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서 1:8 5/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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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생각하는지, 보고싶어 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8)
벌써 이번 주면 빌립보서 큐티가 끝납니다. 올 해 들어 벌써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를 큐티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한다면 앞으로 올 해 안에 신약성경 4,5권까지도 더 큐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큐티를 강조하는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관심도 없고 소홀하다가 특별한 문제가 생겼을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문제해결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쁘고 힘들더라도 큐티를 하는 습관, 아니면 그냥 성경읽기나 기도를 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란 말을 새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공동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심장, 심정 혹은 사랑으로 번역된 말은 원어로는 창자 혹은 내장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유다가 죽을 때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는데, (행 1:18) 그 때 그 창자나 오늘 본문의 심장이나 똑같은 원어를 (스플랑크나) 사용했습니다. 실지로 King James 번역은 “I long after you all in the bowels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내장 혹은 창자로 여러분들을 사모한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심장이나, 창자나 내장은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의 감정을 상징합니다. 실지로 우리 한국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는 감당치 못할 심적인 고통을 당할 때 환장(換腸)한다라고 말합니다.. 내장이 뒤집힐 정도로 심정인 고통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마 9:36 “예수께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도 원어로는 “내장이 움직여졌다” 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환장할 정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길 잃은 양을 향한 예수님의 심장이요 목자의 심정을 말합니다.
“37 그래서 (환장할 정도로 마음의 고통을 느끼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38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목자없는 양들같은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혼자 다 돌볼 수 없으므로 그 분의 일군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필요한 일군들이란 바로 이런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바로 이런 주님의 심장,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 분의 양들을 돌보시고 그 분의 일을 하십니다. 바울이 바로 이런 주님의 심장을 가졌던 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는 고백은, 바로 바울의 심장을 뛰게한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심장이란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어떻게 빌립보성도들을 사랑했는지 그의 고백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다른 성도들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할 수 있을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누구를 향하여 이런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본문을 읽습니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생각하는지, 보고싶어 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니라.” 여기 보시면 그냥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러분 모두를”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You가 아니라, All of You라고 했습니다. 안타깝게 모두란 말을 빼버린 한글 번역도 여럿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두를“이란 표현이 1:1 - 8절 사이에 5번이나 언급됩니다. V.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V. 4 간구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V. 7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 압니다. (왜냐하면) 내가 갇혀 있을 때에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할 때에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왜 바울이 그냥 너희라 그러지 않고 너희 모두라고 표현 하였는가? 그것은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하되 한 사람도 소홀히 여김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이 것이 주님의 심정입니다. 마치 양떼를 치는 목자가 각 양들의 이름을 알며 각 양들에게 관심을 갖고 키우듯이, 지금도 우리가 주님과 기도 속에서 대화할 때에 그 분은 저를 그리고 여러분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제게 집중해서 관심을 쏟으며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마치 10명의 자녀를 둔 부모님이 각 자녀당 10/1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모든 사랑으로 각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각 자 각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도바울도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했다고 고백합니다.” (행 20:31)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그들 하나하나를 대했다고 밝힙니다.” (살전 2:11) 이 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26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이들에 대해서 “문안하여 주십시요”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26명 중에는 로마인도 있고, 헬라인도 있고 그리고 유대인도 있습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습니다. 노예신분의 성도도 있고 헤롯대왕의 손자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친구같은 높은 신분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노예든 왕족집안이던 출신성분이나 사회적지위에 상관 없이 그냥 이름으로 형제 자매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주안에서 동등하게 대한 것입니다.
또, 빌립보서 1:1절 사도바울의 인사말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있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 모두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성도들이 감독들과 집사들보다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목사님과 성도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성도님들과 목사님에게”라고 인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면 교회내에서의 목사나 장로같은 직분은 섬김을 받는 계급장이 아니라 섬기는 종의 직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마치 제사장처럼 여겨지고 또 교회의 직분들이 계급장이 되기 시작하면 교회에 차별이 있게 되고, 차별이 있으면 절대로 우리는 하나됨을 경험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를 대할 수 없게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성도 모두를” 그토록 사모한다고 고백할 때, 그 모두 속에는 목사와 집사도 포함되어 있지만, 교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가난 하고, 은사도 가장 없고, 지식도 가장 없는, 세상적인 기준으로볼 때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를 똑같이 포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 중 한사람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직분이나 신분이 능력에 상관 없이,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서로 서로를, 그리고 특별히 가장 소홀히 여김 받기 쉬운 지체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신 본문을 읽습니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물론 생각한다, 그리워한다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지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말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살전 2:7-8) 사모한다는 것은 단지 보고싶어하는 감정상의 문제뿐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목숨까지 주고저 하는 헌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실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그토록 사모하므로 그들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 위에 자신의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빌 2:17) 그들을 위해서라면 기쁨으로 죽을 수 있다는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김기영집사님이 복음 송가 중에 특별히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처럼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란 시편 42편의 곡을 좋아하십니다. 이 시편은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이 그리스에 지배를 받게 되며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도 번역했습니다. 시편의 “갈급함"이란 말이 바로 빌립보서의 “사모함"과 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epipotheó) 바울은 모든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목이 너무말라서 사냥군이 숨어 있을지 모를 시냇물을 찾아가듯이, 목숨을 걸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이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목자의 심정입니다.
