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증거에 참여하는 일은?" (복음증거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 이해 혹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빌립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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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1-7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있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 모두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3.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여러분 모두를 마음에 두고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7.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 압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을 나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올 해 들어서 우리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 그리고 현재 빌립보서를 본문으로 하여 큐티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물론 큐티를 나름대로 꾸준히 해왔지만, 올 해 들어 먼저 본문의 제목을 정하고, 그 다음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리고 내게 주신 말씀, 적용 기도등을 하면서 예전보다 좀 더 제대로 큐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본인이 직접 읽고 관찰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갖게되는 것 같아서 감사를 느낍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큐티에 참여하셔서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매일 매일 은혜 가운데 사시며 또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설교도 큐티 본문 가운데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도 에베소서도 했지만 우선 가장 모범적인 교회였던 빌립보교회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오늘부터 빌립보서를 본문으로 매주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주님의 만찬이므로 평소에 생각했던 다른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고저합니다. 그외 특별한 날이 아니면 계속 빌립보서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저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1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있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 모두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는 로마에 있던 바울과 디모데가 그 당시 빌립보에 살고 있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상으로 로마와 빌립보를 잠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6장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유럽지역에 전도를 하기 위해서 처음들린 도시 빌립보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첫째 가는 도시이고, 로마 식민지였다.”
지금도 그리스에 가면 마케도니아 주가 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아버지 필빕 2세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합니다. 빌립보란 도시이름도 알렉산더의 아버지이름을 따라 명칭한 것입니다.. 바로 이마케도니아 지역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이 빌립보에 바울이 유럽 땅에 첫번째 교회를 세우게됩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중 빌립보 교회를 세웠는데 그 후 바울은 2 차 전도 여행과 3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잡혀서 유대땅에 있는 가이사랴에서 재판도 받으면서 2년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이 상소하여 재판받기 위해서 로마로 가서 감금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에 빌립보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헌금과 함께 바울에게 보낸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를 세운지 약 10년이란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10년이 지났음에도 그리고 1000마일 이상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들의 관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물론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에도 편지를 보냈고 골로새교회에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와 함께 에베소서 골로새서를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감옥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때에도 바울은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바울이 이들에게서 사랑과 도움을 받고 감사했던 기록을 저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
반면, 빌립보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달리 5절을 보니까 “바울이 그들을 떠나던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기도할 때마다, 항상 빌립보 성도들 모두를 마음에 두고 기쁨으로 간구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다"는 말을 (개역개정: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 원어로는 복음 안에서의 코이노이아라고 되 있습니다. 코이노니아가 뭐죠? 교제, 사귐, 동역, 참여, 나눔) 그렇다면 우리도 빌립보교회처럼 복음 안에서 교제 하고 동역하고, 나누고, 복음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교회가 되어야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들이 갖고있는 대한 이해 혹은 마음가짐을 우선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그 다음 절 6절을 보면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빌립보 성도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복음증거에 동참한 선한 일을 빌립보교회 성도들 스스로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고 선포합니다.
복음과 복음증거에 동참하는 일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되 어디서 그 일을 시작하시는가?
현대말로 번역된 표준새번역에는 “여러분 가운데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처럼 “여러분 안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어성경에도 예외 없이 “여러분 안에서”로 (among이 아니라 in)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여러분 안에서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던, 여러분 안에서든 이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만약 우리 가운데서라고 번역되어 있다면, 우리들이 행하는 어떤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일이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복음에 동참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심령 속에서 시작하신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다음 장 2장 13절에 이 사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2:13).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기쁜 뜻을 행하고저 하는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행하는 능력을 주시므로 복음증거에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왜 수 많은 교회가 있었지만, 바울이 왜 빌립보 교회만 복음 증거에 동참한 교회란 칭찬을 합니까? 다른 교회들에게 성령님께서 말씀 하지 않으십니까? 그들 가운데도 같은 하나님께서 같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요한계시록2장과 3장에 보시면 주님께서 소아시아지역에 있던 7개의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교회에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모든 교회에 성령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성령님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가 있고 듣지 않는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에 동참한 교회냐 아니냐의 차이는 성령님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과 복음증거에 동참하는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십니다.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므로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므로 복음증거를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복음증거를 감당하는 선교사님들을 도우며 복음의 교제에 참여하는 선한 일을 지속적으로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그 다음 절,. 