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일 (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 마태복음 27:32-44 3/30/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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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30일 (금) 마태복음 27:32-44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33 그들은 골고다 곧 '해골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서,34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드려서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35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서, 그의 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36 거기에 앉아서, 그를 지키고 있었다.
37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 라고 적은 죄패를 붙였다. 38 그 때에 강도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달렸다.
3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40 말하기를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였다.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43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겠지." 44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욕하였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하였을 때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그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요 18:31)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죽이려고 했던 것 기억 하시지요? 실지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원하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돌로 쳐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이유는 아직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의 손으로가 아니라 이방인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처형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흉악범의 죽음으로 구경거리로 조롱거리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가장 악랄하고 수치스럽고 잔인스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므로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들의 뜻대로 빌라도를 통해서 십자가형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말씀하신대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 18:32) 유대인들의 뜻대로 된듯 하였지만 실지로는 예수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빌라도의 재판 이 후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살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짜왕이라고 조롱하기 위해 머리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손에는 마치 왕의 홀처럼 갈대를 쥐어주고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조롱하며 침을 밷고 갈대로 그를 치며 능욕하였습니다 그 후에 당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지게하고 사형장으로 가게하였습니다. 채찍에 맞아 많은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지신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으므로. 32절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33 그들은 골고다 곧 '해골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34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드려서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석을 보니까 이 쓸개를 탄 포도주는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준비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을 덜어주기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물인 줄 알고 마시려 하시다가 쓸개탄 포도주 식초인줄 아시고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느껴야할 고통을 다 감수하고 받으시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을 느끼셨으며 지치셨으며 목마름을 느끼신 분 이시요 맛을 보고서야 그것이 물인지 포도주식초인지 알 수 있었던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모습의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분께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과 같이 육신을 입으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위해서 죽기위해서 였습니다. (히 2:14)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 1서 4:10)
37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 라고 적은 죄패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났을 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가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왕국)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8:36) 예수님은 유대왕이시지만 제자들이 생각했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분이십니다. (눅 1:33) 그러므로 유대인혈통으로 태어났다고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받아들인 자는 어느나라 백성이고 그 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분이 38 (절을 보니까) 그 때에 강도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달렸다
흉악한 죄인들과 함께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것입니다. (신 21:23; 요 3:14,15):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후 5:21)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갈 3:13
그러나, 그 십자가 주위에 있던 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3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40 말하기를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였다.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43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겠지." 44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욕하였다.
지금 예수님은 흉악범으로서 완전히 발가 벗긴 상태에시 십자가의 극단적인 고통가운데 시달리고 있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있던 모든 자들이 위로보다는 예수를 놀리면서 조소하고 조롱하고 능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란 말로 절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겪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는 영적인 죽음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 (히 12:2) 예수님은 이 기쁨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어머니도 그 외에 아구도 몰랐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겪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으로 인하여 성취될 기쁜것들을 내다 보시며 극심한 고통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를 의미하며 우리의 영생을 의미하며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된 모든 정체성들은 모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새로운삶, 풍성한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임할 이 엄청난 복들,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는 온갖 복을 내다보시고 기뻐하시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고저 하는 마음으로 매일 저녁 모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을까? 우리를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일까요?
그 보다는 예수님께서 이토록 비싼 댓가를 치루시므로 주신 복들을 알고 누리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일 것입니다. 실지로 영생을 가진자처럼, 참소망을 가진자처럼, 구원을 받은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걸작품이요 하늘나라 백성이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마땅히 풍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요 주님의 고난을 헛되지 않게 하는 삶입니다
만약 내가 이런 복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와 죽음을 헛되게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베푸신 복들을 알고 누려야겠습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 멋대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5:15) 예수님을 위해 살므로 주님이 주신 복들을 누리며, 복음에 합당한 삶,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33 그들은 골고다 곧 '해골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서,34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드려서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35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서, 그의 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36 거기에 앉아서, 그를 지키고 있었다.
37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 라고 적은 죄패를 붙였다. 38 그 때에 강도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달렸다.
3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40 말하기를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였다.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43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겠지." 44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욕하였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하였을 때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그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요 18:31)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죽이려고 했던 것 기억 하시지요? 실지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원하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돌로 쳐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이유는 아직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의 손으로가 아니라 이방인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처형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흉악범의 죽음으로 구경거리로 조롱거리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가장 악랄하고 수치스럽고 잔인스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므로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들의 뜻대로 빌라도를 통해서 십자가형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말씀하신대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 18:32) 유대인들의 뜻대로 된듯 하였지만 실지로는 예수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빌라도의 재판 이 후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살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짜왕이라고 조롱하기 위해 머리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손에는 마치 왕의 홀처럼 갈대를 쥐어주고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조롱하며 침을 밷고 갈대로 그를 치며 능욕하였습니다 그 후에 당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지게하고 사형장으로 가게하였습니다. 채찍에 맞아 많은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지신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으므로. 32절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33 그들은 골고다 곧 '해골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34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드려서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석을 보니까 이 쓸개를 탄 포도주는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준비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을 덜어주기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물인 줄 알고 마시려 하시다가 쓸개탄 포도주 식초인줄 아시고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느껴야할 고통을 다 감수하고 받으시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을 느끼셨으며 지치셨으며 목마름을 느끼신 분 이시요 맛을 보고서야 그것이 물인지 포도주식초인지 알 수 있었던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모습의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분께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과 같이 육신을 입으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위해서 죽기위해서 였습니다. (히 2:14)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 1서 4:10)
37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 라고 적은 죄패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났을 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가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왕국)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8:36) 예수님은 유대왕이시지만 제자들이 생각했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분이십니다. (눅 1:33) 그러므로 유대인혈통으로 태어났다고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받아들인 자는 어느나라 백성이고 그 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분이 38 (절을 보니까) 그 때에 강도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달렸다
흉악한 죄인들과 함께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것입니다. (신 21:23; 요 3:14,15):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후 5:21)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갈 3:13
그러나, 그 십자가 주위에 있던 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3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40 말하기를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였다.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43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겠지." 44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욕하였다.
지금 예수님은 흉악범으로서 완전히 발가 벗긴 상태에시 십자가의 극단적인 고통가운데 시달리고 있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있던 모든 자들이 위로보다는 예수를 놀리면서 조소하고 조롱하고 능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란 말로 절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겪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는 영적인 죽음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 (히 12:2) 예수님은 이 기쁨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어머니도 그 외에 아구도 몰랐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겪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으로 인하여 성취될 기쁜것들을 내다 보시며 극심한 고통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를 의미하며 우리의 영생을 의미하며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된 모든 정체성들은 모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새로운삶, 풍성한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임할 이 엄청난 복들,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는 온갖 복을 내다보시고 기뻐하시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고저 하는 마음으로 매일 저녁 모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을까? 우리를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일까요?
그 보다는 예수님께서 이토록 비싼 댓가를 치루시므로 주신 복들을 알고 누리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일 것입니다. 실지로 영생을 가진자처럼, 참소망을 가진자처럼, 구원을 받은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걸작품이요 하늘나라 백성이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마땅히 풍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요 주님의 고난을 헛되지 않게 하는 삶입니다
만약 내가 이런 복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와 죽음을 헛되게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베푸신 복들을 알고 누려야겠습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 멋대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5:15) 예수님을 위해 살므로 주님이 주신 복들을 누리며, 복음에 합당한 삶,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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