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환자를 깨끗게 하심" 마가복음 1:40-45 5/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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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환자를 깨끗게 하심" 마가복음 1:40-45 5/5/2019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지난 주에는 예수님이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병든 자를 낫게 하거나 약한 자를 건강하게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눅 4: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오늘 본문에도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v.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은 문둥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센병이라고 부르기도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문등병자를 본적이 있으십니까? 이 병이 걸리게 되면 신체의 말단부가 썩어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가기까히 하는 는, 쉽게 말해서 산 채로 몸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손상된 피부에 세균 감염이 일어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합니다. (50 ft)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들은 병자체로 인한 고통은 물론,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분리되어 소외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배우자나 가족식구들과도 가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혹시 가까이 할 일이 있으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을 스스로도 피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피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13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감히 예수께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멀찍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예수님께 가까이 찾아왔습니다. (V. 40)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 것은 굉장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본인 자신이 율법을 어기면서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야단치거나 쫓아내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넘어서 자기를 받아줄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예수님임을 믿는 것이다.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 이 사랑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문둥병자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말합니다.
이 문둥병자는 예수께서 자기 같은 자도 받으시는 사랑의 예수님일뿐 아니라, 문둥병도 고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예수님으로 믿었습니다. 실지로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지라"고 명령하셨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병에게도 명령하고 병도 예수님께 복종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분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분일 뿐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를 붙들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능력, 영원한 생명을 주는 능력, 마귀에게서 지켜주시는 능력,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능력, 풍성한 삶을 살게하시는 능력등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예수님임을 믿지만 또한 전능하신 예수님임을 믿습니다.
그러자 41절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스플랑크니조마이) 란 말의 원어적인 뜻은 “내장이 움직여졌다” 란 표현입니다. (마 9:36) “예수께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란 표현과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모든 고통을 마음 속 깊이 동정하는 표현입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예수께서는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나병환자가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정상인이 나병환자를 만지는 것도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는 문둥병자를 만지십니다. 이 문둥병자는 몇 년 만에 어쩌면 몇십년 만에 처음 다른 인간이 자기를 만져준 것입니다.
매일의 양식 큐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실화가 소개됩니다. 카일리라는 자매님이 동아프리카의 오지로 의료선교를 떠났습니다 이 자매는 의사나 간호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초적인 간호 밖에는 할 수 없었다고합니다. 그런데 다리가 뒤틀려 역겹게 보일정도인 어떤 여인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카일리자매가 그녀의 다리를 깨끗이 씻고 붕대를 감아주자 환자가 울기 시작했다고합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자기가 아프게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말합니다. “아뇨. 9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만져주었어요.”라고 대답했다고합니다.
만져주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문둥병은 가장 역겨운 병일뿐 아니라, 문둥병자를 만나는 자마다 부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만지는 자마다 부정해지고, 그가 만지는 자도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집안식구도 문둥병자를 멀리할 수 밖에 없고 병걸린 자는 사람들과의 접촉 없이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이 사람을 만졌습니다.
지금은 회교국가인 터키의 이스탄불은, 1453년도에 이 회교군에 의해 함락당하기 전에는 당시 동방 기독교의 수도 Constantinnople이란 도시였었습니다. 그 때 당시 회교군이 constantinnople 을 포위 했을 떄 사제들은 그 들의 총회에서 3가지 큰 issue로 논쟁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논쟁거리가 “성수에 파리가 빠지면 파리가 성화되느냐 성수가 오염 되느냐”였다고합니다.
예수님과 부정한 것이 접촉이 된다면, 예수님이 부정해질까요 아니면 부정한 것이 거룩해질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친히 그 손을 대셔서 고치신 적도 있고 (마 8:3,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때로는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대어 난적도 있습니다. (막 3:10;5:27-31) 그래서 마가복음 6:56에 보면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자락만이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고 말합니다. 혈루병 앓던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을 때, 예수님의 옷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나음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과 부정한 것이 접촉이 되면 예수님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접촉된 자가 꺠끗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문둥병자에게도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문둥병자의 고통을 치유해 주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마자 (42절)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이 일으키시자 즉시 나아 다른 사람을 수중을 든것처럼, 이 문둥병자도 즉시로 치료함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나병환자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내 몸은 건강하니까, 혹은 몸에 문제가 있지만, 나병처럼 심각하지 않으니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향하여 고침을 받으라 혹은 나음을 받으라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일단 문둥병에서 낫게되었을 떄도 “고침을 받았다”란 표현을 안쓰고 “깨끗하게 되었다”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둥병자 자신도 예수님께 낫게 해달라나 고쳐달라는 표현 보다는 “나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병은 다 고침을 받았다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유독 문둥병만 깨끗하게 되었다란 표현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병들과는 달리 단지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깨끗함을 받아야할 영적인 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당시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으로 여겼습니다.
