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이여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 아버지의 날" 에베소서 0601-04 6/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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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3.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한 약속입니다.
4. 또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6.25 당시 남쪽으로 피난과정에서 흥남부두에서 아버지를 잃고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아버지 노릇을 해야했습니다. 아버지 노릇하느라 막노동과 서독광부와 월남전 참여등 인생의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야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자녀들과 손자들이 모여 떠들며 즐겁게 식사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방에 혼자 들어가 아버지 사진을 보며 말합니다.. "아버지 이만하면 내 약속 잘 지켰지요. 나 이만하면 잘 살았지요, 근데 진짜 힘들었거든요" 감동하여 울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세대나 혹은 형님이나 누님의 세대는 정말 가족들을 먹여 살리거나 생존하기에 바빠서 자녀들의 정서적인 면 교육적인 면에는 전혀 신경쓸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런 시대를 직접 살았거나 그런 시대의 배경 속에 살면서 우리 스스로도 어떻게 자녀를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 배운 것 없이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잘 키우신 여러분들 정말 수고하고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할 뿐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공경이란 말은 영어성경에는 Honor하라고 되있습니다. 부모를 명예롭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자식을 키운 어머니 아버지들은 명예로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니까,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아버지에게만 부탁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또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자녀를 양육하는데 엄마의 역할도 절대적으로 중요함에도를 왜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했을까? 지난 주에 제 친구목사님이 알려줘서 인터넷 중앙일보에 실린 어떤 아주머니가 쓴 이야기를 읽게되었습니다.
이분의 남편은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게다가 무관심한 가장이었다고합니다 결국 아들이 초등 3학년 때 아들과 둘이 따로 집을 나와 독립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굶어 죽을 지도 모르겠다 느낄 정도로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아는 선배의 소개로 좋은 회사를 다니게 되어 조금씩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들이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참고 참았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얌전한 애가 집에만 오면 180도 돌변하여 엄마를 그렇게 괴롭혔고 결국은 자퇴하고 싶다고,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존심도 감정도 다 접어버리고 아이 아빠한테 연락하여 아이 문제가 너무 심각해 감당치 못하겠으니까 아이와 자기 사이에 잠시만 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심하게라도, 무능하게라도 그냥 거기 잠깐 있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결국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들의 방에서 같이 지내며 아들과 붙어지낸지 한 달이 넘습니다. 저는 밖에서 일부러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가고, 남편은 집에서 아이 밥을 먹여 놓습니다. 마치 뒤바뀐 남편과 아내 같습니다. 저는 현재 남편이 얼마의 빚이 있고 무슨 일을 하다 온 것인지 모릅니다. 이러다가 저한테 또 무슨 불똥이 튈지 겁도 납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만큼은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일단 아이 곁에 사람이 있어 안심입니다. 남편은 특유의 무심함으로 쿨하게 아이와 소통도 잘 하더군요. 큰 소리 안 내고 학교에 보내고, 오후에 같이 외출도 하나봅니다. 퇴근 후 저는 두 남자에게 아무 말 걸지 않고 제 방에 들어가 쉽니다….
결국 이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못나고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아빠라도 자녀들에게는 아빠가 함께 해주고 영향을 끼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캐나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아빠 없이 자란 아이들의 뇌는 회복될 수 없게 손상되어 분노 가운데 성장하며 마약복용에 빠지기 쉽다고합니다. 자녀양육에 있어서 부모님들의 역할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가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특별히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올 해 표어 -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여호수아의 고백입니다. 각 가정에서 특별히 우리 아버지들의 결단이 요구되는 도전입니다. 바울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아주 공손히 복종하게 하는 자가 집사나 감독이 되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딤전 3:4, 12) 아버지를 가정을 다르시는 자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육적인 필요를 공급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정의 리더가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그 아빠들에게 우선적으로 자식들을 노엽게 하지말라고 당부합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법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은 단지 남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나 자녀를 버리거나 노예로 팔거나 심지어 죽일 권리까지 있었다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들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었 듯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은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의 인권을 무시하던 이런 시대에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명령한 것은,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파격적인 뜻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국도 전통적으로 어린이들을 막대하고 무시하는 문화, 인격적으로 존중히 대하는 문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특별히 도전이 되는 명령인줄 압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는가?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어디 같이 놀러 가자고 약속하여 손꼽아 기다렸는데 막상 그 날이 다가오니까 부모님들이 못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화가나서 건넌방에서 울며 땡깡을 부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억울한 순간을 절대로 잊지말자. 반드시 원수를 갑자라고 다짐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혹시 자녀들에게 분노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들을 가르키려고 하기 전에 분노를 먼저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또, 제가 어렸을 때 마루 걸레질을 할 때 어머니한테 칭찬대신 오히려 야단맞고 억울함과 분노, 좌절감을 느꼈던 것같습니다. 부모가 화난다 해서 자기 감정에 따라 화가 풀기 위해서 잔소리하고 야단친다면 자녀들은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게될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중에 빌립보서 2:14절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이나 시비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는데, 야단치는 것도 불평이나 시비가 아닐까요? 이 말씀을 먼저 부부간에 그리고 우리들 자녀들에게 먼저 적용해야겠습니다.
