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된 공동체” 빌립보서 2:1-4 8/2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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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3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모든 설교자들이 갖고 있는 소원은 설교할 때 주님의 말씀을 설명할 뿐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이런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자로서 사명자로서. 설교자로서 항상 제 자신이 먼저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겠다는 경각심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수요일 아침에 큐티를 하면서 좀 더 주님의 은혜로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원하는만큼 뜨겁게 기도하지를 못하고 약간 실망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특별한 경험을 구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 나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미래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있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할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할지 분명한 인생의 목적도 있고, 무엇보다도 변치 않고 나와 항상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이런 감사들 보다 더 중요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제게 이런 감사 가운데 살게 하시고, 그 감사로 제 심령을 채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 뿐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영생이 있고, 세상사람들이 갖지 못한 분명한 소망이 있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할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할지 분명한 인생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제대로 응답치 못한다는 불만내지 자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를 과거에도 붙들어 왔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고, 앞으로도 우리를 변함없이 붙드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지 않습니까? 비록 마음에 뜨거운 감격을 못느낀다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감사의 삶을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수요일 아침에 소파에 앉아서 감사했던 또 한가지의 중요한 것은, “제가 가진 영생과 소망과 목적과 주님에 대한 사랑을 함께 나눌 믿음의 식구들을 주신 것을 또한 진정으로 감사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과 소망과 목적과 사랑이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것들을 나눌 믿음의 식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러나 만약 이 축복들을 나눌 식구들이 없다면,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이아브라함 목사님께서 아리조나에서 특별히 소속된 교회가 없었을 때 많이 힘들어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집을 팔고 이 곳에 다시 돌아오시려고 계획하던 중 지구촌 침례교회를 만난 것입니다. Jason Hong목사님도 섬길 교회는 있었지만 막상 성도들과 이런 복들을 나눌 수 있는 교제를 갖지 못하다 보니까 그의 기쁨을 잃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을 나눌 교제가 필요하고 또 한 마음으로 서서 복음을 세상에 나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한정신과 마음으로 이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2절에 언급된 같은 생각 같은 사랑 같은 뜻과 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1절에 언급된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님과의 교제, 동정심과 자비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절에 이런 것들이 “있거든”하면서 가정적으로 말했지만 있어도 좋고 앖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경험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란”, Encouragement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용기를 갖게하는 것 입니다. 파라크레시스 (파라 - alongside of, beside, near, a calling to one's aid):함께 있어주므루 용기를 갖게하는 것. 그러나, 우리가 서로 용기를 갖게 한다기 보다는 낙망하게 한다면 결코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위로 - Comfort란 함께 하므로 힘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그러나 사랑의 위로대신 판단과 정죄하는 마음으로 다른 지체에게 다가선다면 같은 식구란 마음을 품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성령님의 교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갖는 것이 성령님과의 교제이며 성령님 안에서의 교제일 것입니다.
또 동정심 = 심장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내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1:8 그리스도의 심장 = 목자의 심정 마 9:36 “예수께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도 원어로는 “내장이 움직여졌다” 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자녀가 아프거나 불행을 겪으면 부모의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환장할 정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동정심이란 부모의 심정, 목자의 심정 이런 심정이 없게되면 바리새인이나 돌아온 탕자의 형처럼 되는 것입니다.
자비 (동정심과 비슷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마태의 집에서 식사할 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라고 정죄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의 연약과 부족을 볼 때에 판단과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목자의 심정으로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이 자비가 없다면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각각 다른 다양한 배경과 지식과 나이와 경험과 관점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사랑의 위로가 있고, 성령님의 교제와, 서로에 대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다면 2절에 보니까 “같은 생각을 품게 되고, 같은 사랑을 가지게 되고, 뜻을 합하게 되고, 한 마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빌립보 교회가 하나된 관계성이 된다면 바울의 기쁨이 넘쳐흐르게될 것이라고고백합니다. 마음과 뜻과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를 이룰 때 바울이 느끼는 이 기쁨이 성령님의 기쁨이요,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의 기쁨일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것은 이런 기쁨을 누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격려하는 것도 없고, 사랑의 위로도 없고, 성령님의 교제도 없고, 서로에 대한 동정심과 자비심이 없다면, 교회지체들이 각각 다른 생각을 품게 되고, 같은 사랑을 갖지 못하고, 뜻이 각각 다르고 결국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기쁨을 잃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메주 같은 교회가 아니고 콩자루같은 교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주님을 기뻐하실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님과의 교제, 동정심과 자비심“인 것을 배웁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런 격려와 위로와 교제와 동정심과 자비가 있는 지체들이 되고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서 그 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3절을 읽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어떤 일을 하든 다툼으로 하지말라는 것은 경쟁의식으로 하지 말라는 말이고, 또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아침에 꿈을 꾸었는데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각 선수가 각 각 농구공을 배스킷에 넣는 게임에 제가 휠체어를 탄채 선수로서 참여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구장에 들어가면서 얼마나 수많은 관객에 대한 pressure를 느꼈는지 자신에게 공 넣기에 성공하던 아니던 이 것은 잠간이면 잊혀질 일이라고 제 자신에게 다짐했습니다. (잠간이면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영광 이 것이 헛된 영광입니다) 이 게임은 각 선수가 정면에서 한번, 측면에서 한번 공을 넣는 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면에서 보니까 못 집어널 것 같고 측면에서 보아도 못집어 놀 것 같아서 아예 시도조차 못하고 스스로 퇴장했습니다. 실패하게되면 받게될 사람들의 망신과 야유의 pressure를 제가 견딜 수 없었을 것 같아서 였습니다. 