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이 주는 교훈” (요한복음 12:12-18) 3/2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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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 12: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요 12: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왜 종려주일이라 그러는지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읽겠습니다.,
12 이튿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를 맞으러 나가서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수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들고 (Palm tree) 예수님을 맞이하며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빨리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되고 예수님을 왕이라고 환호하며 맞게 되었는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17을 읽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야 말로 메시야란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가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지만, 나사로의 경우는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시체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11:39)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러 왔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일으킨 것을 목격했고, 이들이 다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표적을 알린 것입니다. 그 결과로 12장 11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해야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환영하고 환호한 이들 큰 무리는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12절에 보니까, 명절, 다시 말하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온 많은 무리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이들 중에는 유대지방이나 갈릴리 지방에서 온 자들도 있지만 이 들 중에는 수백마일 아니 로마에서 온 사람처럼 천마일이 넘는 타국에서 온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서 온 자들이 예수님을 환영했는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침묵하고 있었는가?
예루살렘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부활한 베다니란 동네에서 2마일 밖에는 안떨어져 있는 가까운 동네였으므로 예루살렘 주민들도 분명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이토록 무관심했을까요?
비스핫 상황이 예수님 탄생때로 일어났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헤롯 뿐 아니라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을 알아내어 불과 2,3 마일 밖에 안떨어진 베들레헴으로 갈 때 예루살렘 사람들 중 아무도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해서 베들레헴을 방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주민들은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성전, 제사장 제물 제사등 늘 종교적인 행사에 익숙되어 열정은 식어지고 점점 형식적인 신앙만 유지했던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으로 온 자들은 먼 곳에서 심지어 먼 타국에서 장기간의 여행을 떠나기 위한 열정과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했습니다. 특별히 외국에서 온 자들은 오순절때까지 그러니까 약 두달정도를 예루살렘에서 머물기 때문에 굉장한 준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의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헌신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속에서 신앙적으로 무관심하고 나태하고 안이한 상태에 있었던 것같습니다.
저는 하용조 목사님이 21세기에 존재하는 참교회의 모습을 보려면 북한의 지하교회를 보아야한다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헌신과 희생이 필요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미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은 아무 희생이나 헌신이 없어도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와 여유로운 환경가운데 있지만, 현실에 안주하여 우리의 신앙이 점 점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주님이 오시는데도 무관심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처럼,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 교제하는 일이나 주님의 재림을 사모함이 없이 나태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두번째 교훈을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숨기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실 때 마다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이다란 고백을 할 때에도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 16:20)
그리고, 5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모시려 할 때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습니다” (요 6:15) 그런데 이제 큰 무리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신 메시야라고 큰소리로 외쳐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상황이 다시 벌어진 것입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이 이들을 피했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마2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장거리던 단거리던 항상 걸어 다니셨지 단 한번도 짐승을 타고 다니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루살렘을 눈 앞에 둔 거리에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1장 4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 12:15) 이는 스가랴 선지자가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슥 9:9)
이제는 그 분의 행동으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란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요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만인에게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23)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민란이 일어날까봐 명절 때는 예수님을 죽일 계획은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가릇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군중들의 눈을 피해 드러나지 않게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도 몇일이 못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폭도로 돌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요 12:16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제자들도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무리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요 “빨리 구원하소서, 제발 구원하소서" (마 21:9)라고 외쳤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들은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막 11:10)라고 외쳤습니다. 무리들도 제자들처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가 이들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눅 19:11)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셨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런데 어떤 왕이신가?)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민족(들)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말과 병거와 활을 끊고 - 다시 말하면 전쟁과는 상관 없이 -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는 왕으로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를 다스릴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되심을 공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은, 이제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 목적을 수행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세상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이 될 때가 되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처럼 전쟁을 상징하는 백마를 탄 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과 화평을 상징하는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이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한 왕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도를 가장 빨리 알아챈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무리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돌변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잠시 따랐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뜻과 소원을 이루어 주실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나는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되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을 내 삶의 진정한 왕으로 모신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다시 본문 말씀(요 12:16)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는 예수님께서 죽음 부활 승천하시므로 하나님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영광을 얻으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요 7:39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6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5:26) 그렇습니다. 진리의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시는 분이시요 성경말씀과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신약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오늘날도우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됩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게하고 신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참 나의 왕으로 모시며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려면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인도함 받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 배우게 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아무 희생이나 헌신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때문에 주님과 주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나태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되 결국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삶을 살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 왕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임을 감사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려고 하신 것입니다.” 롬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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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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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의 교훈” (요한복음 12:12-18)
1.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을 찾아온 유대인들 (12,13)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환호하며 환영한 무리들은 예루살렘성 거주민이 아니라 다른 유대나 갈릴리 아니면 수백마일 혹은 천마일이상 떨어져 있는 타국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자들이었습니다. (12) 이들은 또한 유월절뿐 아니라 오순절때까지 오랫동안 머물 준비를 했어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열정과 헌신을 가진 자들만 예루살렘까지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반면, 예루살렘의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서 어떤 희생도 헌신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속에서 신앙적으로 나태하고 안이한 상태에 있었던 것같습니다. 우리들도 자유와 여유로운 환경가운데 살므로 자칫, 현실에 안주하여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주님이 오시는데도 무관심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처럼,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 교제하는 일이나 주님의 재림을 사모함이 없이 나태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2. 자신의 뜻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예수님의 뜻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 (14-16)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열열히 환호하던 무리들이 몇일이 못되어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폭도로 돌변합니다. 이 무리들이나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주실 메시야로 믿고 따랐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스라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 께서 예언 하신대로, “말과 병거와 활을 끊고” - 다시 말하면 전쟁과는 상관 없이 -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는 왕으로 예수님은 오셨 고, 평화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를 다스릴 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 다. (스가랴 9:9-10)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소원과 뜻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경우 가 많습니다. 우리는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되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3. 예수님의 뜻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려면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름 (16)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을 내 삶의 진정한 왕으로 모신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 부활 승천하시므로 하나님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영광을 얻으신 후 성령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요 7:39) 예수님께서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자신에 대해서 증언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4:26;15:26) 진리의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시는 분이시요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깨닫게하고 신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참 나의 왕으로 모시며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려면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인도함 받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