이 문둥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하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 (I am willing)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주님께서 내가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문둥병자를 만져주시면서 깨끗하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죄의 병에 시달리는영혼들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러 오셨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막 1:15)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문둥병같은 영적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셨고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나병환자에게 닿는 순간 나병이 완전히 치료 된 것과 같이, 나병보다 더 지독한 죽을 죄로 병든 영혼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순간 즉시,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이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오늘 이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병에서 이미 고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적용이 있습니다. 아까 예를 들었던 카일리라는 자매처럼, 외로운 여인의 병든 다리를 만져주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손길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오늘날 나병치료를 위한 놀라운 의학적 발전이 있게된 것은, 아무도 반기지 않고 접촉치 않는 문둥병환자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 무서운 질병에 노출되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던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대부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의료선교사들의 희생때문에 나병이 집중되어 있던 대부분의 지역에서 교회가 번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주지 않는 분들이, 돌보지 않는 분들이 문둥병환자들과 같은 병자들뿐 아니라, 부모를 잃은 고아들, 감옥에 갇힌 죄수들, 성노예로 팔려간 소녀들, 인신매매로 중국인들에게 팔려간 10만이나 되는 북한 여성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당하는 20만명의 동포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생각할 때 너무 게으르고 안이하고 배부르고 겁많고 무관심한 자신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우리도 팔짱만 끼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간접으로 주님의 손을 내미는 사역에 동참해야할 줄압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 되고 복음이 증거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시고, 건강한 자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병들고 약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부자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죄인, 약하고 병든자, 가난한 자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도 이들을 향해, 예수님처럼 목자의 심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손의 역할을 감당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문둥병 환자가 즉시로 깨끗하게되었는데, 43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간곡한 어조로 문둥병자에게 두가지 부탁을 합니다. 고침받은 치유 이적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3:12;마 12:16;16:20;27:9;눅8:56). 다른 부탁은 제사장에게 가서 꺠끗해진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제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앞에서 깨끗함의 선언을 얻기 전까지는 비록 병에서 고침을 받았더라도 인정받을 수 없고 계속 고립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번쨰 명령은 잘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경고는 청개구리처럼 꼭 반대로 지켰습니다.
45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그 동안에는 사람들과 전혀 접촉할 수 없던 사람이, 문둥병 에서 고침을 받고 나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너무 많이 간증을 하면서 돌아다녀서 예수께서 더 이상 동네에 들어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계셔야할 정도로 소문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는 자'라는 명성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능력 많으신 예수께 몰려와 세상 권력을 장악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둥병자로 인해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증거하는데까지 방해를 받게된 것입니다.
