 마련입니다. 암몬왕 처럼 인간적인 생각, 방백들의 말로 판단하면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매사를 판단해야합니다. 아니면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것이 되어서 결국은 오해를 낳게 됩니다. 오해를 근거로 한 모든 행동은 결국은 자기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오해로 비롯된 전쟁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대상 20장에 보면 암몬은 결국 요압장군에 의해서 철저히 멸망하고 오해를 한 장본인인 왕은 죽임을 당했으며 그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선의를 오해한 처절한 결과입니다.
2. 하나님의 성읍을 위한 전쟁
전쟁에 임하는 사람들은 그 전쟁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따라서 전쟁수행능력이 달라집니다. 70년대 월남전쟁의 패배원인을 전쟁의 이유에 대한 불신에서 찾습니다. 즉 군인들이 내가 왜,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하는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나약해집니다. 목숨을 걸 필요가 없어집니다. 당연히 전우애도 상실되게 마련입니다. 결국 미군은 견디다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지금 이락이나 아프가니스탄에 가 있는 미군들이 점점 전쟁의 목적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듭니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아람과 기타 동맹한 왕들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 주위에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은 홀로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전쟁에 임하는 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그저 자기나라 이익을 위해서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싸움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읍(13절)을 지키는 영적 전쟁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쟁을 어떻게 치루어야하는지 서로 알았습니다.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서로 간에 목숨을 건 동역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읍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운명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두 장군 요압과 아비새가 군대를 둘로 나눠서 요압은 아람군대를, 아비새는 암몬 군대를 맞아 싸우기로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람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요압은 이스라엘 뺀 자 중에서 또 빼어, 그야말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아람을 대적합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12절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제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
그들은 운명공동체이었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목숨을 건 동역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하나님의 성읍을 지켜 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신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암몬과 아람에게 포위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형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어떤 마귀의 도전과 위협에도 우리 주님의 교회를 지켜내고 주님의 백성들을 보호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하나가 무너지는 것은 곧 우리 몸이 불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이며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도와야합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저는 어제 토요일에 아내와 함께 김종숙성도님을 병원으로 방문했습니다. 병실이 환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 주일에 양목사님과 Youth group이 방문하여 아름답게 장식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실 문과 두면의 벽과 화장실 문과 할 수 있는 곳은 모두 사랑과 격려와 기도를 담은 포스터와 그림, 그리고 성구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영원한 가족"이라는 글귀가 눈에 확 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가족이며 운명공동체입니다. 창립부터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도전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도전해야할 목표가 이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보니 김종숙성도님의 얼굴도 환하고 또 힘차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호흡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호흡기 담당의사를 불러서 물어봤습니다. 그는 인공호흡기를 stop시키고 김종숙성도님이 스스로 호홉하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진전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영원한 가족, 영원한 운명공동체입니다.
둘쨰는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 봐도 어디 한군데 도움을 얻을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기의 힘과 능력을 믿었다면, 막연히 잘되겠지 하는 요행수를 바랬다면 그들은 철저히 패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 요압은 이 전쟁이 하나님의 성읍과 백성을 지켜내는 것이라는 확신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담대히 하자 !
이런 각오로 아람사람을 향하여 달려 나갈 때 그 큰 군대가 도망하고 또 그들을 믿던 암몬 군대도 덩달아 도망하였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이스라엘백성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바라보는 요압과 아비새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시시 때때로 영적 싸움에 처하게 됩니다. 소위 시험과 문제에 부디치기도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오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원수 마귀가 우리의 연약한 점을 파고들어서 우리를 와해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무너뜨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나 혹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문제 뿐아니라 공동체로서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성읍,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한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는 운명공동체로서 서로 목숨을 맡겨놓고 동역해야합니다.
이는 우리 개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에게 우리자신을 맡겨드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전진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요압이 외칩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13) 담대하라, 담대히 하자 !!!!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실 것을 믿고 나가는 자는 능력이 있습니다. 큰 군대에 맞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즉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에 대해서 많은 혼동과 다툼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 하나님의 뜻을 이미 선포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구요?
어느 날인가 어떤 바리새인의 율법사가 예수님께서 질문했습니다. 계명 중에 무엇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하도 방대해서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인지 헷갈립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에 목숨을 거는것, 이것이 모든 성경말씀에 연결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먼저 우리는 가장 큰 계명이라고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위대한 명령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헛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려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일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우리 각자가 이루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3b)
담대합시다. 담대히 합시다.
댓글목록
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늘 여호수아를 읽다가 이스라엘의 10지파 (므낫세 반지파 포함)가 3지파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7년동안 목숨을 걸고 함께 가나안 적군들을 대항해서 싸웠던 자들입니다.
자식부모 재산 다 제쳐놓고 자신들과 함께 싸워준 이 세지파가 전쟁을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모형단을 쌓았는데 이 것을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한 제단이라고 오해하고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대화를 통해 사실을 알고 해결되긴 하였지만,
어떻게 7년동안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정죄하고 전쟁까지 하려는 발상을 가졌는지.. 그 것도 한 두 사람끼리가 아니고...
정말 자기 중심적인 우리들의 모습에서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쉽게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