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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5:10-14) 6/2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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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5:10-14)  6/23/2019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지난 주에 중앙일보에 “화장한 아내 유골 '추억의 장소'에 뿌린 직후 심정지로 숨진 남편”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제가 태어난 해 1955년에 결혼해서 거의 64년을 같이 산 일본계 4세부부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남편은 88세 아내는 87세인데 아내가 지난 4월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이 64년 결혼생활중 47년을 인디애나 주에서 살았는데,  인디애나 주에 있는 스톤호수란 곳에 자주가사 휴식과 여가를 즐겼기에, 이 호수는 부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장소였다고합니다. 그런데, 지난 6월 4일에 결혼 64주년을 하루 앞두고, 남편이 그 호수가에 가서 아내의 화장한 뼈를 호수에 뿌린 직후 심장이 멈추어 죽었다고 합니다. 오랜 결혼생활끝에 돌아가신 부부들이 배우자가 먼저 죽을 때 남은 배우자도 곧 죽게되는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7343458

저도, 세월이 흐를 수록 아내와 같은 진정한 친구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과 아내가 옆에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는 느낌을 종 종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내 아내가 먼저 떠나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면 너무 힘들 것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럴때 아내와 함께 했던 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면 수백만불을 주더라도 갖기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Priceless 

젊은 이들이 결혼을 하려는 것도 항상 함께 있어주는 관계를 갖기 원해서가 아닐까요? 또 결혼해서 자녀를 갖기 원하는 마음도 이와같은 심정에서 자녀를 갖기 원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아이를 낳게되면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손해보며 이들을 돌보아야하고 똥걸레도 갈아주어야합니다. 그럼에도 자녀를 낫기를 원하는 것은 이들과 부모와 자녀로서 함께 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아브라함 목사님께서 아들 자슈아가 집에 와 옆에 있는대도 보고싶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그토록 항상 함께 하고픈 심정일 것입니다)  이런 함께 하고픈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요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도,  그 분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자기 아들 예수도 아끼시지 않고 보내신 것도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우리와 그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함께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도 우리가 자나 깨나 그와 함께 하시기를 원해서였다고 말씀합니다. (살전 5:10) 그 분은 우리의 마음 문을 항상 두드리시며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참된 친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이 제자들을 위해 죽으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참된 친구 영원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12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증인이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어 증인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 17:23)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 서로 떼어 놀 수 없는 중요한 명령이요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전도를 해도 세상 사람들은 너희들이나 믿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가 온전하게 하나되지 못함에 있습니까 아니면 전도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4년 전에 클리닉에서 전도하다가 만나게된 이 한나 권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수백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수십년 하셨고 교회 봉사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십니다  지금 남편을 잃고 혼자 계신 분인데  너무 힘들게 사시고 고통가운데 하루 하루를 사시는데, 이분이 겪는 가장 큰고통은, 그 분의 속사정을 나눌 분이 한분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너무 힘들어하셔서 이 분을 만난지 4년쯤 되었는데 지금도 저는 그 분을 위해서 주중에 거의 매일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 여동생도 자기 마음을 나눌 성도 한 사람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한나 권사님이 제 여동생이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경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수 많은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친구를 찾지 못하고 교회생활을 포기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이던 교회 밖이던 이런 분들을 아신다면 여러분들 그 분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 인데요.  제가 지금부터 21년전 멕시코 사역을 일단락 짓고 남가주로 돌아와서 척추수술을 받고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제가 이제 멕시코 사역을 마치고 남가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니까 멕시코 목사님들이 저희들을 환송해 주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환송파티에 나온 멕시코 목사님들을 한 분 한 분을 자세히 보니까 단 한 사람도 정말 진정으로 슬퍼하며 안타까와 하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냥 참석한 것입니다.  내게 진정한 친구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꿈 속에서인지 꿈을 깨고서인지 제 자신에게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이제 이런 사역은 끝이다. 친구가 되어주고 친구를 만드는 그런 사역이 아니면 안하겠다”라고 제 스스로에게 선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수술을 받언 해 11월 달에, 이아브라함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제게 “죽기 전에 헤어지지 말자"란 조건으로 동역 하자는 제안을 해오셨습니다.  제가 기대하고 고대했던 기도응답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분들이 들으시면 섭섭하겠지만, 이목사님은 제게 여러번 “당신만 있으면… 다 나가도 좋다" 사역보다는 저와의 관계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관계성을 경험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여러분과 여러분 사이에도 사역보다 관계성을 좀 더 귀중히 여기는 관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교회 합병 혹은 새로운 목사님 모시는 문제로 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저의 간절한 바람은 관계성을 사역보다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목사님을 모셨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는 것도 중요하고 사역도 물론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동안이나 예수님을 보아왔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누가 더 큰자인가로 서로 타투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것은 마치 오늘날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누가 더 사역을 잘하는가? 누가 더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가로 경쟁하는 것과 별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명령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사역 초기나 중기에 미리 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 바로 전에 하셨을까?

