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되어주는 교회" 빌립보서 1:3-11 2/2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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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모두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 모두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난 1월 첫주 Jason 홍목사님과 홍순이 사모님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점심식사가 끝나고 홍목사님이 제가 있던 테이블에 와서 제게 한가지 질문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질문의 내용은, 자신이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란 질문이었습니다. (홍목사님에게 우리의 대화내용을 설교에 인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말씀드립니다만) 그 때 홍목사님은 이 질문을 그냥 한 질문이 아니라 좀 심각한 상태에서 질문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날이 새 해 첫주이므로 홍목사님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교회의 자리를 지켰어야했습니다. 사실 그 때뿐 아니라, 그 전 주인 2017년도 12월 마지막 주일도 다른 분에게 설교를 부탁했다고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전혀 기쁨이 없고 힘들기 때문에 도저히 설교를 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왜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함에도, 자신이 기쁨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가를 정말 알고싶다는 것이었습니디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제가 홍목사님께 두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빌립보서 4:4절에 있지만 마 4: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성도들을 향해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한 사실을 주지시켰습니다. 바울에게(는 주님뿐만이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이 기쁨을 주는 중요한 원인임을 상기시켜드렸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이 주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요 15:10)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2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고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하고 우리의 기쁨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결국, 성도간의 사랑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홍목사님은 한번도 그런관점에서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이런 말씀을 해주셔서 고맙다는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게 나중에 문자메시지로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사랑 가운데 하나 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있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섬길때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고 기쁨을 느낀다고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제게 나눠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성서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갖는데 믿을 수 없는 만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서 하나됨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빌립보 교회는 이런 사랑을 실천하였던 교회요 기쁨의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사역 초기부터 그 후 10년이 지나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쓸 때까지 바울에게 기쁨이 되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밝힙니다.
홍목사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기쁨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방 사람들 사이에서 복음증거의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님들에게는 특별히 더 기쁨과 격려가 필요한 줄 압니다. 이제 내일이면 떠나실 조상민 성도님께서 앞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실 때, 바울에게 감사와 기쁨과 용기를 주었던 빌립보교회와 같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빌립보교회처럼 (조상민 성도님에게, 선교하시는 분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함께 빌립보 교회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와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번 째로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복음에 헌신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유럽지역에서 세운 첫번째 교회인데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의 교우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 받은 일로 나에게 협력한 교회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16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내가 쓸 것을 몇 번 보내 주었습니다.” (빌 4:15-16) 그러니까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개척하고 그 교회를 떠날 때부터 시작하여 빌립보교회를 떠난지 약 10년이 지난 후에도 빌립보교회는 빌립보에서 8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서 에바브로디를 보냈습니다. (2:30)
이렇게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보아주는 빌립보 성도들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이런 놀라운 사랑을 베푼 빌립보 성도와의 사랑의 교제를 복음 안에서의 교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7절에 보니까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확정함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간의 교제는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한 교제, 복음이 그 중심이 되고 복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자들의 교제였습니다.
우리가 조상민 성도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분을 많이 그리워할 것 같고 그 분의 선교사역을 격려해 드리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복음 증거에 온전히 헌신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복음 증거에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앞세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조상민 성도님을 존경하기 보다는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리워하거나 격려해 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단지 형식적인 관계만 갖다가 곧 잊게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여행시 갈라디아 지역에 갔을 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대했고 바울을 위해서라면 자기 눈이라도 빼줄 수 있을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안디옥으로 돌아가고 그 사이에 할례파 이단들이 침투해서 변질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의심하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구약 율법으로 돌아가서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기 시작합니다.,이들이 복음에 대해서 의심하고 흔들리기 시작하자 바울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기게되었습니다. (비슷한 일이 고린도교회에도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흔들리게 되거나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복음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소홀히 여기고 결국 쉽게 잊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빌립보 교회처럼 조상민 성도님같은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기쁨을 주려면, 우리들도 복음에 사로잡힌 교회 복음을 귀중히 여기는 복음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두번 째로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간에 서로에게 대한 사랑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멕시코로 갈 때 파송한 교회가 있습니다. 파송교회라고 하지만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교제다운 교제는 별로 갖지 못했었습니다. 그나마 저희를 파송했던 당시의 목사님이 은퇴하고 새로 목사님이 오시면서 성도들 간에도 분열이 있어고요. 그러다 보니까, 얼마 안있어 지원이 끊기고 연락도 두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다른 교회를 세웠고, 저희가 7년 반만에 돌아올 때는 그 교회를 방문하기가 어색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제 경우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수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있는 동안 파송교회의 성도들이 갈라지고 변화가 있다 보니까, 그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할 Home Church가 없어지고 영적인 고아로서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와도 반겨줄 교회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 것 비극이 아닙니까?
