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하게 하는 자는” (2) 마태복음 5:1-9 7/2/2017
페이지 정보
본문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려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 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 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지난 주에 저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모든 불화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된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평화된 관계를 갖게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롬 4:25-5:1) 영어로는 peace with God을 말합니다.
또,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과 화평된 관계 속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우리가 현재적인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데살로니가후서 3:16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 면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 뿐 아니라, 시시 때때로 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필요합니다. 영어로는 peace of God을 현재적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화평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모든 불화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화평의 복음을 전하므로,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갖도록 돕는 것이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화평케 하는 자가 제일 먼저 화평케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교회로 화평케 하는 자란 주제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도록 우리를 한몸으로 부르신 이유.
이제 8월 초면 우리교회가 교회로 시작한지 17년이 되는데, 골로새서 3:15 절에 보면 우리를 2왜 교회로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And let the peace of Christ rule in your hearts, to which indeed you were called in one body. And be thankful. ESV)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는 것은 교회에 속한 각 지체의 사명이요 목적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교회로서 이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려면, 교회 지체인 우리 각자가 교회를 화평케 하는 자로 (Peacemaker로) 살아야 겠습니다. 이 구절을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다른 설교 내용은 잊더라도 이 구절 잊지 않고 외우셔서 이 말씀을 항상 기억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목적이요 사명이요 의무라고 할만큼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그 이유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 있다면 로마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되고 서로 서로 화목되어 화평된 가쁨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에덴 동산과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교회로서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 넘쳐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교회들이 하나님의 에덴동산 같습니까?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중년의 승객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면서 다투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그 누구보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풍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왜 아름다운 천국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것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해야 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들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도록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는 교회, 천국의 모습을 드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설교 뒤에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 자신을 돌아볼 때 제게는 이런 화평케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댓글을 쓴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성격이 온화하던지 사람들 간에 갈등이 있을 때 중재를 잘해서 peace-maker의 역할을 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이런 분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는 안믿지만 화평케 하는 능력이 있는 분들이 많다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을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평안과 다른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는 믿지 않지만 인격적인 분이 오면 교회분위기가 밝아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그리스도의 평안을 가져 올 수는 없 습니다.
실지 미국 어느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인들이 모인 어떤 자리에서 다른 교회의 어느 목사님에 대한 험담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계시던 한 장로님께서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험담을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 이 장로님이 이유를 설명합니다. “목사님들은 다 '자기 이름 석 자'의 명예를 먹고 사는 분들인데."라고 목사님에 대해서 흠담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이 장로님이 다른 분들이 목사님을 비난하는 것을 중지시켰지만, 목사님들은 다 자기 이름 석 자의 명예를 먹고 사는 분이다란 전제로 험담이 오고가진 않았다고 해서, 이 것으로 주님의 평화를 갖게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평화는 의에 근거한 평화입니다. 그리고 진리에 근거한 평화입니다. 거짓과 불의에 근거한 주님의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위해 죽으셔야만 화평을 이루실 수 있었을 정도로 하나님은 의로움을 중요시 여기십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화평된 관계를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도 없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 인간들의 문제는 화평을 원치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의 김정은도 2016년 신년사에서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정은도 평화를 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고 간에 심지어 독재자들도 다 평화를 원할 것입니다..
문제는 평화는 원하지만 어떻게 화평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런데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17.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롬 3)
북한의 김정은이 핵폭탄을 계속 개발하고 만들어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군사력이 있어야 평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력에 의존한 평화는 김정은만의 논리가 아니라 이 세상 거의 모든 나라들의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 8복에 대해서 설교하시고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세계 역사적으로보면 가장 평화로운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Pax Romana (로마가 주는 평화),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로마제국이 모든 다른 나라들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꼼짝 못하게 하므로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국가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적용이됩니다. 김정은이 고모부도 죽이고 자기가 말하는데 졸았다고 죽이고 안경을 닦았다고 자세가 공손치 않다고 고위직에 있는 자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8세란 어린 나이에 집권했기 때문에 자기 정권을 노릴지 모르는 제 2인자에 대한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전감을 느끼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을 정치포로 수용소에 가두는 것도 결국 나름으로 평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김정은은 물론 특별한 경우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도 경쟁에서 이기고, 남을 지배하고 제압하고 남에게 칭송받고 높임을 받아야만 마음에 평화를 느끼는 속성이 있습니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우리해서 비싼 옷을 사입는 사람, 무시 당하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 무시 당할까봐 아는척 하는 사람, 무시 당하기 싫어서 비싼 차 몰고 다니는 사람, 무시 당하지 않으려고 자식들 열심히 학원에 보내고 일류 학교 보내려는 사람, 돈 많이 벌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직장 다니므로 무시 당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내려 볼 수 있게 되면 평안을 느끼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 아닙니까? 결국 자기 힘을 키워 다른 사람들을 내려 보고 지배할 수 있어야 맘의 평안을 느끼겠다는 김정은의 논리와 비슷한 것 아닙니까?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회도 이런 세상적인 평안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입니다. 