그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말씀아닙니까?  그래서 12제자 중에 하나였던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일 3:16)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생각이나 결단에서 나오는 인위적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도다”란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육체가운데 사는 것이 자기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자기를 사랑하시는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삶의 동기와 원동력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섬기고 사역한다고 말할지라도,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의 동기가 아니라면, 자칫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는 사역을 하게될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만난 어떤 목사님은 부목사로 있을 때나 담임 목사로 있을 때에 월급을 받으면서 사역을 하니까, 자칫 월급에 메이게 되고, 돈이 사역의 동기가되는 순수치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약 10년전부터 월급 없이 사역을 하면서 영혼의 자유함을 느끼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물론, 목사가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주님을 위한 사역이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 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가 아닌 다른 타락된 동기로 사역을 하게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다른 교회와 합병하게될 지 아니면 새로운 목회자를 모실지 아직 분명치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목사님들이 말합니다. 두 교회가 합병할 때 100이면 100 다 깨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본성은 트집잡기 쉽고, 갈라지기 쉬운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스도를 닮기 보다는, 오히려 고집스러워지고, 친해지기 힘들고, 가까와지기 힘들고 외톨이로 남기가 너무 쉽습니다.  수십년을 같이 지내도  표면적인 관계로 머물기 쉽습니다.  자기 외엔 모든 사람들이 맘에 안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난 20년간 그토록 교회의 하나님됨과 운명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설교하고 고백했지만, 아직도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교회가 합병할 때, 합병하기 전까지는 마치 연인간의 연애감정처럼 서로의 장점이 잘 보이다가, 막상 결혼하면 서로의 단점이 잘 보이기 시작하고 갈등을 느끼는 것처럼, 교회가 합병하여 뚜껑을 열어보니까, 미쳐 생각치 못했던 문제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극복하지 못하고 교회가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교회와 합병을 한다면,  모든 문제점들에 대해서 미리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해야겠지만, 일단 경정된 뒤에는 모든 문제를 뒤로 하고, 관계성을 우선권으로 생각하는 교회와 합병하든지, 관계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목사님을 모셔야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우선 제 자신부터 모든 직분, 권리, 주장 등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합병하거나, 새로운 목회자를 모시지 않는다면, 교회가 분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지칭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공동체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바로 교회를 향한 명령이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우리를 교회란 공동체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식구로서 헌신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주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되자고 서약한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가 다른 교회와 연합하든지 새로운 목회자를 모시든지 그들 모두와도 서로 진정한 친구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또, 성령님께서 교회를 하나되게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교회와 연합하든지, 아니면 새로 부임할 목사와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됨을 이루는 과정에서,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도록 최선을 다하고 일단, 교회가 하나되었을 때에 그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고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 영어성경들이 이 구절을 “모든 노력을 다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지속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하나됨을 지킨다는 것은 분명 희생을 치루는 것입니다:  이런 각오로. 하나됨을 지키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각자가 나 자신을 부인해야합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겨야합니다.  양보해야 하고 희생해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자기 부인과 섬김과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들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1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 주고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 아닐까요?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19)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도바울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저도 여러분을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나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으로 삼겠습니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의 면류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 만나게될 분들과도 서로 서로에게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의 면류관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진정한 친구기 되어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그의 친구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입니다.

여러분들 심령 속에 혹시라도 저 형제는 저 자매는 사랑할 수 없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은 안계십니까?  사탄의 음성에 속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멀리하거나 싫어하는 그 분 안에도 성령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 그 분을 사랑하셔서 그 분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멀리하거나 미워하거나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틀니를 고치면서 원래는 이틀이면 고칠 수 있다고 그랬는데 10일씩이나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게 다음 주에 점심식사하기로 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이빨을 가지고 어떻게 식사할 수 있을까?  그 동안 미루워왔는데 또 미뤄야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개 안남은 이빨로도 몇일 먹다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갈비뜯는 것 아니라면 다 먹을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사랑을 할 수 없을 것같은 분도 우리가 시도하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틀니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받은 자요, 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과소 평가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같은 교회의 지체들은 물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분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야합니다.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의 친구된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헌신된 것이 예수님의 친구된 증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친구된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다른 성도를 사랑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에 대한 헌신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님이 사랑하는 다른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헌신된 관계를 말합니다.  지금 저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다른 성도를 (우선권을 갖고) 진실로 사랑치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른 교회와 합병을 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든지 우리가 주안에서 서로 더욱 사랑하고 더욱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 시작은 바로 우리 각자 자신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결단이 저와 여러분 심령 속에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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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no_profile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주어라” (요한복음 15:10-14) 6/2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바로 전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셨 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이 제자들을 위해 죽으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므로 자신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하셨고 기도하셨다.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누가 더 큰자 인가로 타투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왜 이토록 중요한 명령을 사역 초기나 중기에 미리 하시지 않고, 십자가 에서 죽기 바로 전에야 하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 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사랑 이 무엇인지조차 알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
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요일 3:16)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사랑을 알기 때문에,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 도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도다”라고 고백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우리를 교회란 공동체로 부르셨다. 성령께서 하나되게하신 교회를 힘써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희생을 치루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 각자가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겨야 한다. 이런 애씀과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기쁨을 위한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v.14)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친구된 증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다른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친구된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다른 성도를 사랑치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안에서 더욱 사랑하고 친구가 되어주는 공동체가 되도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도전적인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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