그러나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떠나고 10년 동안 복음 안에서 바울과 지속적인 교제가 있었습니다. 본문 6 절에 보니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들의 인생 끝날 때까지 복음 안에서 교제가 계속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도바울을 처음부터 10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바울을 계속 지원하고 돕고 격려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늘 바울의 기도를 보시면 단지 “너희”라고 그러지 않고 그들 모두를 개인적으로 아는 것처럼 “너희 모두"란 표현이 4번이나 나옵니다.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7 내가 너희 모두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 모두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You all”이란 표현이 한글 성경에는 표기가 안되있지만) 너희 모두라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둔 바울의 심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들간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도록 기도하는데 언제까지입니까?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리고 그들간의 사랑이 풍성해야 그리스도의 날에 “허물없는" 자로 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미 잘하고 있지만 빌립보성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1:27-28}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려면 그 전제가 있습니다.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한마음이 되고 한 뜻을 가진 운명공동체로서 지속되기를 원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의 공동체가 되려면 한마음과 한뜻으로 존재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복음증거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선교사님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고 동역자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 몇달 몇년이 아니라 교역자가 바뀔 때까지가 아니라, 성도들이 바뀔 때까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형제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동역자가 되어줄 때 우리 자신이 복을 누리고 또 그들에게 기쁨이 되고 큰 격려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조상민 성도님께서 어디서 어떻게 사역하던 우리가 끝까지 격려가 되어주고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이 곳에서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을 가지고 삶을 나누며 함께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지속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에 대한 사랑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에게 헌신)
빌립보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린도후서 8:1-4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등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를 칭찬한 장면을 기록합니다. 이들은 큰 환난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의 모습을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5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주님에게만 헌신 했을 뿐 아니라, 바울과 그 일행 선교사들에게도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단지 선교사역에 헌신하기 이전에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헌신되었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 영어부에 이우영형제, 영어로는 Benny형제가 있습니다. Benny는 인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들이 인도선교사로서 26년이상 섬기신 분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비자문제가 까다롭기 때문에 인도에서 머무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을 지원하는 교회들이 인도에 들어가서 사역할 때는 선교헌금을 보내는데 인도 밖으로 나와 있을 동안에는 선교헌금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선교사역에는 헌신되어 있는지 몰라도 선교사들에게는 헌신이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8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로마의 감옥에 갖혀 있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유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감금되어 있으니까 더 이상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감옥에 갖힌 바울을 돌보기 위하여 헌금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입니다. 선교사역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선교사에게 헌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보낸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2:30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고,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다 하지 못하는 봉사를 채우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바울을 돌본 것입니다. 이 것이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여러분의 재물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고후 12:14) 선교사님들에게 물질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떠나시는 조상민 성도님도 재정적인 지원도 필요하시겠지만, 그 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기도해 주고 그 분에게 헌신된 가족과 같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우리 21세기침례교회가 주님의 복음에 헌신된 교회 그리고 서로 서로에게 헌신된 교회, 그리고 조상민 성도님을 비롯한 선교사님들에게 헌신되므로 복음안에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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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민님의 댓글
박천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빌립보서 1:3-11 기쁨이 되어주는 교회
사도바울은 빌립보성도들을 향해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고백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쁨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방 사람들 사이에서 복음증거의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님들에게는 특별히 더 기쁨과 격려가 필요한 줄 압니다. 앞으로 조상민 성도님께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실 때, 바울에게 감사와 기쁨과 용기를 주었던 빌립보교회와 같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빌립보교회처럼 기쁨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첫번 째로 빌립보 교회처럼 복음에 헌신되어야합니다. 바울이 유럽에서 처음 세운 빌립보 교회를 떠날 때부터 약 10년이 지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간의 교제는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한 교제, 복음이 그 중심이 되고 복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자들의 교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빌립보 교회처럼 조상민 성도님같은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기쁨을 주려면, 우리들도 복음에 사로잡힌 교회 복음을 귀중히 여기는 복음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두번 째로 빌립보 교회처럼 교회지체들 간에 서로에 대한 사랑의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동안 파송교회 성도들이 흩어지고 갈라지므로 지원이 끊어지고 영적인 고아처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도바울을 처음부터 10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바울을 계속 지원하고 돕고 격려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1:6)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1:27}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려면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한마음이 되고 한 뜻을 가진 운명공동체로서 지속되어햐 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의 공동체가 되려면 한마음과 한뜻으로 존재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앞으로 조상민 성도님께서 어디서 어떻게 사역하던 우리가 끝까지 격려가 되어주고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이 곳에서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을 가지고 삶을 나누며 함께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지속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3. 세번째로 빌립보 교회처럼 선교사에 대한 사랑의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큰 환난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였던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라고 묘사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단지 선교사역에 헌신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헌신되었습니다. 선교사를 지원할 때 안식년이나 비자문제로 대기해야만 하는 기간에는 선교비를 지원치 않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선교사역에는 헌신되어 있는지 몰라도 선교사들에게는 헌신이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8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로마의 감옥에 갖혀 있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바울이 더 이상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으므로 선교지원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돌보기 위하여 헌금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에게 물질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떠나시는 조상민 성도님도 재정적인 지원도 필요하시겠지만, 그 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기도해 주고 그 분에게 헌신된 가족과 같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우리 21세기침례교회가 주님의 복음에 헌신된 교회 그리고 서로 서로에게 헌신된 교회, 그리고 조상민 성도님을 비롯한 선교사님들에게 헌신되므로 복음안에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