이 문둥병에서 난 이 사람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병고침 받은 사람들은 계속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 보면 귀먹고 벙어리된 자를 고치신 역사를 본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습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하지 말라고 경고 했음에도 전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라고 명령했는데도, 전하지 않는 것 누가 더 나쁜 사람입니까? 예를 들어 말기암 치료를 위한 새로운 약을 알면서도, 암환자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보내신 사실이, 나를 구원한 사실이 병이 나았다는 사실만큼 중요하거나 감격적인 것으로 느끼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알고 믿게되었던 그 믿음의 감격과 간증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닙니까? 병고침을 받은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는 과거의 역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되어져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날마다 복음으로 인한 나의 삶의 흥분이 있고 감격과 감사와 간증이 있고 이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운 것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이 문둥병자처럼, 자신처럼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병자도, 죄인도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문둥병자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병, 우리의 죄에서 깨끗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란 믿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처럼 목자의 심정을 갖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접근하지 않는 자들에게 손을 내어주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과 구원의 간증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지난 주에는 예수님이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병든 자를 낫게 하거나 약한 자를 건강하게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눅 4: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오늘 본문에도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v.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은 문둥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센병이라고 부르기도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문등병자를 본적이 있으십니까? 이 병이 걸리게 되면 신체의 말단부가 썩어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가기까히 하는 는, 쉽게 말해서 산 채로 몸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손상된 피부에 세균 감염이 일어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합니다. (50 ft)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들은 병자체로 인한 고통은 물론,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분리되어 소외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배우자나 가족식구들과도 가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혹시 가까이 할 일이 있으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을 스스로도 피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피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13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감히 예수께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멀찍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예수님께 가까이 찾아왔습니다. (V. 40)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 것은 굉장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본인 자신이 율법을 어기면서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야단치거나 쫓아내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넘어서 자기를 받아줄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예수님임을 믿는 것이다.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 이 사랑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문둥병자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말합니다.
이 문둥병자는 예수께서 자기 같은 자도 받으시는 사랑의 예수님일뿐 아니라, 문둥병도 고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예수님으로 믿었습니다. 실지로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지라"고 명령하셨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병에게도 명령하고 병도 예수님께 복종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분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분일 뿐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를 붙들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능력, 영원한 생명을 주는 능력, 마귀에게서 지켜주시는 능력,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능력, 풍성한 삶을 살게하시는 능력등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예수님임을 믿지만 또한 전능하신 예수님임을 믿습니다.
그러자 41절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스플랑크니조마이) 란 말의 원어적인 뜻은 “내장이 움직여졌다” 란 표현입니다. (마 9:36) “예수께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란 표현과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모든 고통을 마음 속 깊이 동정하는 표현입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예수께서는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나병환자가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정상인이 나병환자를 만지는 것도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는 문둥병자를 만지십니다. 이 문둥병자는 몇 년 만에 어쩌면 몇십년 만에 처음 다른 인간이 자기를 만져준 것입니다.
매일의 양식 큐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실화가 소개됩니다. 카일리라는 자매님이 동아프리카의 오지로 의료선교를 떠났습니다 이 자매는 의사나 간호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초적인 간호 밖에는 할 수 없었다고합니다. 그런데 다리가 뒤틀려 역겹게 보일정도인 어떤 여인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카일리자매가 그녀의 다리를 깨끗이 씻고 붕대를 감아주자 환자가 울기 시작했다고합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자기가 아프게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말합니다. “아뇨. 9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만져주었어요.”라고 대답했다고합니다.
만져주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문둥병은 가장 역겨운 병일뿐 아니라, 문둥병자를 만나는 자마다 부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만지는 자마다 부정해지고, 그가 만지는 자도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집안식구도 문둥병자를 멀리할 수 밖에 없고 병걸린 자는 사람들과의 접촉 없이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이 사람을 만졌습니다.
지금은 회교국가인 터키의 이스탄불은, 1453년도에 이 회교군에 의해 함락당하기 전에는 당시 동방 기독교의 수도 Constantinnople이란 도시였었습니다. 그 때 당시 회교군이 constantinnople 을 포위 했을 떄 사제들은 그 들의 총회에서 3가지 큰 issue로 논쟁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논쟁거리가 “성수에 파리가 빠지면 파리가 성화되느냐 성수가 오염 되느냐”였다고합니다.
예수님과 부정한 것이 접촉이 된다면, 예수님이 부정해질까요 아니면 부정한 것이 거룩해질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친히 그 손을 대셔서 고치신 적도 있고 (마 8:3,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때로는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대어 난적도 있습니다. (막 3:10;5:27-31) 그래서 마가복음 6:56에 보면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자락만이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고 말합니다. 혈루병 앓던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을 때, 예수님의 옷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나음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과 부정한 것이 접촉이 되면 예수님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접촉된 자가 꺠끗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문둥병자에게도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문둥병자의 고통을 치유해 주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마자 (42절)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이 일으키시자 즉시 나아 다른 사람을 수중을 든것처럼, 이 문둥병자도 즉시로 치료함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나병환자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내 몸은 건강하니까, 혹은 몸에 문제가 있지만, 나병처럼 심각하지 않으니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향하여 고침을 받으라 혹은 나음을 받으라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일단 문둥병에서 낫게되었을 떄도 “고침을 받았다”란 표현을 안쓰고 “깨끗하게 되었다”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둥병자 자신도 예수님께 낫게 해달라나 고쳐달라는 표현 보다는 “나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병은 다 고침을 받았다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유독 문둥병만 깨끗하게 되었다란 표현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병들과는 달리 단지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깨끗함을 받아야할 영적인 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당시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으로 여겼습니다.
