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의 기쁨 위하여” 빌립보서 1:20-26. 7/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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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믿음의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 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거하기를 원하는 두가지 이유를 고백합니다. 하나는, 지난 번에 설교한대로 빌립보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요 두번째는 오늘 나눌 성도들의 믿음의 기쁨을 위하여입니다.
믿음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빌립보서 3:1; 4:4보면 사도바울이 주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믿음의 기쁨 같은 말입니다) 믿음의 기쁨이란 것은 믿음과 상관 없는 기쁨이 있다는 말이요, 주안에서의 기쁨이란 것은 주 밖에서의 기쁨도 있다는 말이지요. 주 밖에서의 기쁨, 혹은 믿음과 상관 없는 기쁨 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월드컵 게임에서 손흥민이 골을 넣었을 때, 배고픈데 맛있는 음식을 먹게될 때, 자녀들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왔을 때, 남편이 승진되었을 때, 병이 나았을 때, 자녀나 손자가 태어났을 때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믿음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하나님께서 이런 기쁨을 주시기도하고 우리에게 이런 기쁨들도 필요합니다. 이런 기쁨들이 그 것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쁨을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두가지 문제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들의 샘으로 삼은 것이다." (렘 2:13)
주님 밖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생수의 근원인 주님을 멀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 재물, 명예, 좋은 직장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손자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요 마땅히 즐기고 기뻐해야할 것들이지만, 자칫 주님을 멀리하게 하는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심지어 이런 것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들의 샘으로 삼은 것 입니다." (렘 2:13) 영원한 생명샘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물이 고이지 않고 물이 새는 웅덩이를 자신의 샘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서 기쁨을 구하는 삶은 물이 새는 웅덩이 같다는 것입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골을 넣을 때는 기쁘지만 골을 먹을 때는 실망하고 화까지납니다. 건강할 때는 기쁘지만 병약해질때는 낙담하게됩니다. 태어난 아기가 기쁨도 주지만 근심도 줄 수 있습니다. 주님 밖에서의 기쁨은 여건에 따라 항상 변하고 지속적인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스스로 판 물이 새는 웅덩이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이 예수님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요 6:3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밖에서 보다도, 우선적으로 주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3:1 끝으로 (결론으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지 않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합니다. (이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 안전함을 느끼는 데 꼭 필요할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치 밖으로 나가는 자녀들에게 “차조심해라”를 반복한듯); 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주 안에서 기쁨을 추구할 것을 의무로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쁨,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단지 기쁨을 위한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상, 우리가 무엇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가가 무엇을 예배하는가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재산이 축적되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면, 재산이 그의 우상입니다. 그 우상이 건강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취미일 수도 있고 오락일 수도 있고 자기의 의 일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중독자들 - 알코홀, 도박, 연속극, 스포츠, 인터넷 등 등 다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드려지려면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 하지 못한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하고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기도할 것.) 예배자란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를 말합니다.
장로교인들이 사용하는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의 첫질문은 “사람의 첫째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람의 첫째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함”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성도들이 사용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도 비슷한 첫 질문을 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분은 그의 성신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런 위로가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이런 위로때문에 우리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기쁨 가운데 산다면, 이로서 우리는 위대한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며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김종숙 성도님이 지난 주에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습니다. 김종숙 성도님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고, 불편하고 숨쉬기 답답하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연약함에도 “나는 항상 마음이 기쁘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것이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요, 위대하신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삶인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되고,심지어 로마황제의 집에 속한 몇 사람까지 예수님을 믿게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4:22) 그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죄수들과 너무다르게, 그의 말과, 표정과 행동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드러내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기쁨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란 유명한 철학자는 기독교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있지 못하다면, 먼저 우리에게 주로 말미암은 기쁨이 내게 있는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안에서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배자요 또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살아야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쁨은 이 세상을 사는 천국 백성들의 마땅한 특징이어야합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 (이 땅에서 천국을 소유한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은 성도들이라면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대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17-18) 란 고백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특별히 그냥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씀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힘든일 아픈일 슬픈일 불행한 일 걱정되는 일 두려운 일등 온갖 종류의 일이 생기는데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베드로는 자신이 보낼 편지를 받을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칭찬합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 (시련)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들은 여러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에 명시된 것처럼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유일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몸도 영혼도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므로 용서받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셨고, 성령님으로 영생의 확신을 주시는, (이런 위로가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를 위해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말합니다..
김종숙 성도님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분이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기뻐하는 교육을 받고 그 방법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김종숙 성도님에게는 사나 죽으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라는 고백대신 내게 사는 것이 내 자녀요 내 남편이요 아내요, 내 명예요 건강이요 내 재산이요 직업이요 등등으로 고백한다면, 결코 믿음의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잠시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고 참된 기쁨을 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기쁨과는 상관 없는 기쁨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김종숙 성도님이 구원의 기쁨을 유지하고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종숙 성도님은 기도의 여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분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기도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주님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성령님이 주시는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살전 1:6).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배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주님 안에서 기뻐하므로, 주님을 예배하는 삶 그리고 주님을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기도 가운데 항상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고 주님을 기뻐하는 예배자로서 그리고 증거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기 원하면서도 포기하고 주님 밖에서 기쁨을 구하는 무기력한 삶 심지어 우상숭배자로서의 삶을 사는 저희들은 아닌지요.
주님, 지금 이 시간 다시 한번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게 하옵소서.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즐거워 하겠노라란 결단이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보다 더 즐거워하고 더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회개하게 하시고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기뻐하므로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성령님, 도와주소서.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게 하소서. 주님을 기뻐하므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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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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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의 기쁨 위하여” 빌립보서 1:20-26. 7/29/18
바울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훨씬 더 좋게 여기면서도 이 땅에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남기로 결정한 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믿음의 기쁨을 위해서였다. 어린 아이를 가진 부모가 아이의 육적, 정신적 성장을 간절히 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 분의 자녀들인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쁨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믿음의 기쁨이란 주 안에서의 기쁨을 말하며 (빌 3:1; 4:4) 우리가 무엇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가가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예배하는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재산이 축적되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면, 재산이 그의 우상이다. 그 우상이 건강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취미일 수도 있고 오락일 수도 있고 자기의 의 일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중독자들 - 알코홀, 도박, 연속극, 스포츠, 인터넷 등 등 다 우상 숭배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좋아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 하지 못한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하고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한다.
믿음과 상관 없는 기쁨, 주님 밖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그 것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요 즐길 수도 있지만, 자칫 우상숭배의 죄를 범할 수 있으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밖에서 보다도, 우선적으로 주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야한다. (요 6:35)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의 첫질문 “사람의 첫째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사람의 첫째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함”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힘든일 아픈일 슬픈일 불행한 일 걱정되는 일 두려운 일등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베드로는 자신이 보낼 편지를 받을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칭찬한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 (시련)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6-9)
이들이 여러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크게 기뻐하며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개혁교인들이 사용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에 명시된 것처럼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유일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몸도 영혼도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므로 용서받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셨고, 성령님으로 영생의 확신을 주시는, 이런 위로가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를 위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원의 기쁨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런 기쁨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라는 고백대신 내게 사는 것이 내 자녀요 내 남편이요 아내요, 내 명예요 건강이요 내 재산이요 직업이요 등등으로 고백한다면, 결코 믿음의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잠시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고 참된 기쁨을 줄 수는 없다. 구원의 기쁨과는 상관 없는 기쁨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매일 선택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