골을 넣고 못넣고, 게임에 이고 지고는 다 일시적인 허영인데도 불구하고 영웅이 되기도 하고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토록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영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살전 2:6) 이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에게서만 영광을 구하는 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면 게임에서 이겨야 하듯 누가 옳은가로 다투게 되기 쉽습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중요한 행사를 준비하기위해서, 교회의 열심있는 분들이 김치를 담그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배추김치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총각김치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면서 서로 간에 김치 만드는 것 때문에 다툼이 시작되었고, 결국 교회에서 여집사님들이 두 패로 나누어졌고 결국 교회가 갈라졌다고합니다. (어떤 교회는 깍뚜기 싸이즈를 얼마나 크게 하느냐로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지금 빌립보 교회에도 유오디아란 자매와 순두게란 자매 사이에 갈등이 있어서 교회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보통 성도가 아니라 바울과 함께 복음증거를 위해 애썼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여인들도 다툴 수 있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도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서로 다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더 크다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하고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27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의 종이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의 종이 외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6-27)
롬 12:10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유오디아와 순두게처럼 우리가 아무리 주님께 헌신되었다 하더라도. 서로 먼저 존경하고,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종이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셔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결국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이런 마음만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4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님과의 교제, 동정심과 자비심을 가지므로 하나됨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한다거나, 사랑의 위로를 한다거나, 성령님과의 교제나, 동정심과 자비” 이런 것을 실천하려면 꼭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일단 서로 만나야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기자는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라”라고 권고한 뒤에 “모이는 일을 포기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라고 말합니다. 왜 성도들이 모이는 일을 포기하게 됩니까?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일만 돌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합니다. (3:13) 초대교회는 모이는데 힘써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행2:46).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면 자주 모이게 되고, 또 마음을 같이하려면 모이기에 힘써야합니다. 부흥하는 교회 생명력이 있는 교회는 그룹으로 개인으로 자주 만나는 교회입니다. 자기의 일뿐 아니라 남의 일도 돌보기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사랑의 위로와, 성령님과의 교제와, 동정심과 자비”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려면, 모이기를 힘쓰는가 아니면 멀리하는가를 보면압니다. 여러분들이 건강이 있는 동안 주일 예배모임은 물론 주일학교 모임에도, 장막모임에도 참여하고 이번 수양회 모임에도 가능하면 다들 참여할 수 있도록 힘쓰기를 바랍니다.
모여봤자,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님과의 교제, 동정심과 자비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안모인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회개하고 내가 먼저 격려의 사람이 되고 내가 먼저 위로의 사람이 되고 내가 먼저 성령님 안에서 교제하려고 노력하고, 내가 먼저 동정심과 자비심을 가지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존경하고 내가 먼저 섬기고 내가 먼저 종이 되어 우리들의 만남이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성령안에서의 교제가 있고 서로에게 동정과 자비심을 갖는 주님안에서 하나된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우리로 먼저 존경하고 내가 먼저 섬기고 내가 먼저 종이 되어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지체들이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들의 만남이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성령안에서의 교제가 있고 서로에게 동정과 자비심을 베푸는 만남들이 되게하소서.
또 서로 자주 만나 서로 자신의 일뿐 아니라 서로의 일을 돌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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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하나된 공동체” 빌립보서 2:1-4 8/26/2018
지난 번에는 빌립보서 1:27-30절을 중심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한 정신으로 굳게 선 삶이요, 또한 복음을 믿는 일에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함께 싸우는 삶이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한정신과 마음으로 이런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를 다루고 있습니다.
1절에 언급된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님과의 교제, 동정심과 자비심이 있을 때 2절에 언급된 같은 생각, 같은 사랑, 같은 같은 뜻과 한 마음이 된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란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용기를 갖게하는 것; 사랑의 위로 (comfort)란 함께 하므로 힘을 주는 것; 성령님의 교제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사귐을 갖는 것이 성령님과의 교제이며 성령님 안에서의 교; 그리고 동정심이란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 (마 9:36) 그리고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꼈던 측은한 마음을 말합니다. (눅 15:20) 이런 심정이 없게되면 바리새인이나 돌아온 탕자의 형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란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님과의 교제, 동정심과 자비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하나된 관계성이 된다면 기쁨이 넘쳐흐르게될 것이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 기쁨이 성령님의 기쁨이요,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의 기쁨일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2:3)
지금 빌립보 교회에도 유오디아란 자매와 순두게란 자매 사이에 갈등이 있어서 교회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바울과 함께 복음증거를 위해 애썼던 헌신된 여인들 이었음에도 서로 다툴 수 있고 헛된 영광을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더 다투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6-27) 그리고 바울은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롬 12:10) 유오디아와 순두게처럼 우리가 아무리 주님께 헌신되었다 하더라도. 서로 먼저 존경하고,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종이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또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2:4)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한다거나, 사랑의 위로를 한다거나, 성령님과의 교제나, 동정심과 자비”를 실천하려면 일단 서로 만나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와, 사랑의 위로와, 성령님과의 교제와, 동정심과 자비”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려면, 모이기를 힘쓰는가 아니면 멀리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초대교회처럼 마음을 같이하면 자주 모이게 되고 (행 2:46), 또 마음을 같이하려면 모이기에 힘써야합니다.
내가 먼저 존경하고 내가 먼저 섬기고 내가 먼저 종이 되고 서로 만나기를 애쓰므로 남의 일을 돌보아주므로, 우리들의 만남이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성령안에서의 교제가 있고 서로에게 동정과 자비심을 갖는 주님안에서 하나된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