또 한가지, 제가 어른으로서 분노를 경험한 것이지만 어린이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분 안되는 모임에서 인도자가 다른 분들에게는 다 발언할 기회를 주는데 저에게는 발언할 기회를 한번도 주지 않았을 때 무시당한 느낌을 받았을 때 심한 분노를 느꼈었습니다. 만약 부모가 다른 형제나 자매의 이야기는 들어주면서 내 말은 듣지 않는다든지, 무슨 이유로던 자녀들을 차별대우할 때 자녀들은 무시 당한다는 생각으로 분노가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빠에게 혹은 어머니때문에 화가 났던 경험을 기억하십니까? 어떤 장로님에게 말안듣는 딸이 있었습니다. 머리도 이상하게 하고 다니고 복장도 맘에 안들게 하고 다녔습니다. 게다가 여학생이 밤 늦게 집에 들어오곤 하였습니다. 어느날 이 아빠가 늦게 들어오는 딸과 딱 마주치게 되어, 야단을 쳤는데, 딸이 공손히 말을 듣기보다는 안색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하도 화가나서 뺨을 때렸습니다. 그러자 딸이 “난 지금까지 한번도 아빠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본적이 없어요”라고 소리 지르면서 자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고합니다. 이 장로님이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냥 울다가 나중에는 통곡을 하면서 하나님께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고백했다고합니다. 그리고, 딸의 방문에 노크를 한 뒤에 딸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니까 딸도 아빠에게 울면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고합니다.
자녀들이 보기에 아빠의 말과 행동이 다르므로 존경할 수 없다면 자녀들은 노여워 하고 속으로 “아버지 못하러 예수믿으세요? 내게 믿으라 하지말고 아빠나 잘 믿으세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예를 다 알 수도 배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분노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고 들어주고 스스로 결정하게 돕는 것입니다.
노목자님이 에멀리가 하늘이를 키우는 것을 보면서 자신보다 훨씬 더 자녀를 잘 양육한다고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에게 옷을 억지로 입히거나, 밥을 억지로 먹이거나, 소대변도 억지로 보게하지 않고… 밥을 굶게 되더라도, 소대변을 옷에 싸더라도 필요하다면 그냥 놔둔다고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야단이나 명령보다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동의하고 결정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대신해 주거나, 명령하고 때론 위협을 해서 억지로 하게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자녀를 훈계 없이 방치하거나 무조건 떠받들어 아이들을 망나니로 키워서 절제도 없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갖도록 키우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들은 주안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아버지는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는 자녀로 양육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아버지는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므로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치므로 스스로 부모를 순종하도록 양육해야하는 것입니다.
4절을 다시 읽습니다. 또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주님의 훈련이란 무엇인가? 훈련이란 것은 이론이나 개념보다는 삶의 행실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작년 우리 교회에 주중에 몇번 오셔서 제자훈련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홍피터 목사님에게 2살짜리 손자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 사모님이, 그러니까 할머니가 그냥 재채기를 하니까, 이 손자가 자기 손으로 자기 입을 막으며 할머니에게 Say “excuse me”라고 하더랍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2살짜리가 할머니를 훈련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어린 아이가 이 것을 스스로 깨달았겠습니까? 부모가 훈련을 시킨 결과이겠지요.