이 문둥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하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 (I am willing)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주님께서 내가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문둥병자를 만져주시면서 깨끗하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죄의 병에 시달리는영혼들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러 오셨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막 1:15)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문둥병같은 영적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셨고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나병환자에게 닿는 순간 나병이 완전히 치료 된 것과 같이, 나병보다 더 지독한 죽을 죄로 병든 영혼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순간 즉시,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이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오늘 이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병에서 이미 고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적용이 있습니다. 아까 예를 들었던 카일리라는 자매처럼, 외로운 여인의 병든 다리를 만져주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손길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오늘날 나병치료를 위한 놀라운 의학적 발전이 있게된 것은, 아무도 반기지 않고 접촉치 않는 문둥병환자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 무서운 질병에 노출되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던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대부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의료선교사들의 희생때문에 나병이 집중되어 있던 대부분의 지역에서 교회가 번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주지 않는 분들이, 돌보지 않는 분들이 문둥병환자들과 같은 병자들뿐 아니라, 부모를 잃은 고아들, 감옥에 갇힌 죄수들, 성노예로 팔려간 소녀들, 인신매매로 중국인들에게 팔려간 10만이나 되는 북한 여성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당하는 20만명의 동포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생각할 때 너무 게으르고 안이하고 배부르고 겁많고 무관심한 자신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우리도 팔짱만 끼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간접으로 주님의 손을 내미는 사역에 동참해야할 줄압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 되고 복음이 증거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시고, 건강한 자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병들고 약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부자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자를 찾으셨습니다. 죄인, 약하고 병든자, 가난한 자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도 이들을 향해, 예수님처럼 목자의 심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손의 역할을 감당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문둥병 환자가 즉시로 깨끗하게되었는데, 43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간곡한 어조로 문둥병자에게 두가지 부탁을 합니다. 고침받은 치유 이적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3:12;마 12:16;16:20;27:9;눅8:56). 다른 부탁은 제사장에게 가서 꺠끗해진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제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앞에서 깨끗함의 선언을 얻기 전까지는 비록 병에서 고침을 받았더라도 인정받을 수 없고 계속 고립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번쨰 명령은 잘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경고는 청개구리처럼 꼭 반대로 지켰습니다.
45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그 동안에는 사람들과 전혀 접촉할 수 없던 사람이, 문둥병 에서 고침을 받고 나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너무 많이 간증을 하면서 돌아다녀서 예수께서 더 이상 동네에 들어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계셔야할 정도로 소문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는 자'라는 명성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능력 많으신 예수께 몰려와 세상 권력을 장악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둥병자로 인해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증거하는데까지 방해를 받게된 것입니다.
이 문둥병에서 난 이 사람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병고침 받은 사람들은 계속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 보면 귀먹고 벙어리된 자를 고치신 역사를 본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습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하지 말라고 경고 했음에도 전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라고 명령했는데도, 전하지 않는 것 누가 더 나쁜 사람입니까? 예를 들어 말기암 치료를 위한 새로운 약을 알면서도, 암환자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보내신 사실이, 나를 구원한 사실이 병이 나았다는 사실만큼 중요하거나 감격적인 것으로 느끼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알고 믿게되었던 그 믿음의 감격과 간증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닙니까? 병고침을 받은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는 과거의 역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되어져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날마다 복음으로 인한 나의 삶의 흥분이 있고 감격과 감사와 간증이 있고 이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운 것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이 문둥병자처럼, 자신처럼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병자도, 죄인도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문둥병자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병, 우리의 죄에서 깨끗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란 믿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처럼 목자의 심정을 갖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접근하지 않는 자들에게 손을 내어주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과 구원의 간증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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