교역자들이 모이면 성도들이 몇 분 모이는가가 목회자의 평가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것이 목회자의 성공기준을 가름하는 자가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그만큼 기도와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만약 목회자나 교회성도가 교회 교인들 숫자에 따라 교회의 힘과 능력과 실력에 따라 자부심을 갖게하거나 좌절감을 느끼고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갖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힘이 있어야 평화를 느끼는 세상적인 평화의 원리에 지배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우리도 지난 수년간 계속적으로 교인들의 숫자가 늘기보다는 줄어들므로 마음이 안타깠습니다. 그러나 이 안타까움이 새로운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마음 아픔 때문입니까? 교회로서 꼭 감당해야할 사명을 감당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입니까? 내 영혼이 주님을 더욱 사랑치 못하고 영적으로 성장치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입니까? 그렇다면,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나, 사람 숫자가 주는 뿌듯함 안도감 사람들의 인정 등 등을 못 느낄 수 없서 안타까와 한다면 이 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이지 주님이 주신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4:27)
여기 분명히 세상이 주는 평화도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이 주는 평안을 추구할 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함께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강해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고, 많아야지만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지배해야지만, 존경 받아야지만, 커야지만, 똑똑해야지만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결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나 여건에 상관 없이 우리는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자가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적용해야할 것을 한가지 나누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8-9절을 읽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도 있고 악을 악으로 갚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들로서 욕하는 자도 있고 욕을 욕으로 갚으려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투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런데 이 말씀이 좀 믿기 놀라운 이유가 있습니다 (벧전 1:9)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이토록 사랑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자도 있고 악을 악으로, 욕하는 자도 있고 욕을 욕으로 갚으려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제가 놀란 것은 지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는 주후 64-65년경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할 무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만 ‘고난’혹은 시련이라는 단어가 17번 나옴니다. 이중 7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10번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된 것입니다. (1:1, 6; 4:12; 5:9)
주님을 이토록 사모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박해를 함께 받으면서도 서로 이런 타툼이 있었고 서로 원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이 것이 이들이 특별히 이상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성령의 은사가 넘쳐났음에도 교인들끼리 자기끼리 싸우다 해결이 안되니까 재판정에까지 고소하지 않았습니까?
갈라디아서 5:15절에 보면 “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공동번역에는 서로 물고 뜯고 삼키면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사납고 사악한 짐승 수준아닙니까?)
그 다음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육체의 욕심은 이토록 사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들도 안보이도록 인격이란 이름으로 포장했을 뿐이지 이 것이 우리들의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다시보시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도록, 욕을 하는 자들에게 복을 빌도록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요 사명입니다.
불행히도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으려는 성도들로 그득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하고 화해할 생각을 안하는 자들로 꽉 차있습니다.. 아예 관계성을 포기하거나, 원수를 갚을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로 그득 차 있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간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니 교회가 희망이 있겠습니까?
저 사람 이제는 꼴 안보겠다 상관 안하겠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평화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결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예 예배도 드리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 5:23)
기도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막 11:25)
저나 여러분이 주님의 평안을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다른 성도와 화해해야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그 어떤 어려운 조건 가운데 있더라도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식을 초월한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외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 좋은 조건 가운데 있더라도 심지어 사람들이 몰려오고 외적인 부흥이 있더라도, 다른 성도들과 서로 화평된 관계 없이 그리스도의 평안은 절대 누릴 수 없습니다. 만약 다른 성도를 용서치 못하고 사랑치 못하면서 평안을 누린다면 그 것은 단지 세상이 주는 평안일 것입니다. 절대 주님이 주는 평안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의 만찬을 듭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이 사람은 죽어도 용서 못해 하는 분이 있다면 회개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분은 오늘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드립니까?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던 적대감의 벽을 허무시고 둘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드시고 화평케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장벽만 허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장벽도 허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장벽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장벽을 허물 생각을 안하면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주님의 피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피되 내가 용서를 빌거나 용서를 해야 할 대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다른 지체를 섬기고, 높여주고 ,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결국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체험해야할 놀라운 주님의 평화가 있기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들면서 이런 놀라운 주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박천민님의 댓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마태복음 5:1-9
v.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려면?: 화평케 하는 자가 제일 먼저 화평케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영역은 교회입니다.
1.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도록 교회를 한몸으로 부르신 이유.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는 것은 교회에 속한 각 지체의 사명이요 목적 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려면, 교회 지체인 우리 각자가 교회를 화평케 하는 자로 (Peacemaker로) 살아야 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또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2.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는를 이룰 수 있을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세상이 주는 평안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의 차이점을 알라: 강해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고, 많아야지만, 지배해야지만, 존경 받아야지만, 커야지만, 똑똑해야지만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결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나 여건에 상관 없이 우리는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자가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실질적 적용
다른 성도를 용서하고 또 용서를 받고 화해해야합니다
진심으로 다른 지체를 섬기고, 높여주고 ,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체험해야 할 놀라운 주님의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