어린이가 두 세살쯤 되면 대소변 가리는 훈련 Potty training을 받습니다. 이 훈련의 첫번째 원칙은 어린아이들은 직접본 것을 흉내내면서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내 루스 그레이엄은 평생 성경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매일 아침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우리 아버지는 자리에 앉아 성경을 읽고 계셨다. 의료 선교사이셨던 아버지는 항상 정신없이 바쁘셨던 분인데도 아침 시간에는 항상 성경과 함께했다. 또 밤이면 일을 마치신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와 똑같이 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의 관심과 헌신을 그 정도로 차지하는 것이라면, 나도 한번 탐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신실한 자녀로 훈련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부모된 우리가 먼저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부모가 성경 읽는 모습을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자녀는 얼마나 될까요? 우리들의 자녀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 스스로가 먼저 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을 자녀들에게 훈련시킬 수 없습니다.
동현이가 태권도를 배우는데 , 하루는 사범이 검은띠를 찬 학생에게 동현이에게 동작을 가르쳐주라고 부탁 했다고합니다. 그런데, 검은띠를 찬 학생이 동현이 보다 동작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또 동작자체가 정확치 못해서, 사범한테 야단을 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실지로 부모와 자녀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아빠보다, 자신이 교회생활은 안하지만 더 도덕적이고 더 배려하고, 삶에 있어서는 더 예수님을 닮았다고 믿으면 그 자식이 교회생활의 필요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 것은 정말 무섭고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실지로 어떤 분이 미국에서 50년 동안 예수님을 믿게된 청년들의 가정 배경을 연구해 보니까, 부모님이 헌신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이거나, 아니면 비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어설프게 신앙생활하는 부모 밑에서보다 오히려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신앙을 갖게될 확률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변화를 원하는 그 모습의 본이 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을 훈련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또 여기보니까 주님의 훈계로 양육해야합니다. 주님의 훈련이 삶의 행실에 관한 것이라면 훈계란 것은 이론적인 뒷받침,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삶으로 보고 경험하면서 훈련받고 또 훈련시킬 수 있지만, 또한 우리는 말이나 글로도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또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2년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또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지를 말로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삶으로뿐 아니라, 말로도 성경에 대해서 기도와 말씀 묵상등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또 어떻게 친절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지 삶으로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동성결혼이 성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의학적으로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는 배워서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왜 주안에서 결혼을 해야하고 부부관계는 어때야 하고, 어떻게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또,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어떻게 재정을 관리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학교생활과 직장생활하고 어떻게 사회참여하는지 등 등 삶으로도 또 말로도 훈계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려면, 우리가 먼저 알고 실행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17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유능하게 하고, 온갖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딤후 3:16-17) 성경 안에 모든 선한 일을 위한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성경을 가장 기본적이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계속 배우되, 성경을 기초로한 삶의 여러 측면의 전문가들이 지은 책이나 강의를 통해 또 목사나 교사를 통해서 그리고 나눔을 통해서 계속 배워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자녀들을 주님의 뜻대로 양육할 수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 계속 배우고 훈련 받으므로 주님을 닮는 것과 주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자녀 양육에 성공하는 부모님들 특별히 아버지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아버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키 위한 배움과 훈련에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로서 과거를 한탄치 않고, 앞으로 성령님의 도움 가운데 계속 훈련받고 배우므로 좀 더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자녀들을 분노케 하지 않고 오히려 주의 훈련과 교훈으로 양육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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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버지들을 향한 명령” (에베소서 6:1-4) 6/17/2018
(이렇게 자녀를 양육하라)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또,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육적인 필요를 공급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정의 목자로서 자녀들은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여호수아 24:15; 딤전 3:4, 12)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자녀를 분노케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신해 주거나, 명령하고 때론 위협을 해서 억지로 하게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자녀를 훈계 없이 방치하거나 무조건 떠받들어 아이들을 망나니로 키워서 절제도 없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갖도록 키우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므로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치므로 스스로 부모를 순종하도록 양육해야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신실한 자녀로 훈련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부모된 우리가 먼저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가 먼저 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을 자녀들에게 훈련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변화를 원하는 그 모습의 본이 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을 훈련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주님의 훈련이 삶의 행실에 관한 것이라면 훈계란 것은 이론적인 뒷받침,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삶으로 보고 경험하면서 훈련받고 또 훈련시킬 수 있지만, 또한 우리는 말이나 글로도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또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등 등.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자녀들을 주님 의 뜻대로 양육할 수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 계속 배우고 훈련 받으 므로 주님을 닮는 것과 주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야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자녀 양육에 성공하 는 아버지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