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 압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을 나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이나 3차 전도여행등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만 바울과 동참해준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갇혀 있을 때에도 동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서 갇혀있는 동안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고 (1:19)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하여 1000마일 이상 떨어져있는 바울을 가서 돕고 헌금을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선교사역을 감당할 때는 지원을 하지만, 사정상 혹은 준비하기 위해서 선교사역을 감당치 못할 상황이 되면 선교지원을 끊는 그런 선교가 아니라, 빌립보교회는 당장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아니던 바울을 지원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이유를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를 말합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께 그들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에게도 헌신하였읍니다.” (고후 8:5) 빌립보 교회는 선교사역에 대한 헌신에 앞서 선교사에 대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울이 각 교회들에게 쓴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바울에게 헌신했던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의 인삿말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서신서에서 바울은 첫 인사말로 자신이 사도임을 밝힙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밝힙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는 아무런 타이틀 없이 단지 바울이라고만 밝힙니다. 왜 다른 모든 교회들에게는 바울이 사도됨을 밝힙니까? 그들 교회들 가운데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치 않은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께 그들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바울에게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절을 다시보시면, 이런 헌신떄문에 바울은 빌립보성도들을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서로 자신의 마음 속에 간직했던 관계는 단지 사역을 돕는 관계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격적으로 헌신한 관계를 말합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참여란 말이, 원어로는 코이노니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이 중심이요 복음증거가 목적인 복음 안에서의 코이노이아 - 교제, 사귐, 동역 (your partnership in the gospel)을 말합니다. 버울은 저들의 인생 끝날 때까지 복음 안에서 이런 교제가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지 물질적인 도움뿐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 인격적인 교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묶여진 관계입니다. 먼저, 우리들의 관계속에서 이런 복음 안에서의 교제와 헌신을 경험하고, 우리가 돕는 선교사님들과의 관계로까지 확산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7절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복음 안에서의 교제, 복음을 증거하는데 돕고 참여하는 사역을 은혜에 동참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증거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나 부담이기 전에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할 때, 빌립보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헌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 (성도를 섬기는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데 참여 for the grace and the fellowship of the service among the saints) 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했다고 간증합니다. (고후 8:2-4)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해서 말씀드린다면 빌립보교회는 성도를 섬기는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 교제의 기회를 갖게 해달라고 떼를 써 간청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자신들도 말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있으면서, 다른 성도를 섬기는 것을 기쁨이요 특권으로 생각하고 성도를 섬기는 은혜로 여겼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복음증거에 참여하는 것도 의무나 부담이기 전에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거리로는 1000마일이 훨씬 넘는 곳에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빌립보교회의 첫번째 신자였던 루디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루디아가 그의 집 식구들과 함께 다 침례를 받고나서 바울과 그와 함께 했던 디모데오 실라에게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그리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행 16:15 무슨 말입니까? 만약 당신들이 우리 집에 와서 유하지 않으면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증거로 삼겠다란 말아닙니까? (위협수준) 간청하고 강권했습니다. (바울일행이 동의할 때까지 간청했다는 말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루디아가 교회에 영향을 안끼쳤겠습니까?
좀 곁길로 가는 이야기지만,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감독의 자격,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의 자격중에 “나그네를 대접하며 - 남을 후하게 대접하는 사람이어야한다고 말합니다. NLT "집에 손님을 모시는 것을 반드시 즐거워하는 자를 그… He must enjoy having guests in his home, (딤전 3:2) 남을 섬기는 것을 은혜요 특권으로 생각하는 자가 교회 지도자가 되dj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사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락 명령합니다. 벧전 4:9)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우리가 숫자도 적고 재정도 적은데 어떻게 복음증거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에 마지막 모임을 갖기 위해서 큰 건물을 빌린 것이 아니라, 루디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빌립보에서는 에베소나 고린도처럼 오래 머물렀던 곳이 아니라, 소수의 성도만 있었다고 짐작해봅니다. 우리도 숫자에 상관 없이 복음증거에 참여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복음에의 참여는 우리가 우리 가운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복음에의 참여는 복음선포에 대한 헌신 이전에 복음선포자에 대한 헌신이다.
복음에의 참여는 부담스러운 의무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복음증거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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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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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증거에 참여하는 일은? 빌립보서 1:1-7
(복음증거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 이해 혹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빌립보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다"는 말을복음 안에서의 코이노이아를 (교제, 사귐, 동역, 참여, 나눔) 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가져야할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V.6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복음증거에 동참은빌립보 성도들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시작하십니다. 복음에 동참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심령 속에서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2:13).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 소아시아지역의 7개 교회들에게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결국, 복음에 동참한 교회냐 아니냐의 차이는 빌립보교회처럼 성령님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느냐 아니면 아니냐에 있습니다.
2. V. 7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 압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을 나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2차 및 3차 전도여행등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만 아니라, 갇혀 있을 때에도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고 (1:19)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하여 1000마일 이상 떨어져있는 바울을 가서 돕고 헌금을 전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역에 앞서 바울에게 헌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께 그들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에게도 헌신하였읍니다.” (고후 8:5) 선교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지 물질적인 도움에 앞서 인격적인 사랑. 인격적인 교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묶여진 관계입니다.
3. V 7b “내가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증거에 참여함을 의무나 부담이기 전에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할 때,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넘치는 기쁨으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성도를 섬기는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 교제의 기회를 갖게 해달라고 바울에게 떼를 써 간청한 것입니다. (고후 8:2-4) 성도를 섬기는 것과 바울을 돕는 것을 빌립보 성도들은 의무나 부담으로가 아니라 은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