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일" 빌립보서 2:25-30 10/21/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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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그러나 나는, 나의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6. 그는 여러분 모두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앓았다는 소식을 여러분이 들었으므로, 몹시 걱정하고 있습니다. 27. 사실 그는 병이 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만 아니라 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나에게 근심이 겹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서둘러 그를 보내는 것은, 여러분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며, 나도 나의 근심을 덜려는 것입니다. 29.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십시오. 또 그와 같은 이들을 존경하십시오. 30.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고,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다 하지 못하는 봉사를 채우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제 시대 때 최권능 이란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천당”을 외치며 전도하였습니다. 하루는 일본 경찰이 길을 지나가는데 목사님이 큰 소리로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다가 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이상한 소리를 외치고 다니는 거요?”라고 일본 경찰이 묻자, 목사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답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어투로 목사님께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예수 천당이라고만 외치는데, 진짜 천당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오? 만일 있다면 예수를 보여주던지 천당을 보여 주던지 하시오?” 그 때 목사님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지금 당장 천당 본점은 보여 줄 수 없어도 천당 지점은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소. 바로 내 마음이 천당 지점이라오.”
최권능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루는 형사가 몽둥이로 최 목사를 때리니까 최 목사는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로 충만하다보니 까 그리스도가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천국을 드러낸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빌립보 교회야말로 예수로 충만한 교회,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천국지점으로서 천국을 보여주는 교회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칭찬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3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4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고후 8)
빌립보교회는 큰 환난의 시련과 게다가 극심한 가난에 쪼들렸던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기쁨이 넘쳤고,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베풀되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베풀었고, 다른 성도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특전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기회를 달라고 오히려 간절히 요청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심정이 그리스도로 충만하다보니까 큰 환난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천국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또 빌립보서 1장 3절에 보니까,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말합니다. 왜냐? 1:5절에 보니까 빌립보교회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고 7절에보니까 바울이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그들 모두가 바울과 함께 은혜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얼마나 유럽대륙과 아시아 대륙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전화나 전보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우체국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확인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물론 바울도 자신의 소식을 알리기에 애썼겠지만 빌립보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지속적으로 바울의 소식을 알아내기에 최선을 다했고 도왔던 것입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바울을 사랑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빌립보교회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유럽 마케도니아 지방을 떠날 때에 자신과 주고 받는 관계를 맺은 교회는 빌립보 교회 밖에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빌 4:15-16) 그리고 이번에도 빌립보 교회는 감옥에 갖혀 고생하고 있는 바울의 소식을 알아내어 바울을 돕도록 후한 헌금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서 헌금을 넘치도록 받아서 넉넉하게 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빌 4:18)
이제 에바브로디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가족과 직업을 제쳐놓고 800마일의 거리를 산과 바다를 건너 홀로 그 위험한 길을 통과하여 로마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왜 이렇게 위험한 여행에 에바브로디도 한 사람만 보냈을까? 아마도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던 교회이다 보니까 여행비라도 아껴서 바울에게 좀 더 보내느라고 한 사람만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에바브로가 이렇게 멀고 험한 길을 무릎쓰고 로마를 간 것은 편히 쉬고 즐길 수 있는 휴향지를 향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고통 가운데 있을 바울에게 헌금을 전하고 바울의 고통을 덜어주고 돌보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에바브로디도는 그 여정 중에 아니면 로마에 도착해서 바울을 돌보다가 병에 걸렸습니다. 27절 병이 나서 죽을 뻔하였다고 말합니다. 요즈음에는 항생제등 약도 좋고 의술도 발달해서 웬만한 병은 다 치료받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에는 한번 병이 걸렸다 하면 죽을 확률이 오늘날보다 훨씬 높을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병에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빌립보교회가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빌립보서 1장 5절로 돌아갑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 1:3-7)
그들 안에서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빌립보교회나 에바브로디도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빌립보 성도들 안에서 활동하셔서, 그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2:13) 이 똑같은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시면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소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니까 “바울을 돌보던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성도들 모두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앓았다는 소식을 빌립보 성도들이 들었으므로, 몹시 걱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냥 보통 걱정이 아니라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자신을 염려하기 보다는 빌립보 교회를 몹시 염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에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도록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서둘러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바울도 자신의 근심을 덜기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진심으로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30)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다"고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을 돌본 일을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2:19-21)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나와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지금 디모데와 관련해서도, 빌립보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고 깊이 염려했기때문에 결국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파송한 빌립보 교회