물론, 바울만이 빌립보 성도들을 사모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돌보기 위해 빌립보교회로 부터 파송받아 로마까지 온 에바브로디도도 뒤에 두고온 빌립보의 성도 모두를 “간절히 사모하였고, 그들을 위해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빌 2:26) 그러므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디모데를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21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빌 2:20-21) 빌립보 성도들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이요 예수님의 관심입니다. 바울을 돌보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돌보았던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다고 묘사합니다. (빌 2:30)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사모하는 것, 에바브르도디도가 바울을 돌보았던 것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을 사모하는 것, 디모데가 빌립보 성도들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 모두 그리스도의 일이요 모두 다 예수님의 심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심장을 가졌다면 진심으로 다른 성도들을 사모하고 염려해 주며 희생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이 또한 그리스도의 관심이요 그리스도의 명령이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때 당시 그런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없음을 안타까워 한것처럼.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를 진심으로 염려해주며 희생까지 할 수 있는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들면서 우리 각 자를 위해 돌아가신 그 주님의 심장을 우리도 가지고 바울처럼, 에바브로디도처럼, 디모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또 우리가 아는 다른 성도들에게 참으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며 돌보아 주는 자,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또 한번 읽습니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냥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면 됬지 꼭 그들에게 밝혀야 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모하는 심정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구태여 그들에게 밝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답을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 됬지 그 것을 꼭 표현해야 할까요? 꼭 우리가 찬양과 기도와 고백과 헌금을 통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밖으로 표현해야 합니까? 주님이 그런 표현을 안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모르실까요? .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심정과 나의 사정을 이미 나 보다도 잘 아시는데 왜 내가 그 분에게 나의 심정과 사정을 알리며 기도합니까? 주님이 우리의 심정과 사정을 우리 보다 잘 아심에도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자체가 주님과의 교제요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만으로 사랑치 않고 찬양 기도 고백을 하는 것도 이런 표현 자체가 주님과의 교제요 주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멀리 떨어져있는빌립보 성도에게 편지를 통하여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그 심정을 알리는 것도 그 자체가 사랑이요 교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 역시, 그 자체가 사랑이요 교제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만 가지고 표현을 안한다면 결국 그 사랑의 마음도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만약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정기적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식어지게되거나 결국 무신론자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있음에도 그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결국 그 관계가 무관심하게 되거나 잊혀지게 되어 결국 끊어지고 없어진 관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나 행동으로 그 것이 표현되어야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사랑을 표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먼곳에서도 그가 섬기던 모든 교회들에게 편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내서 자신의 심정과 사정과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매주 그리고 주중에도 만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로를 잊게 되거나 관계가 끊어지는 것까지는 염려를 안해도 될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꼭 사랑의 표현을 해야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소홀하기 쉽습니다. 작년 말 노목자님 댁에서 가졌던 송구영신 모임에서 그리고 올해 초 기도원에서 가졌던 기도모임에서 우리가 평소보다 마음에 간직했던 깊은 것들을 말로 솔직하게 표현할 때 서로에게 훨씬 더 가까와짐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특별한 때만 그럴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우리기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끼리뿐 아니라, 우리가 영어부 학생들과 선교사님들과 교회 울타리를 떠난 모든 자녀들과 성도들과 그 외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다른 분들에 대한 사랑을 좀 더 자주 좀 더 깊게 또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우리들의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우리로 사랑을 표현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또 우리 가운데는 치료가 있고 회복이 있고 진정한 사귐의 축복을 경험하는 21세기 침례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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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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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심장으로…” (5/6/20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8)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심정 혹은 사랑으로 번역된 이 말은 원어로는 창자 혹은 내장이란 뜻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를 보시고 가지신 불쌍히 여기신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 9:36) 그리고 일군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일군은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어떻게 빌립보성도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사랑했는가를 살펴봅니다.
1. “여러분 모두를”
빌립보서 1:1-8절까지 “여러분 모두를” (all of you or you all) 이란 표현이 5번이나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을 군중의 일부로 보지 않고, 단 한 사람도 소홀히 여김이 없이 인격적으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차별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10명 두었다해서 각 자에게 10% 사랑이 아니라 100% 사랑으로 대하듯이, 목자가 많은 양떼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돌보듯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를 대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볼 때 가장 연약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를 포함하여 한사람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2. “얼마나 사모하는지”
사모한다는 말은 물론 생각한다, 그리워한다란 뜻이지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말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고백합니다. (살전 2:7-8) 실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그토록 사모하므로 그들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 위에 자신의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빌 2:17) 그들을 위해서 라면 기쁨으로 죽을 수 있다는 고백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
3.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고백할 필요가 있을까요?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구태여 그들에게 밝혀야 하는 가요? 이 질문은 우리의 심정과 사정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예배나 찬양으로 표현하고 기도로 사정을 아뢸 필요가 있는가와 마찬가지 질문입니다. 그러나, 찬양이나 기도란 표현 자체가 주님과의 교제요 주님에 대한 사랑인 것처럼, 우리가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한다고 알리는 것 역시, 그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요 교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들은 말뿐 아니라 삶으로도 적극적으로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