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마가복음 1:16-20 3/3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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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라고 외치신 후, 행하신 첫번 째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모세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론과 함께 애굽의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수 있도록 요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바로 앞에서 여러 기적을 행했습니다. 결국 바로가 항복하고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도록 허락해야했습니다. 예수님도 시골지역인 갈릴리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 있는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이스라엘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그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도 아니라,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외치시고, 황제나 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어부들을 찾아가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나라나 민족적인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각 사람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 사람들만을 부름 받은 자, 혹은 소명받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름을 받은 자 소명을 받은 자들이라고 지칭합니다. 롬 1:6 “여러분도 그들 (이방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전 1:9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교회란 말은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인데) 밖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가? 데살로니가 후서 2:14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되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복음에 응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된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되 “나를 따르라”는 명령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겠느냐?”란 질문이나 “나를 따르면 좋겠다”란 제안이나 “나를 따라 줄래"하는 애원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는 명령으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의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이들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선언이십니다. 또 이들은 갈 곳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이들은 잘못된 곳에 머물러 있거나 잘못된 것을 향해가고 있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 외에는 다 잘못된 길이요, 예수님만이 이들이 가야할 인생의 방향과 목적이라는 분명한 선언이십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무엇이 인생의 목표이며, 무엇인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 왜 이 세상에 살아야하는지 확실히 모른채 그저 닥치는 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도 참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방황하며 헛된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모시므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게되었습니다.
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이들의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알뿐 아니라, 이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보장이기도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선택할 때에 우리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과 목적을 갖게해주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 주신다는 보장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실 때 “내가 너희를 이토록 사랑하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나를 책임져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Christian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초청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 물과 배와 아버지와 일꾼들을 남겨 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세리 마태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28)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8~30절)
그러나, 약 2년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을 처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자기도 한 자리 할 줄 알았는데 너무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 12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버리고 - 공동번역), (날마다 -누가복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장 34~35)
지금 제자들은 이미 자신의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까지 버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번 버리고 따라가기로 결정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계속 버리고 자기까지 부인하고 계속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혹은 자기목숨까지 버려야지만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라고 그랬으니까 12 제자들은 물론 예수를 따르고저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4장 33절에 보면, 자기를 따르던 군중들에게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로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할까요?
복음서에 백부장, 야이로라는 회당장, 스로보니게 여인, 혈루증 앓던 여인, 바디매오, 등등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정도의 믿음을 소유한 분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재산을 다버리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거라사지역의 무덤가에 살던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가 정상인이 되어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대신에 살던 곳으로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 5) 이 귀신들렸던 사람은 비록 12제자처럼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말씀을 따라간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데 방해되는 것을 버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 것이 부자청년의 경우에는 재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과 제자들에게는 세상적인 야망이었습니다. 가까운 식구나 친구가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취미와 옛 습관, 이 세상의 오락이나 쾌락일 수도 있고 나의 자아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것들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일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로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지속됩니다. 쓰러 넘어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성령님께서 보여주시고 그 것을 버릴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V.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결국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외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각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므로 확장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지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롬 10:14) 우리들이 구원의 소식을 나누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도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단순히 주님을 따라가기만하면 전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전도자로서의 삶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간단하게 두가지만 말씀드립니다. 그 동안 우리는 수 많은 설교와 가르침과 큐티와 결단을 했지만 그 것이 우리의 삶을 바꾸었는가? 물론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깨달음과 결단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낙망하기 쉽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날 그날, 서로 권면 (격려)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히 3:13) 매일 격려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기 쉽다는 말씀아닙니까? 서로 마음을 써서 (서로에게 관심을 갖자),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25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성도들과 서로 만나 격려하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서로 만나시고,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는, 기도생활에 대해 도전하고싶습니다. 어떤 미국인이 인구가 만 명 정도 되는 소도시에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장례식에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가게 문을 닫고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생전에 한 일은 동네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그들의 이름을 부엌에 써놓고 늘 기도한 것입니다. 집안일을 할 때나 수시로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직간접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간구도 중요하지만 우선적으로 믿지 않는 영혼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간접으로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선교사나 설교자로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있는 처지에서 가족들, 이웃들과 친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주님을 따르고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르도록 부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도 복음으로 불러서 우리로 예수님을 따르도록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전도자로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책임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서로 만나기를 즐겨하고 그리고 특별히 불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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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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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 마가복음 1:21-28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충격을 받은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유명한 선생들의 말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진리 자체시요,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본 분이기 때문에 (요 8:38). 다른 사람의 의견과 이론이 필요없이 영향력있게 설교하신 것이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도 있었다. 예수께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 일반회중은 놀라 충격을 받았으나,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은 무서워서 큰 소리로 질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회당에 있던 아무도 몰랐는데,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고 부르짖은 것이다. 주님께서 악마와 그 부하들인 자신들을 영원한 불 속으로 집어 넣을 것을 이 귀신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에 그는 또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거라.”
(마태 25:41)
이 귀신은 예수가 누구신지 또 무슨 일을 행하려 오셨는지 알고 있었으나, 그의 첫말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였다. 회개하여 주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주님과 관계를 맺기를 원치 않았다. 우리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고 그 분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그 분의 통치를 받기를 원해야 그 분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한마디로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며 귀신이 떠나갔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악한 귀신까지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고, 악한 귀신도 쫓아내는 분으로 예수의 소문이 온 지역에 퍼지게되었다. “예수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다.” (요일 3:8) 예수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의 일을 멸하셔서,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