2. 또 에바브로디도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염려한 빌립보교회
3., 빌립보 교회를 그리워 하며 자신때문에 염려하는 빌립보교회를 몹시 걱정하던 에바브로디도
4. 에바브로디도를 위해 염려했고 에바브로디도때문에 걱정하는 빌립보교회에 대해서도 염려했던 바울
5. 빌립보 교회에 대해 진실로 염려하여 빌립보교회를 방문 할 계획을 갖고 있는디모데
이들 모두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 염려해 주고 걱정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모습이요 이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라, 다른 성도를 위해 진심으로 염려하며 돕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나의 일을 추구하는 자인지는 내가 다른 성도들에 대해 얼마나 진심된 관심이 있는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책장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책들을 정리하는 중, 지난 약 40년 동안 간직했던 일기장 3권을 대충 읽어본 뒤 버렸습니다. 그러나 일기장 가운데 보관했던 3통의 편지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제 일기장에도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내게 관심과 사랑을 표시한 편지만큼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제가 미국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첫부분을 읽어드립니다. “하나님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믿음 만을 키워주신 우리 전도사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전도사님 우리에게 믿음을 키워주시고 이젠 미국으로 떠나신다고 하오니 우리 전도사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실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 전도사님 미국에 가시더라도 우리를 잊지 말게 하옵시고 어디에 가시더라도 주님의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 학생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지금 저는 이 편지를 쓴 학생이 누구였었는지조차 기억 못하고 있습니다. 왜 제가 그 귀한 학생들의 얼굴을 잊고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가? 한마디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도 실지로는 나의 일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양들에게 풀은 먹였는지 몰라도 목자로서가 아니라 삯군으로서 사역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 학생의 기도와 소원을 기억하고 이 학생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으로 계속 돌보았다면, 분명 이 학생은 주님의 귀한 일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좀 더 성숙하고 진실된 일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과, 디모데의 사랑과 에바브로디도의 사랑과 빌립보교회의 사랑이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온 세계에 전해지고 깊은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양미진 사모님이 신학교 과제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후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주고 싶으신가요? 클라스 숙제라서 여쭤봅니다.” 여러분은 후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주시기 원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 후세대들에게 예수님을 남겨주어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것은 이론이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서로 간에 진실된 관심과 사랑으로 섬길 때 예수님이 전달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을 남겨야하지 않을까요?
제가 40년 전에 인도했던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조차 기억 못하는 것은 단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남을 허락하신 그들을 과소평가하며 그들을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심정이 없는 삯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다”라고 안타까와 한 것처럼, 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바울은 로마에 한번도 들러본 적이 없음에도 로마에 있던 26명 성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13번이나 반복해서 이들에게 문안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직접 만났던, 듣기만 했던 이들 모두를 귀하게 여기고 관심을 갖고 기억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실지로,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그들을 생각하며, 간절히 보고싶어했으며 10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으로 그들에게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려서 신령한 은사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롬 1:9-11) 이 것이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이제는 제가 이 땅에 살 날도 40년전처럼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만, 과거처럼 실수하지 않고 여러분들 한 분 한분을 진심으로 염려하며 제가 목회자란 직책이 있던 없던 제가 의식이 있는 날까지 여러분들을 기억하며 관심을 가지며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의 관계를 과소평가하지 말고, 서로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해 주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서로를 항상 기억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남을 허락하셨던 이 곳에 계시지 않은 성도님들, 그리고 믿음을 떠난 것 같은 분들을 위해서도 그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진정한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하므로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삶이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요; 구원을 이루는 삶이요, 영적 성장의 삶이요, 또 기쁨을 누리는 삶의 비결인 줄 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서로 염려해 주고 걱정해 주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기도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 10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지식과 통찰력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풍성하여야 가장 좋은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삶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이 바울의 기도가 우리 교회 가운데도 이루어져, 사랑으로 더욱 풍성하여 주님의 일을 행하면서 주님의 날을 준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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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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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일” (빌립보서 2:25-30)
“그러나 나는, 나의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6그는 여러분 모두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앓았다는 소식을 여러분이 들었으므로, 몹시 걱정하고 있습니다. 27. 사실 그는 병이 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만 아니라 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나에게 근심이 겹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서둘러 그를 보내는 것은, 여러분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며, 나도 나의 근심을 덜려는 것입니다. 29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십시오. 또 그와 같은 이들을 존경하십시오. 30.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고,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다 하지 못하는 봉사를 채우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 빌립보교회
고후 8:2-4
빌 1:3-7)
빌 4:15-18
2. 에바브로디도 (빌 2:25-30)
3. 디모데 (빌 2:9-11)
4. 바울 (로마서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